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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새벽, 민재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낯선 방과 이부자리. 민재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떠올렸다.
다시 방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민재는 기척을 죽이고 몸을 일으켰다.
민재는 마스크를 쓴 뒤 문 뒤편에 서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오빠가 깨우라고 해서요… 어?”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말을 하다 말고 의문을 표했다. 민재는 재빠르게 문 앞으로 나서며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토끼였다. 그 뒤에서 민재를 바라본 악어가 무심한 얼굴로 민재에게 삽을 내밀었다.
“일하러 가자.”
민재는 멍하니 흙더미를 바라보았다. 텃밭이라 치기엔 넓었고, 논이라고 하기에는 좁아 보였다. 시골 안쪽 구석진 곳이다 보니 노인들이 소일거리를 하며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두더지와 토끼 그리고 악어는 자주 밭일을 도와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도망자 집단에는 그들만의 특별한 생존방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민재는 조금 당황했다.
악어는 열심히 땅을 팠다. 왜 그의 닉네임이 두더지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땅을 파낸 자리에 두더지와 토끼가 열심히 무언가를 심었다.
민재는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어색하게 땅을 팠다. 악어는 그런 민재에게 어디를 파야 할지 알려 주었다.
“넌 에스퍼가 왜 이렇게 비리비리하냐? 센터에서 싸움도 못했을 거 같은데.”
악어의 말에 민재는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인데.”
센터에서는 대부분의 에스퍼들이 알아서 민재를 피해 다녔다. 그는 실장인 데다 등급이 가장 높으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비리비리 에스퍼 취급을 받다니. 재밌는 일이었다.
“그래? 왜지. 의외로 센터 놈들도 예의를 차리나 보네.”
꽤 뼈가 있는 말이었다. 민재는 땅을 파던 것을 멈추고 악어를 바라보았다.
“센터에 상당히 좋지 않은 감정이 있나 봐?”
“당연하지. 그럼 넌 좋은 감정이 있어서 도망쳐 나왔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민재는 악어의 말이 기분 나빴다. 그는 여태까지 센터와 에스퍼들을 분리해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센터가 나쁜 거지 거기 있는 에스퍼들이 나쁜 건 아니야.”
민재의 말에 악어가 코웃음을 쳤다.
“너희는 정말 센터 밖을 잘 모르는구나?”
센터 밖이 어떻기에? 악어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에스퍼들이 밖에서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는 의미 같았다. 민재가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자 악어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너도 한번 쫓겨 보면 알겠지.”
그 후로 악어는 말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두더지는 그런 민재와 악어를 힐끔 쳐다보더니 민재에게 머쓱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러나 따로 설명을 더 해 주지는 않았다.
“벌써 끝낸 거야? 이거 먹어라.”
그들의 어색한 침묵은 한 할머니가 등장하면서 깨졌다. 동이 트고 얼마 되지 않아 밭으로 찾아온 할머니는 커다란 나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아이고 할머니! 뭐 이런 걸 이고 오세요. 저 부르시지.”
“그럼 내가 여기 와서 너 불러서 다시 오리? 귀찮어.”
두더지가 빠른 몸짓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가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위에 덮어놓은 면보를 걷자 전을 부친 것과 찐 감자가 잔뜩 담겨져 있었다.
“먹어.”
할머니는 밭의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털썩 앉았다. 그러자 악어와 토끼도 빠르게 다가와 할머니 곁에 앉았다. 두더지는 빠르게 바구니 안에 있던 젓가락을 나누어주었다.
“한 놈 더 왔네?”
할머니가 민재를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민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민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민재는 고민하다 마스크를 조금 내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감자를 하나 집어 들어 베어 물었다.
“새초롬하게 생겼네.”
“그렇죠, 할머니. 족제비 새끼처럼 생겼죠.”
“제비? 응. 제비다.”
두더지가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자 할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족제비와 제비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으나 민재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알아보지만 않는다면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었다.
“볼이 왜 이렇게 파였어.”
할머니가 민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질문인지 질책인지 알 수 없는 듯한 애매한 어조였다. 꽤 퉁명스러운 말투였음에도 민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잘 못 먹어서요.”
실제로 오랫동안 뭘 제대로 소화시켜 보지 않은 위장은 민재를 내내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민재의 앞으로 자꾸만 음식들이 들이밀어졌다. 할머니가 건네는 것들이었다. 민재는 꾸역꾸역 받아 입안에 넣고 달짝지근한 부추와 버섯 등이 담긴 전을 씹었다.
“많이 먹어라.”
“네…”
커다란 바구니 한 가득 있던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나중에 두더지가 알려준 사실인데 밭일을 도우면 끼니도 이렇게 해결할 수 있어 자신들에게는 최고의 직장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육체적 노동을 한 민재는 감기는 눈을 애써 끔벅이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숙소에 민재가 빨리 들어가 누우려고 했을 때였다. 그의 어깨를 두더지가 잡아챘다.
“시내 나가자.”
***
두더지가 말한 시내는 시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커다란 마트 하나, 일주일에 열리는 장터가 하나 있는 곳이었는데 좀 더 가면 옷이나 여러 잡화를 파는 상점거리가 더 있다고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졸라 따라온 토끼는 좁은 시내를 보는 것도 재미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다섯이나 열여섯은 되어 보이는데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좀 더 순수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자주 못 나오나 봐요.”
민재가 묻자 토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위험하다고 해서요.”
보아하니 악어는 토끼라는 아이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것에 두더지도 딱히 반대 이견이 없어 보였고. 그러니 이 아이를 밖에 최대한 내놓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럼 오늘 재밌게 구경하다가 들어가요.”
민재의 말에 토끼가 신이 난 듯 웃어 보였다.
수저세트를 파는 곳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 민재를 보고 두더지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나무 수저를 골라 민재에게 내밀었다.
“참나. 이렇게 모자라는 애는 또 처음 보네.”
모자라다니. 민재는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대뜸 막말을 선사한 두더지는 민재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옷이 잔뜩 쌓여 있는 좌판대였다.
“이거. 이거.”
그냥 천들이 쌓여 있는 것 같은데 그것들을 마구 헤집은 두더지는 어렵지 않게 여러 가지를 골라내었다. 휙휙 던지는 것들을 받아 살펴보니 심플하고 편해 보이는 옷들이었다. 꽤 여러 벌을 민재의 팔 위에 쌓은 두더지는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너는 운 좋은 줄 알아.”
자신만만한 말을 내뱉은 두더지는 옷을 판매하고 있는 사람과 무언가 협상을 하는 듯했다. 두더지는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옷을 판매하는 상인의 외모를 칭찬했다. 그러자 상인은 선뜻 옷값을 깎아 주었다.
“장난 아니지?”
요청한 적도 없는 호의를 베푼 두더지가 잘난 척을 했다. 손해 본 것은 없었으므로 민재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줬다.
계산을 마친 뒤 민재는 토끼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근처 침구를 판매하는 곳에서 토끼 모양의 기다란 베개를 바라보고 있는 토끼를 발견했다.
“갖고 싶어요?”
민재가 묻자 토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민재는 양손 가득 들린 짐을 내려다보다가 두더지를 바라보았다.
“너 저거 가져와.”
“오….”
눈을 반짝인 두더지는 베개를 들어 올리더니 옆에 있는 다른 베개도 같이 들어 올렸다.
“그건 내려놔.”
“치사한 새끼.”
단호한 민재의 반응에 두더지는 혀를 찼다. 토끼는 그런 둘의 곁에서 내내 안절부절못해 민재가 몇 번이나 달래야 했다.
“정말 괜찮아요. 저도 잠자리를 받았으니까 이 정도는 보답해야죠.”
“그러니까 나한테는 왜 안 하냐고.”
이미 칫솔 등 몇 가지 생필품 세트를 새 것으로 선물 받아놓고도 두더지는 입을 자꾸 털어댔다. 민재는 그런 두더지의 말을 가볍게 씹어 주었다.
커다란 봉투를 양팔에 끼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민재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근처 건물 중 한 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게 보였다.
“야. 미친.”
두더지가 경악하더니 갑자기 토끼를 쳐다보았다.
“뛸 수 있어?”
토끼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나 생각하다 문득 현재 자신이 처한 처지를 자각했다.
사이렌이 울렸다는 건 곧 에스퍼들이 도착한다는 뜻이었다. 민재가 양손에 든 봉투 중 하나를 토끼가 가져갔다.
“저 힘 세요.”
토끼가 해맑게 웃어 보이더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야. 빨리 따라와. 우리 놓쳐도 난 몰라!”
얌체 같은 말만 늘어놓은 두더지도 튀어나갔다. 민재는 연기가 퍼지고 있는 건물을 다시 돌아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외진 곳에서 사이렌을 듣는 건 많이 익숙한 상황은 아닌지 꽤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민재는 뛰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경찰 한 명을 붙잡았다.
“건물에서 떨어진 쪽으로 사람들 안내해요.”
“네! 알겠습… 당신 뭐야?”
저 멀리서 날아오는 몇 에스퍼가 보였다. 민재는 경찰이 물어보는 말을 무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그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