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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정승규를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따라 들어오려는 은정의 앞을 막아섰다.
“이야기 좀 나눌게.”
“나도….”
들어오려는 은정의 어깨를 살짝 밀친 지환은 그대로 문을 닫고는 잠가 버렸다.
“야!”
은정이 소리치며 화를 내는 것을 무시한 지환은 그대로 정승규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정승규는 그런 지환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나 진, 진짜 아는 거 없어.”
그에게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은정이라면 정승규가 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테지만 지환은 아니었다.
“우선은 기억나는 대로. 어디서 눈 떴어요?”
“정문 바로 옆 골목 앞 편의점 의자에 앉아 있었어.”
정문에서 가까운 위치에 데려다 놓았다니 꽤 대담한 태도였다. 도발하는 건가? 생각하며 지환은 다음 질문을 했다.
“깨자마자 든 생각은?”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왜?”
“말했잖아. 난 임무 끝나고 복귀 중이었다고.”
정승규는 건물 복구 현장에서 조명을 담당하다가 가이딩에 노란불이 들어와 복귀를 하던 길이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때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는 기억 안 나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정승규는 누군가 자신에게 이름을 물었고, 누구를 기억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게 누구였는데요?”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답한 뒤로 기억이 없어.”
지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디에서 질문을 들었는지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정승규는 대략적인 위치를 불러주었다.
그곳은 지환이 민재를 발견했던 장소와 멀리 떨어진,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정승규의 복귀가 민재가 모습을 드러낸 것과 정말 관련이 없을까? 지환은 생각했다.
“혹시 민재 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요?”
“내가 임무 나가기 전에 그냥 센터에서 본 거? 그러고 보니 민재도 나랑 비슷하게 사라진 거야? 그래서 네가 팀장이 되었고?”
지환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정승규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정말 일 년이 지난 거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흘러버렸으니 황당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지환은 다시 민재와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환은 확실히 그를 알아보았다. 먼 곳이었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건 우민재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도 정승규처럼 그간의 기억이 없거나 기억에 문제가 생겼을까? 그래서 도망쳤나?
그러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지환은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던 등이 눈앞에 반복해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왜?
하나의 질문이 지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때였다.
쿵.
누군가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박지환! 당장 문 안 열어? 이거 월권이야, 너!”
주호영이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잽싸게 튀어 온 모양이었다.
지환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승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야!”
호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환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을 열어 들어서려는 호영의 앞을 막아섰다.
“시끄러워요.”
“너 검사 끝나자마자 나한테 보고를 해야지 네 멋대로 행동하면….”
“새희망복지회 조사 관련은 내 관할이에요. 그렇게 마무리된 거 아니었나?”
“뭘 숨기는 건데?”
호영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호영을 지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센터장한테 물어보시든가.”
지환은 다시 문을 닫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말의 여파가 꽤 큰 것인지 호영은 조용해졌다. 지환은 다시 정승규를 보고 물었다.
“센터, 나가고 싶어요?”
지환은 정승규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모양인지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센터에 남기로 한 것이었다.
일 년 전, 민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승규를 보호하려는 기색이 있었다. 이자가 특별해서라기보다 민재는 에스퍼들에게 약했다. 그와 같은 처지나 다름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연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환 역시 그 덕분에 특혜를 맛본 자 중 한 명이었다. 우민재는 자신을 실험에 넣지 않기 위해 페어로 받아들이고,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대중에게 노출해야 했다.
그간 민재를 생각할 때마다 지환이 가장 견딜 수 없던 부분이었다. 지환은 현재 상황에서 우민재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민재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행동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조 박사의 눈이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 반짝였다.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되게끔 한 건지 알아내.”
지환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조 박사는 주황색 경고등이 들어와 있는 정승규의 손목을 보고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폭주 전조 증상을 느끼지 않아?”
“네.”
지금 상황이 두려운 듯 정승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정승규가 물었다.
“당신이 당분간 주기적으로 와야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요.”
“얼마나 보존해야 돼?”
조 박사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온전하게.”
“온전한 상태로는 못 알아내는 것이 많은데.”
“피 한번 뽑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손대지 마.”
지환의 단호한 답에 조 박사는 혀를 차더니 주사기를 들고 오겠다며 실험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걸 알아서 별다른 일은 없을 거예요.”
지환의 말이 더 겁먹게 한 건지 정승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 왜….”
왜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와야 했는지 묻고 싶은 것 같았다. 지환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꼭 알아내야 할 게 있어서.”
***
민재는 조금씩 시골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시골 생활은 단조로웠다. 새벽에 일어나 밭일을 하고, 오후에는 휴식을 취하거나 이따금 이장님이라는 아저씨가 부탁하는 일을 처리했다.
따지자면 민재를 포함한 네 명의 청년들은 이 시골 마을에서 심부름꾼 센터 같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사이렌이 한두번 더 울렸으나 민재가 지내고 있는 곳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는 위치였다. 민재는 이렇게 사이렌 소리를 듣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본 적이 있던가 돌아보게 되었다.
이곳에선 꽤 바빴지만 비슷비슷한 하루들을 보냈다. 그것이 밭을 가꾸거나 같이 밥을 먹거나 포대 자루를 옮기거나 하는 일의 연속이라는 것이 민재에겐 새로웠다. 그는 언제나 폭발이나 붕괴나 죽음과 가까이에 있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순간의 연속이 그에겐 일상이었다.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거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그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민재는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더불어 시골에 익숙해지는 만큼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졌다. 악어는 주로 육체노동을 잘하는 편이었고, 자신의 여동생인 토끼를 끔찍하게 여기는 시스콤이었다.
두더지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자꾸 얌체처럼 민재의 생필품을 빌려간다는 명목으로 훔쳐갔다. 그러나 그를 가장 잘 챙겨 주고 이것저것 많이 알려 주는 것 역시 두더지였으므로 민재는 별다른 제재 없이 그가 물품을 뜯어가는 것을 넘어가 주었다.
토끼는 조용하면서도 쾌활한 성격이었다. 소심한 편이라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진 않았으나 필요할 땐 말을 했고, 적재적소에 빠르게 움직이거나 행동하는 능력은 좋아 보였다.
두더지가 주기적으로 민재를 가이딩 해 주었기 때문에 민재는 부러 태현이 준 약을 적게 먹어야 했다. 이따금 갑작스레 가이딩이 떨어질 때에만 몰래 약을 먹었다.
그리고 토끼를 제외한 인원이 이 주에 한 번 순찰을 나갔다.
최근 센터에서 턴 지역-이들은 그렇게 표현한다-을 위주로 해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차례로 악어가 되었을 때 그는 민재를 지목했다.
“나랑 같이 가.”
아무래도 민재 혼자 보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계속 토끼처럼 보호만 해 줄 수도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민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안락함에 젖어 있었으니 상황을 좀 파악해 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재는 혹시 몰라 숙소를 나서는 길에 태현이 챙겨 주었던 돈과 약을 옷 안쪽에 숨겨 모두 챙겼다.
둘은 우선 가장 최근 사이렌이 울렸던 곳으로 가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민재가 생필품을 사러 들렀던 곳의 근처였다. 한 층의 창문이 모두 날아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당 건물이 어딘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민재와 악어는 그 안으로 들어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창문이 깨진 것을 제외하고는 현장을 치운 것인지 파손된 물품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다만 꽤 세게 부딪힌 것인지 벽 한쪽에 균열이 가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저기 처박힌 놈이 있다면 이곳에서 단순 일반인 구출이 이루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센터의 누군가 출동을 했었고, 에스퍼 간의 다툼이 있었음을 의미했다. 민재는 순간 그때 빠르게 도망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니 괜스레 헛웃음이 나왔다.
‘도망자 다 되었네.’
늘 출동하던 그가, 이젠 출동하는 에스퍼들을 피해 다니며 빨리 튄 것에 안도하다니. 민재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화장실로 사용되었던 공간 중 하나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민재는 문 뒤에 있는 작은 알약 하나를 발견했다.
악어는 옆쪽 공간을 살피고 있었다. 민재는 그 몰래 몸을 숙여 알약을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알약은 자신이 태현으로 받은 것과 동일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알약이라는 것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크기나 모양이 너무 비슷했다.
민재는 조용히 주머니에 그 알약을 집어넣었다. 이제 이 공간이 어떤 곳이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새희망복지회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곳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사를 위해 침입한 에스퍼가 있을 터였다.
“야무지게 털린 거 같네.”
악어가 중얼거렸다. 민재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도망자들이 털린 거야. 그들 중에 뭘 하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더라고.”
“…뭘 하는데?”
“예전에 암시장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그쪽에서 들은 소문이야. 뭘 하는진 모르는데 뭔가 꾸미는 일이 있고. 그걸 털려는 센터 때문에 조용히 지내는 우리 같은 애들이 피를 본다고.”
악어가 센터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때마다 민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공감과 반감이 계속해서 교차했다. 민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았다. 이제 그들은 좀 더 멀리 나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