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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터미널에서 시간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은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꽤 낡은 모텔에서 숙박을 해결했다. 그러다 다른 도시로 가 볼까 싶어 향한 곳이었다.
시간표에는 도착지의 여러 지명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민재에게는 꽤 낯선 기분이었다.
민재는 터미널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출발 게이트 별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서 있는지도 확인했다.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적게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사람이 적은 곳으로 향하면 정체를 들킬 일이 적으려나? 아니면 사람이 많은 곳이 숨기에 더 적합하려나.
“그 새끼가 이 근방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고민하는 민재의 등 뒤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얼마 전 들었던 말과 겹치는 맥락이 있었다. 민재는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보통은 여기 다음에는 붙어 있는 지역부터 건드리니까 옮기는 게 좋겠어.”
그 말 뒤로는 그래 라든지 알겠다든지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맥락상 지금 남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센터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이 근방을 이 잡듯이 뒤지는 사람은 박지환일 터였다.
“예상지역을 꼽아둔 게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꽤 확신에 차 있었다.
민재는 티가 나지 않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는 아래위로 검정색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쓴 탓에 민재와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한 말로 추측해 보면 남자는 혼자 움직이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새희망복지회와 연관이 있을까?
민재가 고민하는 사이 통화를 끝낸 남자가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조금 다급해진 민재는 남자 쪽으로 급히 다가가 몸을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놀란 남자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민재는 빠르게 남자의 등 뒤를 받쳤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민재는 일부러 조금 가는 목소리를 냈다. 남자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남자를 쉽게 세워 주는 척하면서 남자의 손목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리고 가이딩을 느꼈다.
남자와 민재는 둘 다 마주 보고 선 채로 굳어버렸다. 도망자라 당연히 에스퍼라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러웠다.
순식간에 정체를 서로에게 들켜버린 둘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마주 서 있었다.
민재는 잠시 고민했다. 둘은 서로 모른 척하고 각자 갈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자신을 그냥 보내려고 할까?
아니면 어떻게든 남자 쪽에 편승하는 방법도 있었다. 남자는 지환이나, 센터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쫓고 있는 듯했다. 도망칠 때는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 이 남자는 물론이고 함께하는 자들이 수완이 그렇게 나쁘진 않을 수도 있었다.
민재는 고민하다가 남자에게 자신의 손목을 슬쩍 내밀었다. 자신의 가이딩 수치를 나타내는 칩이 삽입된 것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정보가 좀 있을 것 같은데.”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남자는 뒤로 몸을 살짝 물리며 민재를 노려보았다.
“…숨는 걸 도와주면 정보를 줄게.”
민재는 미끼를 던졌다. 남자가 높은 확률로 미끼를 물고 말 것이라고 민재는 짐작했다. 이대로 싸우게 되면 가이드라는 게 노출이 되고, 민재를 그냥 놓아주면 위험성이 오히려 커지게 될 터였다. 센터에 고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민재의 행색을 살피는 듯 잠시 민재를 훑어보았다.
“…그래.”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들려왔다. 민재가 의아한 듯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개찰구 쪽으로 걸었다.
“근데 우리 쪽에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서.”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민재는 천천히 남자의 곁에 따라붙었다.
“…센터에서 도망쳤어?”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남자의 물음에 민재는 고개를 으쓱여 보였다.
“네가 센터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민재의 말에 남자는 수긍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최근 센터의 이미지가 얼마나 악화되어 있는지 좀 더 확인하고 싶어 질문을 더 하려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그만두었다.
“돈 있어?”
“…조금.”
민재는 대답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버스비는 네가 내.”
남자가 짚은 지역은 센터에서 버스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이었다. 거기 근방에 센터 지부 중 하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아직 남아 있나?
민재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보았으나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둘은 버스에 올라타 제일 뒤쪽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따로 다니다가 누가 잡혀갈지 모르니까 서로 이름도 안 밝히고, 얼굴도 다 공개하지는 않아도 돼. 근데 만약 배신자가 발생해서 같이 센터에서 만나면 배신자를 죽이는 조건이지.”
꽤 살벌하군. 민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름과 신원을 명확히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난 두더지. 넌….”
남자가 자신의 소개를 하는 듯하더니 뜸을 들였다. 지금 내 닉네임을 정하라는 건가? 민재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동물 이름에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족제비 해라.”
족제비? 민재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
조그마한 벌레가 혈관 속을 기어 다니며 이빨을 박아 넣고 찢어발기는 느낌. 그것이 몸 구석구석 뻗어나가면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지환은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었다.
뜨겁고, 쓰라린 고통이 한번 덮치고 나면 순식간에 시린 얼음물에 몸이 처박힌다. 차가움이 극에 다다르면 뜨거운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지환은 이것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꿈속의 거인은 두꺼운 손으로 지환의 얼굴을 설원에 처박았다 끌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지환은 익숙한 듯이 그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단단한 뼈가 동강이 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숨이 막혔다. 시야가 좁아지는 와중에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괴물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넌 아무것도 몰라.”
괴물이 말했다. 지환은 그 괴물의 목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러자 괴물의 목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괴물은 마지막 숨을 내뱉듯이 한참을 검은 기체를 토했다.
그와 동시에 지환은 자신의 몸에서도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형체도 없는 것이 자꾸만 사라져서 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지환은 타들어가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민재를 떠올렸다. 이것이 어리고 유약한 그가 매일같이 겪어야 했던 감각이었단 것을 떠올리면 명치 아래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었다.
지환이 고통 속에서 내내 그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이 악몽의 끝에는 언제나 우민재가 등장했다.
저벅저벅 차분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눈을 뜨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그는 조용히 걸어와 지환을 깨워놓고 사라졌다.
“…운이 나쁘네.”
계속 살라는 것 같았다. 고통받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벌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민재의 의지인지, 그 스스로의 의지인지 지환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매번 민재가 왔기 때문에 지환은 얌전히 주사를 맞았다. 고통도 참았다.
이번에도 지환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차분한 민재의 목소리를 기대했던 지환에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드디어 성공이야!”
환희에 찬 목소리는 끝이 갈라졌다. 얄팍한 음성에 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조 박사를 발견했다. 시야가 살짝 뿌얬으나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알 것 같았다.
“됐다고!!! 됐어!!!”
조 박사는 미친놈처럼 허공을 향해 만세를 해 보였다.
“…치워.”
조 박사는 힙겹게 입을 연 지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는 눈앞에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이거 몇 개? 어때? 기분이 어때? 멀쩡해? 막 개운해? 말해줘 봐봐.”
다다다 질문을 쏟아내는 조 박사는 실실 쪼개기까지 했다.
시야가 점차 더 또렷해지자 지환은 자신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정확히 생각해냈다. 소독약 냄새와 서늘한 온도가 느껴지는 공간.
지환은 자신의 팔목을 옥죄고 있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가 가만히 눈을 깜박이고 있자 조 박사는 다시 한번 모니터를 확인했다.
“역작이야…. 이대로면 둘 다 S야. 내가 이런 걸 만들다니…!”
조 박사는 잔뜩 신이 나 하이톤으로 올라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지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투둑.
그와 동시에 지환은 묶여 있던 팔을 그대로 끌어 올렸다. 팔을 묶고 있던 가죽끈이 단숨에 끊겨 나갔다. 지환은 한 손으로 조 박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켁!”
조 박사가 목 졸린 신음을 내뱉었다. 갑작스레 숨통이 틀어 잡히자 목 아래쪽이 벌떡이며 고통을 표하고 있었다. 지환은 그 지점에 더 압력을 가했다.
“…선배 앞에서도 그렇게 쪼갰어?”
“컥!”
“기분이 어떠냐고? 궁금해?”
조 박사는 손을 들어 올려 지환의 팔을 내리쳤다. 지환은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흐억. 헉. 컥. 조 박사는 숨을 몰아쉬며 침을 질질 흘려댔다.
“우… 우민재는… 실… 실패작이니까….”
조 박사는 겨우겨우 말을 내뱉었다. 실패작인 그와 지환이 다르다는 이야길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미친 새끼는 원체 본인의 실험 말고는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생각을 할 줄 아는 새끼라면 이렇게 지환을 돌게 만들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환은 그대로 조 박사의 멱을 잡은 손을 빙 돌렸다. 지환과 조 박사의 위치가 바뀌었다. 지환이 결박되어 있던 의자에 처박히듯 놓인 조 박사가 다시 한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넌 궁금한 게 참 많잖아. 내가 대답하기보다 스스로 체험해 보는 건 어때?”
지환은 한 손으로 조 박사의 몸을 의자에 고정한 채 옆의 트레이에 있는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그의 목으로 주사기를 가져다 대자 억눌린 목소리로 조 박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걸 맞으면 나 죽을지도 몰라! 죽는다고!”
하. 지환은 조소했다.
“사람에게 주사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걸 처넣었다고?”
“너, 너넨 사람이 아니잖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외침이었다. 지환의 입매가 비틀렸다.
“정말? 궁금한데. 실험해볼까?”
지환이 다시 주사기를 조 박사의 목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바늘 끝이 그의 피부에 닿자 조 박사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늘이 박혀도 몰라.”
“우…민재가! 나를 왜 살려놨겠어!”
이번에는 조 박사가 맥락을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지환의 손에 힘이 살짝 풀리자 조 박사는 빠르게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에스퍼들한테 필요한 약품들, 물품들 중에 내 손 안 거친 게 없어! 민재가 겪던 후유증 관련 연구도 내가 봐 주고….”
퍽!
지환이 주사기를 의자에 꽂았다. 인조가죽이 찢어져서 안쪽의 스펀지와 솜이 삐져나왔다. 조 박사는 눈을 부릅뜬 채로 덜덜 떨었다.
그걸 빌미로 끝까지 이용해 먹으면서 정작 후유증을 다 치료해주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럼 그가 자유로워질 테니까.
지금의 그는 알았다. 센터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그 안에서 우민재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이 너무 늦었더라도. 지환은 이를 갈았다.
“…그 개발이 좀 더뎠던 모양인데, 그럼 내가 딱 한 달을 줄게.”
“…어?”
“한 달 안에 후유증을 없앨 방법을 강구해내. 안 그러면 네 쓸모 가치를 내가 다시 논해 봐야겠으니까.”
“나는 너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든…!”
지환이 주먹으로 다시 의자를 내리쳤다. 조 박사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의자의 등받이가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떨어졌다. 의자 아래쪽 철구조물이 쉽게 휘어져 버린 것을 발견한 조 박사는 하던 말을 잃고 뒤쪽으로 눈을 힐끔거렸다.
“…그렇지만 넌 딱히 후유증 약이 필요하지도 않잖아… 너 설마….”
닥치면 좋을 텐데 조 박사는 제가 살길이 마련된 것 같다고 느끼자마자 다시 나불거렸다.
“아직도 민재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이름.”
지환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조 박사는 다시 아래쪽으로 눈을 깔았다.
“부르지 마.”
“…알겠어.”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조 박사 역시 재빠르게 의자 위에서 몸을 일으켜 지환과의 거리를 벌렸다.
지환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실험실 밖으로 향했다.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 이미 익숙한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