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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17)화 (11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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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악어는 확인해 볼 것이 있다고 말했다. 민재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거냐고 묻자 그는 아직 민재를 완전히는 믿고 있지 않으므로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민재는 어디에 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악어를 따라가고 있었다. 못 믿는 사람과 같이 가는 건 가능하냐고 따지려고 하다가 관두었다.

악어는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혼자 작게 욕을 읊조리기도 했다. 위치도 상세히는 모르는지 근처 공간을 몇 바퀴째 돌고 있었다.

“정보 제공자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야?”

민재가 물었다. 그러자 악어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우리한테 빚이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틀린 정보를 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다소 안일한 판단이었다. 정확한 맥락을 모르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민재는 지금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위치가 어딘데?”

민재가 악어를 붙잡고 물었을 때였다. 근처에서 쿵 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악어와 민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뛰었다.

두 개의 인영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쪽이 한쪽을 잡고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어디서 본 듯한 형상이었다.

찰나의 예감이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민재는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일순간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사방으로 무언가 빠르게 튀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주변 바닥에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지환이 붙들고 있던 자가 커터였던 모양이었다. 벌어진 상처들을 안고 지환이 뒤쪽으로 추락했다.

‘왜?’

지환의 입이 벙긋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향해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잭…?”

그때 바로 옆에서 악어가 누군가를 중얼거렸다. 민재는 빠르게 그를 보았다. 지환을 지칭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건물을 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듯했다.

민재는 곧이어 그 이름을 자신이 어디서 들은 건지 떠올렸다. 태현이 언급했던 이름이었다. 그럼 악어가 잭을 알고 있다는 뜻일까?

민재는 무언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악어의 어깨를 붙들었다. 물어봐야 할 것이 많았으나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야. 박지환이 나랑 눈 마주쳤어.”

“뭐?”

악어가 되물었다. 민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 알아봤을 수도 있으니까 떨어졌다가 만나자.”

그의 말에 악어는 잠시 멈칫했다.

“야….”

뛰어가려는 민재를 붙잡은 악어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잡히면 너… 죽냐?”

센터에서 도망친 걸 들키면 죽냐는 의미 같았다. 조금 전까지 못 믿겠다고 하더니 그래도 그간 인간적인 정은 든 모양이었다.

“모르지.”

애초에 자신은 죽은 걸로 알려져 있으니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민재의 애매한 대답에 악어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럼… 같이 가.”

“안 돼. 난 이미 노출된 인원이니까 한 시간 뒤에 터미널에서 보자. 삼십 분 이상 늦으면 서로 버리고 돌아가는 거다.”

민재는 단호하게 악어를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환이 추락한 방향이었다. 아직 그가 다시 날아오르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왜인지 민재는 조급해졌다.

그가 추락한 지점 근방을 다 뒤졌으나 민재는 지환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흘린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이 있을 뿐이었다.피가 튄 방향으로 추측해 보건데 민재가 달려온 쪽으로 간 듯했다.

민재는 바로 옆쪽 벽에 몸을 숨겼다. 왜인지 모르게 그가 자신을 찾으러 움직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지환이 다시 돌아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조금 전 자신이 핏자국을 발견한 장소에 나타난 지환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듯했다. 민재는 최대한 벽에 몸을 붙여 몸을 숨겼다.

지환의 몸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민재는 멀리서 힐을 보내 볼까 잠시 고민했다. 위치를 들키지 않고 가능할까? 이 부근에 전체적으로 퍼지도록?

“선배.”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에 누구인지 이름을 붙이지 않아 정확히 누굴 부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지환!”

저 멀리서 누군가 지환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선배.”

다시 한번 지환이 말했다. 조금 전보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민재는 품속에서 태현이 건네준 알약을 꺼내 입에 물었다.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늘 가이딩을 아껴야 했던 민재가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방식이었다.

민재는 지환이 서 있는 곳 바닥에 마음속으로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반경 내에 힐을 쏟아부었다. 빛이 눈에 많이 띄지 않도록 밑에서부터 솟구치게끔 하는 방식이었다.

지환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곧바로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반경을 벗어나자 힐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원 안을 천천히 돌았다.

지환의 상처가 지혈이 되자마자 민재는 능력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알약을 삼키고 기척을 숨긴 채 달리기 시작했다.

“야! 너 여기서 뭐해!”

뒤편에서 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재는 느려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민재는 주위를 몰래 돌아다니며 센터에서 출동했던 인원이 철수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지환을 처음 발견했던 건물 주변을 찾아가 뒤지기 시작했다.

악어는 분명 잭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정보 제공자가 바로 잭인 것일까? 그럼 지금 악어, 두더지, 토끼는 새희망복지회의 일원일 수도 있었다.

민재는 건물들을 돌아다니다가 또다시 한 층이 구조물 외엔 깔끔하게 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로써 짐작하게 된 것이 있었다.

박지환은 새희망복지회를 쫓고 있다. 단순히 도망자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있는 공간을 찾아가 에스퍼들을 잡아들이고 있다.

그게 지환이 새로 맡은 임무 같은 건가? 민재는 이전에 지환이 다른 에스퍼를 제압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는 그저 도망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여러 곳에서 지환이 지속적으로 숨어 있던 에스퍼들을 찾아낸다는 건 계속해서 에스퍼들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 민재는 단순한 도망자 집단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센터를 싫어한다고 했다. 센터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센터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단순히 소문만 듣고 말했다기에는 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민재는 악어와 두더지, 그리고 토끼가 센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센터로부터 도망쳐서 만난 이들이 센터의 과거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니. 공교롭기 그지없었다.

민재는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터미널에 도착했다. 주변에 아는 얼굴이 있을까 싶어 계속 천천히 골목으로 돌아 돌아서 길을 찾아야 했던 탓이었다.

터미널에서 초조한 얼굴로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는 악어에게 다가가자 그는 민재에게 짜증을 냈다.

“뭐 하느라 늦게 와! 잡힌 줄 알았잖아!”

소리를 질러놓고는 조금 민망한지 잠시 가만히 침묵하던 악어는 민재에게 표를 내밀었다. 아직 삼십 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는 버스표였다.

“이 시간보다 늦었으면 진짜 가려고 그랬어.”

변명하듯 악어는 중얼거렸다. 민재는 그런 악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악어도 평소 마스크를 자주 쓰고 다니기 때문에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볼 만한 일은 별로 없었지만 민재 자신보다는 어리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처음 이야기한 것에 비해 포부는 있으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고, 냉정하지도 않은 이자들은 어떻게 잭과 아는 사이일까.

“다음에 혹시 또 이런 일 생기면 더 빨리 먼저 가.”

민재의 말에 악어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왜. 내가 먼저 갔으면 싶었냐?”

“고맙긴 한데 만약 문제가 생겼으면 둘 다 잡히니까.”

악어는 별다른 말없이 자신이 들고 있던 표를 내려다보았다. 둘은 같이 걸어 버스에 탑승했다. 자리를 잡고 나서야 악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그런 상황이 많았냐?”

악어가 물었다. 민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악어를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누굴 놓고 가야 하거나 하는 상황. 선택해야 하는 거.”

선택이라. 현장에 있으면 많은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긴 했다. 다만 선택을 하는 건 민재가 아니었다. 에스퍼는 늘 구조를 최우선으로 한다. 그 효율을 위해서 움직이는 게 몸에 배어 있는 것 같긴 했다.

“뭐… 없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악어는 잠시 창밖을 보며 침묵했다.

“오늘 확인해야 한다던 건 확인한 거야?”

민재의 질문에 악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대충은 확인했어.”

악어의 얼굴에 착잡함이 내려앉았다. 민재는 잭에 대해 물어보려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악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넌 우리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

“…왜?”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우린 도망쳐서 네가 겪은 일들을 모르고 살고 있으니까.”

아. 민재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서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 건가?

민재는 잠시 생각했다. 창밖으로 점점 논과 밭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민재는 순간에 끼어드는 묘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부러운 건 맞았다. 어쩌면 이렇게 평범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삶을 그도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별로.”

그래도 이들이 밉지는 않았다. 다만 민재는 몇몇 순간에 센터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우석과 은정이 떠올랐고 그보다 더 자주 지환이 떠올랐다.

방식은 다르지만 그에게는 일상인 사람들이었다. 민재의 평범은 그 안에 있었다.

“미안하단 말은 안 해.”

악어는 다짐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민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러든가.”

버스는 어느새 그들이 지내고 있는 지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논 위로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오늘 일 토끼한테는 말하지 마.”

악어가 말했다. 민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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