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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우석이 들어갔다는 말에 따라 들어갔던 그 건물에서 민재는 태현을 마주쳤고, 의아함을 느꼈다. 예상했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넌 여기에 왜 들어왔어?”
민재가 묻자 태현은 아무런 말 없이 민재를 마주 보았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민재는 태현이 자신을 부른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없어요.”
그것이 태현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이었다. 눈앞에 모래 알갱이 같은 것이 흩뿌려졌고, 민재는 정신을 잃었다.
민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우석이는-”
“살았어요. 그는 내가 내보냈어요.”
태현은 그것을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대답해줬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지환을 떠올렸다. 그라면 자신을 따라 건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곧바로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박지환이랑 다른….”
“역시 살아 있어요.”
민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현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거래를 제안하면서 굳이 다른 사람들의 생사여부를 속일 필요는 없을 거라 판단했다.
나가게 된다면 알게 될 것들이니까.
민재는 건물 안에서와 비슷한 무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건물에서 했어야 할 질문을 했다. 민재도 모르는 사이 일 년이나 늦어버린 질문이었다.
“네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어?”
“네. 정확히는 잭인 척 당신에게 보냈죠.”
잭?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민재는 곧 그것이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거라 짐작했던 자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가 원하는 게 뭐지?”
민재의 질문에 태현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당신이 죽길 바라고 있죠. 정확히는 본인 손으로 죽이고 싶어 했죠.”
“그럼 넌 그자의 밑에서 일해?”
하하. 민재의 질문과 동시에 태현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의 한쪽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태현이 다시 민재를 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그가 내 밑에서 일하죠.”
민재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일 년간 죽이지 않고 보존한 이 캡슐을 개발한 자는 센터에서 나간 자이고, 그가 신태현의 밑에 있다. 그리고 신태현은 새희망복지회의 사람이다. 신태현이 과연 누구를 위해 일할까. 그걸 생각해보면 답이 꽤 간단하게 나왔다.
조금 전 깨자마자 했던 가족 이야기가 그 맥락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신태현은 새희망복지회를,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길 원하는 걸까.
“…그럼 넌 뭘 원해?”
민재가 물었다.
“전 우민재 에스퍼가 살아 있기 바랐죠. 그러니까 당신이 여기 살아 있는 거고요.”
태현은 애매한 대답을 한 뒤 허리를 숙여 민재의 손목을 잡았다. 민재가 손을 빼려고 하자 태현은 잠시만요. 하는 말을 덧붙이더니 민재의 손목을 돌려 그에게 보여줬다.
가이딩 수치는 초록으로 크게 양호한 상태였다.
태현은 계속해서 민재에게 자신이 그를 온전히 살려두려고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협력관계를 원하는 건가?’
현재 민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앞쪽에는 깨지고 전원이 나간 여러 개의 모니터만이 있었고 그 외에는 딱히 가구라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모니터로 바깥 상황을 몰래 살피고 있었을 테지만, 여태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몸을 사려야 했다.
“…왜?”
왜 자신이 살기를 바랐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신태현이 정이나 연민으로 그를 살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이렇게 햇빛도 들지 않는 우중충한 창고 같은 곳에 정말로 숨만 붙어 있게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했잖아요. 거래를 해요.”
“그러니까. 무슨 거래.”
태현은 잠시 뒤로 물러나 꺼진 모니터 아래쪽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비닐뭉치 같은 것을 꺼내 민재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민재가 물었다. 부피가 조그만 알약들이 가득 포장되어 있는 봉투였다. 알약의 색이 푸른빛이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 있는 알약 중 하나 꺼내서 나한테 줘 봐요.”
민재는 잠시 태현을 바라보다 비닐봉투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부러 휘적거려 알약을 섞은 다음 하나를 집었다.
태현은 민재가 건넨 알약을 망설이지 않고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꿀꺽 삼키며 민재에게 자신의 손목을 보여 주었다.
노란 경고등이 깜박이던 태현의 손목은 잠시 후, 초록의 궤도에 들어섰다.
이건 가이딩 알약이다. 그것도 효과가 꽤 괜찮아 보이는 것이었다. 민재는 봉투 안을 살펴보았다. 언뜻 보아도 백 정은 되는 듯했다.
“…부작용은?”
“당신을 재우고 내내 이걸로 버텼는데 아직은 딱히 없네요.”
‘내가 자는 동안 내내? 그럼 얘도 센터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건가?’
민재는 비닐봉투에 구멍이 뚫린 곳은 없는지 살핀 다음 입구를 묶어 봉했다.
“이것보다 더 많이 줄 수도 있어요. 곳곳에 꽤 많이 숨겨 놓았는데 장소도 주기적으로 알려줄게요. 당신이 원하던 대로 센터의 정보망을 피해서 평범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쓸 수 있는 양일걸요.”
“…일단 원하는 걸 말해.”
태현은 먼저 자신이 줄 수 있는 패를 깠다. 민재에게 꽤나 달콤한,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에스퍼가 아닌 채로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태현이 꽤 간절하다는 것이고, 어려운 부탁일 확률이 높았다.
민재는 긴장되는 기색을 숨기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얼굴 근육이 뻣뻣한 것이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됐다.
“이서연의 안전 확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민재는 뒷말을 기다렸으나 태현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게 끝이야?”
“센터는 곧 끝이 날 거예요.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전하게 누나를 살려놔요. 그러기 위해서 당신을 살려둔 거니까.”
누구를 죽이라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그것 때문에 민재를 일 년간 잠재워 두었다는 말은 유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민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내가 싫다면?”
“그럼 어쩔 건데요? 당신은 공식적으로 죽은 몸이고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여기서 죽여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태현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민재는 눈치챘다. 제 누나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을 ‘거래’로 내걸 정도로 커다란 일이 센터에 일어난다는 뜻일까.
그러나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민재는 순간 목구멍 저 아래서부터 무언가 왈칵 솟구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무너진 건물로 들어설 때 이미 그는 죽음을 예감했고, 각오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살아 있다. 그리고 일 년이라는 시간을 잃었다고 했다.
무언가를 위해서 휘둘리는 삶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의 몸에 힐을 사용했다.
그러자 상태가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방금까지 느껴지던 몸의 삐걱거림은 사라진 진 것 같았다.
민재는 그대로 손을 뻗어 태현의 목을 틀어쥐고는 밀어붙였다. 태현은 생각보다 쉽게 뒤로 밀려났다. 벽에 등을 부딪친 태현이 컥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민재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태현의 것과 마찬가지로 민재의 호흡도 거칠어졌다.
“내가 널 죽여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죠.”
태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목이 죄인 목소리였다.
“나랑 누나만 위험한 게 아니에요. 센터의 모두가 죽을 겁니다.”
태현을 노려보던 민재는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태현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태현의 말이 진짜일지 거짓일지 생각해 보았다.
물론 지금 단지 민재에게 혼란을 줘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를 미끼로 이용해 센터를 움직이려는 계략일지도 모르고.
가능성들을 가늠해 보던 민재는 태현이 한 말들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민재가 물었다.
“내가 말하면 다 믿을 수 있겠어요?”
태현이 되물었다.
“아니.”
민재의 대답은 단호했다.
***
민재가 믿을 수 없다고 했음에도 태현은 새희망복지회, 정확히는 자신의 아버지가 일 년간 벌인 일들과 앞으로 센터에 어떤 짓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에스퍼’를 없앨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신태현은 그것을 막아낼 방도를 찾음과 동시에 계획 시행의 날을 추후에 알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민재의 협조를 구했다.
민재는 코웃음을 치고 그것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혹은 가이딩 약을 받은 그 즉시 태현을 죽이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재는 태현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자신이 직접 보기 전에는 태현의 말을 온전히 믿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민재는 인적이 드문 대로변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햇빛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분명 기억대로라면 민재는 잠시 자다 깨서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인데도 낯섦이 느껴졌다.
민재가 있었던 곳은 공장지대였다. 태현이 옷과 모자 등을 준비해 주었기 때문에 민재는 꽤 평범한 꼴로 나갈 수 있었다.
지하 공간을 빠져나온 태현은 민재를 골목으로 안내하면서 바로 옆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에 잭이 살아요.”
옆집 친구를 소개해주듯이 여상한 말투였다. 민재는 순간적으로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그런 걸 왜 그렇게 쉽게 말해주는데?”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요.”
태현은 고개를 으쓱여 보였다. 같은 편은 무슨. 민재는 그런 태현을 비웃었다. 그러나 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지금 나밖에 믿을 수 없잖아요. 우선 좀 경계하면서 지나갑시다.”
민재는 태현을 따라 조심히 걸었다. 태현은 부러 방향을 여러 번 꺾으며 원래 있었던 지점에서 멀어졌다. 어느 정도 걷다가 멈춘 태현이 민재를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헤어져요.”
태현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민재의 저 뒤편에서 묵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발아래 쪽에서 옅은 지진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