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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12)화 (113/181)

112

“야. 족제비.”

민재는 인내심을 시험당하고 있었다. 두더지가 그를 지갑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더지는 휴게소 앞 매점에서 민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민재가 다소 짜증스러운 말투로 물어보자 두더지가 턱 끝으로 진열된 음식을 가리켰다.

“나 핫바 하나만.”

태현이 준 돈의 일부를 보여준 것이 화근이었다. 이 두더지 자식은 걸신이 들린 것인지 먹을 것만 보이면 사달라고 민재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넌 왜 두더지냐? 돼지 아니고?”

민재가 대놓고 비꼬아도 두더지는 뻔뻔했다.

“너도 좀 먹어놔. 한번 들어가면 자주 못 나오니까.”

대체 어딜 들어가기에. 두더지는 신문물을 접해 즐겁다며 여기저기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전 터미널에서 예상지역을 이야기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민재는 결국 핫바를 계산했다. 두더지는 입속에 핫바를 구겨 넣으며 민재를 힐끔 쳐다보았다.

“센터 밥이 별로냐?”

지폐를 내미는 민재의 손을 보고 한 소리 같았다. 별로였나? 생각해보면 맛있는 건 아니었으나 딱히 별로라고 할 것도 없었다. 민재는 밥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우석이 이따금 챙겨주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지환이 챙겨주었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흐르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지환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민재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너희가 아는 센터는 좀 어때?”

민재가 물었다. 그러자 두더지가 어이없다는 듯 민재를 바라보았다.

“정보를 주기로 한 건 너였잖아.”

“난 내부를 알고 넌 외부를 알잖아.”

두더지는 민재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둘은 다시 시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기사는 모든 인원이 탑승했는지 대강 확인한 후 버스를 출발시켰다.

“예상 지역이 어디어딘데?”

그 물음에 두더지가 민재를 슬쩍 쳐다보았다.

“…센터에 있었다며. 박지환 에스퍼랑 일해 본 적 있어?”

일을 해보다마다. 내가 다 가르쳤는데. 민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괜찮냐…?”

측은지심이 담긴 듯한 목소리였다. 두더지는 어느새 꽤 동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재는 조금 당황했다.

“어?”

“워낙 유명하잖아. 후배들 조지기로.”

후배들을 조진다고? 민재와 둘이 있을 때 조져지는 건 주로 지환이었다. 민재는 멍하니 두더지를 바라보다 물었다.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너도 센터에서 도망친 거야?”

“아니. 들어가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

두더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전해줬다. 지환이 나가는 현장에서 매번 쥐어터지는 에스퍼들을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상사를 욕하는 커뮤니티에 꽤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박지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걔가 좀 미련한 구석이 있어도…”

“걔? 너 박지환보다 선배야?”

저도 모르게 지환을 두둔하는 민재를 두더지가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민재는 재빠르게 자신의 실수를 정정했다.

“도망쳤는데 선배는 무슨 선배야.”

“뭐… 하긴.”

두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희는 몇 명이야?”

민재가 물었다.

“세 명. 네가 들어오면 네 명이 되겠네.”

두더지는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받아주니 어쩌니 해서 꽤 인원이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너무 조촐했다. 민재는 이 남자를 따라가 보기로 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창밖에는 논과 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버스는 터미널이라기에 조금 민망한 크기의 공간에 주차되었다.

두더지는 민재를 이끌고 시골 마을을 걷기 시작했다. 표지판도 없는데 죄다 똑같이 생긴 논과 밭이나 비슷비슷해 보이는 집들을 지나쳐 걷는 두더지의 모습은 왠지 정말 땅굴 속을 헤매고 다니는 두더지처럼 느껴졌다.

“이쪽이야.”

두더지는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든 폐가가 한 채 보였다. 민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저기라고? 너희 저기서 지내?”

“뭐, 비슷해.”

두더지는 폐가로 앞장서 들어갔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꽤 어두웠으며 의자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민재는 두더지라는 남자가 자신을 데려온 곳이 실제로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자는 거야?”

민재가 물었다. 그러자 두더지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말로 바로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잖아. 곧 악어가 널 보러 올 거야.”

그를 보러 온다고 하면 아마도 악어라는 자가 현재 이 도망자 집단에서 우두머리 격일 터였다.

민재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바깥의 문이 아직 닫히지 않은 것에 비해 현재 이 공간이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환시 쪽인가? 보기 드문 능력을 갖고 있네.”

민재가 말하자 어둠 안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 역시 마스크를 착용한 채였다. 바싹 깎은 짧은 머리를 한 남자는 덩치가 큰 편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민재의 옆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어? 눈썰미가 좋네.”

“헛것을 좀 많이 보고 산 편이라.”

민재가 대충 악어의 말을 받아치며 그를 살폈다. 지금 걸어 나온 사람도 환각인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악어가 알아서 답을 줬다.

“공간을 꾸며내는 능력이라 네 앞에 앉은 건 진짜야.”

꽤 친절한 처사였다. 민재는 악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악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 패도 좀 까는 게 어때?”

민재는 잠시 고민했다. 악어 쪽에서는 능력을 공개했지만 민재는 능력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은 너무 특이해서 정체를 들킬 확률이 높았다.

“어떤 정보를 원해?”

민재가 물었다. 그러자 악어는 민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센터 내부에 대해 좀 알아?”

“구조 말하는 거야?”

악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 원하는 거야?”

“센터에 들어갈 거니까.”

센터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면서 센터로 들어간다니. 새로운 발상이었다. 민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악어를 바라보았다.

“너도 알 거 아니야. 센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다 까발릴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민재는 주위를 다시 살폈다. 좀 전까지 보이던 두더지가 사라져 있었다.

“어떤 걸 까발릴 건데? 센터엔 생각보다 뭐가 많아.”

“그래? 우선 내가 아는 건 센터에서 인체실험을 했었다는 것과 여럿의 죽음을 묵과했다는 거야.”

인체실험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민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민재가 악어를 노려보자 악어의 발밑에서 벽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 뭐야?”

민재가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지금 네 태도는 센터의 개처럼 보인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악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꽤 위협적인 말투였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자와 싸우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곳이 알고 보면 절벽 위일 수도 있었고, 함정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센터의 개라니. 민재의 과거에 걸맞는 호칭이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난 센터 내부를 잘 알아. 정보를 줄 수도 있어. 근데 내부에 있는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민재는 두 손을 슬쩍 들어 올려 공격 의도가 없음을 표했다.

“센터 건물들 전부와 층수별로 뭐가 있는지도 알아. 뭘 하려는 건지 자세히 알려주면 필요한 루트도 그려 줄게.”

악어는 잠시 의중을 살피는 듯 가만히 민재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당장 몸싸움을 벌일 이유는 사라진 셈이었다. 그 때 악어의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우지 마….”

“들어가 있으랬지.”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악어라는 자가 환시로 민재의 시야에서 감춰둔 모양이었다.

“그럼 내 쓸모가 증명된 거야?”

민재가 물었다. 악어는 그런 민재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민재는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이는 곳 마당에 서 있었다.

현관이 열리고 두더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와. 별 건 없지만.”

두더지가 말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조금 전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토끼예요.”

토끼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민재는 가볍게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두더지가 민재를 소개해 줬다.

“얜 족제비야.”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네요!”

토끼는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큽. 곧바로 두더지는 혼자 웃음을 참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악어 또한 묘하게 비뚤어진 입술을 한 채 민재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민재는 적당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딱 봐도 토끼라는 아이가 이곳에서 가장 보호받는 존재인 것이 보였다. 더군다나 민재에게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와 주었으니 그도 나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요.”

토끼는 역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편인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민재가 웃어 보이자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악어가 굳은 얼굴로 민재의 어깨를 잡아채어 토끼의 반대방향으로 밀었다.

“다행이 빈방이 있으니까 저기서 지내.”

민재는 구석진 방 안으로 안내되었다. 거의 밀리다시피 해서 들어간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곧이어 두더지가 이불과 베개를 가져다가 민재에게 건네주었다.

“생필품 있어? 칫솔 이런 거.”

민재가 고개를 젓자 두더지가 칫솔과 치약과 비누를 건네주었다.

“나중에 갚아.”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재는 대강 고개를 끄덕인 뒤 이부자리를 내려놓았다.

잠시 혼자가 된 민재는 센터에 대해 생각했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센터의 내부를 파헤쳐 공개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근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결론지어지지 않는 의문과 문제들이 민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자고 일어났음에도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민재의 눈이 슬쩍 감기고 있을 때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야. 밥 먹어.”

두더지였다. 민재는 잠시 눈을 끔벅이다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자 앉은뱅이 상 위에 반찬 몇 가지와 밥그릇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여분의 수저가 없었으므로 민재는 두더지의 숟가락만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생필품 사와야겠다. 내일.”

악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토끼가 민재를 힐긋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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