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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09)화 (110/181)

109

민재는 빠르게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딱히 커다란 움직임이 느껴지진 않았다.

민재는 다시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태연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공간을 없애면서 난 소리였다.

“이런 소리 정도는 흔한 일이라. 별로 신경 쓰는 사람 없을 거예요.”

‘이런 굉음이 흔하다고?’

민재는 태현이 말한 것이 이 구역의 문제인지 지금 현 상황의 문제인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태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직접 봐요. 그럼 알게 될 거예요.”

태현은 꽤나 의뭉스러운 말을 했다. 곧이어 그는 민재에게 낡고 꼬질꼬질한 핸드폰 하나를 건넸다. 아주 오래전에 썼을 법한 슬라이드형 폰이었다.

혹시 지금 준 약이 다 떨어지면 단축번호 1번으로 전화를 걸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전화는 딱 한 번만 걸고 정보를 듣고 나면 그 즉시 핸드폰을 파기하라고 했다.

‘추적을 피하려는 거겠지.’

민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로 돌아가든, 그러지 않든 무엇을 하든 본인 마음이지만 내가 기별할 때까지 반드시 살아 있으세요.”

신태현은 ‘살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살아 있기만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지시였다.

애초에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그를 깨웠으면 되지 않나 싶었으나 그와 같이 있던 공간을 없애는 걸 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미안해요.”

태현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을 것 같았고, 결국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았어요. 우습게도 우민재 당신이 내가 했던 유일한 도박이자 마지막까지 남겨둔 보루였어요.”

만만한 호구 새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히어로니까요.”

조금 전 했던 말이 나을 정도로 끔찍한 말까지 덧붙였다. 민재는 허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히어로라는 단어는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히어로는 센터에서 붙인 호칭일 뿐이었다. 그는 정의감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태현은 민재를 히어로라고 규정했다. 그는 그 순간 우습게도 지환을 떠올렸다. 민재가 아는 사람 중 그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민재는 태현과 눈을 맞추었다. 태현은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대만 때리자.”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한 민재의 말에 태현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망설이지 않고, 있는 힘껏 힘을 실어 태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우드득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태현은 붉어진 뺨을 손으로 감싸고 민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파서 놀란 건 아닌 것 같았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민재의 손가락이 태현의 광대에 부딪혀 부러진 것이다. 민재의 손에서 흰 빛이 일었다.

“…이런 게 히어로는 무슨.”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민재는 태현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넌 네가 가진 중요한 약점을 나한테 깠어.”

“…알아요.”

“네가 내게 준 정보 중 하나라도 허튼 게 있거나, 내가 필요로 할 때 네가 연락이 되지 않으면 이서연이 가장 먼저 위험해질 거야.”

민재는 높낮이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태현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이 공장지대를 얼른 벗어나는 것이 좋을 거라는 마지막 조언을 하나 더 남기고는 빠르게 다른 곳으로 떠났다. 민재도 모자를 눌러쓰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민재는 차들이 많이 빠지는 쪽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공장지대와는 분위기가 다른 도시의 경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민재의 눈앞에 무너진 건물이 보였다. 건물 복구 작업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지 뼈대가 드러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방치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테러의 발생 속도가 더 빨라진 건가? 민재는 상황을 추측해 보려고 했다.

‘직접 보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센터는 무얼 하고 있기에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단 말인가. 민재는 아연실색했다. 원래라면 금방 복구되었어야 할 건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는 건 금방금방 복구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철근이 튀어나오고 구석구석 깨진 벽을 가진 무너진 건물을 마주하는 건물에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밥을 먹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불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민재의 배가 순간 크게 요동쳤다.

살아 있는 데에 필요한 영양소는 최소한으로 공급해주었다고 태현이 말하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민재는 일 년간 식사를 하지 못한 셈이었다.

민재는 식당 쪽으로 다가가며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검정 점퍼에 조금 헐렁한 검은 청바지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먹는 메뉴를 보아하니 주로 백반이나 국밥 종류를 판매하는 모양이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민재와 비슷하게 눈에 띄지 않는 복장이었다.

민재는 작게 숨을 들이쉰 다음 식당의 문을 열었다.

***

민재는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것으로 보이는 백반을 시켰다.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민재를 흘긋 보더니 그릇에 밑반찬을 담아 내왔다.

“엄마야.”

반찬 그릇을 내려놓던 사장은 순간 탄식을 내뱉었다. 민재는 턱 쪽으로 내리고 있던 마스크를 빠르게 올렸다. 그러고는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거나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왜 이리 말랐대.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사장의 시선은 아래쪽으로 향해 있었다. 반찬 그릇을 잡고 앞쪽으로 끌어당기던 민재의 손을 본 것이었다. 힐을 사용해 살짝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뼈가 도드라져 보이긴 했다.

민재는 옷소매를 잡아 내리며 손을 살짝 가렸다.

“큼, 모,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에구… 무슨 일이래….”

부러 헛기침을 내뱉고 살짝 새된 목소리를 뱉자 사장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하긴. 요새 살기가 쉬운 사람이 있나. 그래도 젊은 사람이….”

몇 마디 더 내뱉은 사장은 곧이어 제육볶음과 된장찌개를 내왔다. 그리고 냉면이나 칼국수를 먹을 때 사용할 법한 면기에 고봉밥을 담아 가져왔다. 민재는 무언가 잘못된 건가 싶어 눈을 끔벅였다.

“많이 들어요~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 힘을 내지.”

엄청난 밥 한 공기를 민재의 앞에 내려놓은 사장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나는!”

“그 아저씨는 좀 작작 드셔! 맨날 반찬 세 번씩 리필해 먹지 말고.”

옆 테이블의 남성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불평을 하자 사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타박을 했다. 민재는 슬쩍 눈치를 보다 자신의 앞 접시에 밥을 덜어 옆 테이블 쪽으로 내밀었다.

“…다 못 먹을 것 같아서요.”

“어유. 젊은 청년이 예의가 바르네.”

남자는 거절하지도 않고 넙죽 접시를 받아 들었다. 밥을 덜었다고 해도 밥그릇 두 공기는 될 것 같았다.

민재는 천천히 밥을 떠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달큰한 쌀알이 느껴졌다. 민재는 좀 전에 햇볕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밥을 씹는 것이 묘하게 낯설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만 같았다.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구역감이 일었다.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속이 뒤틀리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검은 후드로 배 쪽을 가린 채 약간의 힐을 사용했다. 그러자 구역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민재는 다시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세상이 변했다. 어떻게 변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간 평화가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민재가 나물을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고 있을 때였다. 민재의 좌측 벽 위에 달린 작은 스크린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테러 구조 현장에서 히어로 센터의 구조 방식에 대한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습니다….]

“요새 맨날 천날 저 소리네.”

어느새 다시 테이블 쪽으로 나와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사장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구조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민재는 스크린을 힐끔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뉴스에서 나오는 말들을 다 믿어서 좋을 건 없었으나 현 상황에서는 여론을 확인하기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염병. 싸가지 없는 새끼들. 구해줘도 지랄이여.”

옆 테이블의 남자는 도리어 뉴스의 멘트를 부정했다. 구조하는 과정에서 다소 거칠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때 사장이 덧붙인 말에 민재는 찌개를 뜨던 손을 멈추었다.

“왜. 그 박지환이라는 팀장은 사람도 던지고 때리고, 그런다면서.”

박지환이 팀장? 사람을 던진다고? 믿기지 않는 정보들이 한꺼번에 귀를 파고들었다.

민재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듣고 있지 않는 척 숟가락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던져서 살면 그만이지.”

정작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남자는 자신의 밥그릇을 비우고는 민재가 추가로 준 밥을 퍼먹고 있었다.

“안 그래요?”

남자가 민재에게 동의를 구했다. 민재는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이었다.

“꼭 보면 인간들은 구해주면은 왜 이리 잡아당기냐 지랄 지랄을 하고, 도둑맞은 물건 찾아다 주면 왜 더 빨리 안 갖고 왔냐, 물건이 다 없냐 지랄. 집에 데려다준다 하면 니가 뭐냐 지랄을….”

“어휴! 시끄러워요, 아저씨! 밥이나 조용히 먹고 나가.”

옆 테이블의 남자는 돌연 밥풀을 튀기며 기나긴 투정을 시작했고, 그런 그가 익숙한지 사장은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아저씨가 왕년에 경찰을 하다가 잘렸어. 그래서 그런가 매번 저렇게 헛소리만 주저리주저리 해. 봉사정신이 없으니까 잘리지!”

“참나 저 아줌마가!”

사장은 민재에게 설명을 하는 척을 하면서 남자를 타박했다. 민재는 둘의 의미 없는 다툼을 흘려들으며 밥을 욱여넣었다. 괜히 이런저런 반응을 해서 대화가 길어지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민재인가 그 사람이 실장일 때는 좀 나았던 것 같은데… 분위기가 갈수록 영 흉흉해져. 센터 직원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사장이 지나가듯 민재의 이름을 읊었다.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딱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죽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그 뒤로 센터도 욕 많이 처먹고 허구한 날….”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식당 맞은편에 위치한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는 가만히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다가 몸을 일으켰다.

“더 안 먹어요?”

사장은 반 정도 남은 민재의 밥그릇을 보며 물었다.

“너무… 많아서요.”

민재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사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주머니를 뒤져 현금을 꺼내 밥값을 계산했다.

이 돈 또한 태현이 쥐여 준 것의 일부였다. 태현은 모르는 사람의 명의로 만들어진 대포통장과 연결된 체크카드도 함께 건네줬다. 못해도 3개월은 넉넉할 것이고 그 후로는 건네준 폰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정말로 민재가 ‘살아 있는’ 것만이 임무라는 듯이.

우선 하나의 결론이 내려졌다. 공식적으로 우민재는 ‘죽었다.’ 모두가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민재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비로소 그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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