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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07)화 (108/181)

107

지환은 제1팀을 이끌고 도착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회사가 많고, 유동인구 또한 많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30층짜리 건물이었다. 외벽이 모두 안이 보이지 않은 유리로 되어 있어 층 구별이 되지 않는 구조였다.

지환은 바깥의 풍경이 반사되는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가늠해 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러고는 점프슈트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수통을 꺼내 내용물을 들이켰다.

지환의 대각선 뒤쪽에 서 있던 은정이 빠르게 그 수통을 낚아챘다. 그리고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냄새를 맡아 보았다.

“줘.”

지환이 은정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재가 자주 들고 다니던 그것이었다. 어떤 날은 민재가 늘 그러했듯 보드카를 넣어 다녔고, 어떤 날은 가이딩 물약을 넣어 다녔다.

보드카를 넣어온 날은 지환이 유독 날뛰었기 때문에 같이 출동할 때면 은정은 유독 지환의 상태를 예민하게 살폈다. 다행히도 오늘은 후자였다.

은정은 지환의 손에 수통을 올려 주었다. 지환은 수통을 잠그고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가이딩 좀 받으러 다니라니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은정이 타박했다.

“사람 다 빠진 거 맞아?”

지환은 은정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은정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근데 누나. 건물에 폭탄이 있다는 신고가 그냥 들어온 게 맞아?”

지환이 물었다. 은정은 지환의 눈을 살짝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은정을 보는 지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신고한 시간이 너무 빨랐다. 딱히 협박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는 좋은 것이었으니 따질 만한 일도 아니었다.

지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차라리 생각을 비우는 게 나았다.

“야.”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대명사를 지칭하자 긴장한 듯 살짝 어깨를 움츠린 지훈이 지환의 뒤쪽으로 다가섰다.

“네. 팀장님.”

“넌 마음의 준비 하고 있어.”

“…또 뭐 시킬 건데요…?”

지훈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눈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대답을 하지 않고.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건물로 들어서자 바깥의 소리가 차단됐다.

지환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비상구 계단을 이용했다. 14층으로 향하는 그의 발소리가 층계로 울려 퍼졌다.

복도에 들어선 그는 바로 소화전 앞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소화기 뒤쪽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삐-삐-

아주 옅은 경고음이 일정 간격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지환은 눈앞의 폭탄을 익숙한 듯 무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 복잡하게 제작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지환은 주머니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 폭탄을 고정하고 있는 테이프를 끊어냈다.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 이렇게 애매한 시간이 남아 있으면 일반 폭탄 해체반에게 내밀기가 어려웠다.

지환은 습관처럼 민재를 생각했다. 그는 평소에도 숨을 쉬듯이 민재를 떠올렸지만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더 그랬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고는 어떤 날에는 민재가 했을 법한 행동을 했고, 어떤 날은 그 반대로 행동했다.

지환은 아주 오래전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우민재가 사용했던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꽤 군기가 들어간 목소리였다. 지환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너 좀 올라와.”

[네! 은정 선배님은….]

“너 오라고.”

지환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마자 지환의 폰이 진동했다. 은정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왜.”

[너 뭐하려고?]

“뭐하긴 뭐해. 사람도 건물도 안 다치게 폭탄 없애 달라며.”

[아니, 그러니까… 상황파악하고 해체 반….]

“시간 안에 해체 못 해.”

수화기 너머로 은정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너 저번처럼 미친 짓 하다가 다치면….”

“내가 알아서 할게.”

지환은 은정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민재가 사라진 후 두세 달간의 지환을 옆에서 지켜봐온 은정은 지환이 사고를 칠까 봐 늘 안절부절못했다.

그때의 지환은 죽고 싶었다. 일부러 계속해서 사지로 들어가는 지환을 잡은 말은 하나였다.

“정신 차려. 난 너 죽게 안 놔둬. 민재 선배가 지키려고 했던 건 내가 다 지킬 거야.”

마치 지환을 살리려고, 지키려고 했다는 듯한 의미를 품은 말. 그건 센터장이 지환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말이었다. 그 말이 지환을 무너뜨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민재가 건물에 들어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우석을 탓할 수도 없게 되었다.

“팀장님.”

상념에 빠진 지환을 지훈이 불렀다.

지환은 폭탄을 집어 들고는 지훈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그걸 왜 들어요…?”

“터뜨릴 거니까.”

침착한 지환의 말에 지훈의 눈이 커다래졌다.

“뭘 해요?”

지환이 별다른 말 없이 지훈 쪽으로 다가가자 지훈은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환은 그런 그를 휙 들어 올려 어깨 쪽에 둘러업었다.

“아. 팀장님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하시고….”

지훈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환은 그대로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건물 옥상 문은 잠겨 있었으나 지환은 문고리를 비틀어 그대로 뜯어내 버렸다.

폭탄이 터지기까지 삼 분가량 남은 것을 확인한 지환은 지훈에게 지시를 내렸다.

“파편 아래로 안 떨어지게 해라.”

“…네?”

지훈은 당황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환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근처 건물까지 지켜보다가 떨어지는 거 있으면 띄워서 여기 옥상에 모아두라고.”

그의 설명에도 지훈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계속 세세히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래서 선배도 늘 설명이 짧았었나. 지환은 또다시 민재를 떠올리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계속해서 고도를 올렸다. 그러다 보면 온몸이 시린 구간이 온다. 지환은 도시가 까마득하게 보이는 지점까지 올라가 타이머를 확인했다.

12, 11, 10-

짧아지는 숫자를 확인한 지환은 온 힘을 다해 위쪽으로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쾅-!

굉음과 함께 불꽃이 터졌다. 눈앞까지 불꽃이 번지는 것을 보면서 지환은 눈을 감았다. 민재 선배도 이전에 이와 같은 불꽃을 마주했을까? 의미 없는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등 뒤에서 셔터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

얼굴 없는 간호사가 들어왔다. 민재는 병원용 의자에 결박된 상태였다. 그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발버둥을 쳤다. 간호사는 민재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주사를 맞은 곳부터 불꽃이 번지는 것 같았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고통에 민재는 신음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괴물의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쇳소리와 저음이 섞인 소리였다.

어떤 날은 눈앞에서 끊임없이 불꽃놀이가 튀었다. 몸이 공중에 붕 떠올라 팍팍 터지는 거 같은 감각에 압도되었다.

다른 날은 하얀 가운을 입은 자들의 민재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내부를 관찰했다. 그리고 말했다.

“자, 이제 고쳐봐.”

몇 주,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 문득 민재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하얀 가운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꿈이구나.’

그에게 말을 건 자는 죽은 자였다. ‘그 날’의 사망자 명단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꿈인 것을 자각해도 깨어날 수가 없었다. 민재는 이미 겪었던 고통을 다시 한번 복기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다른 곳으로 던져졌다.

“악! 선배! 받아주세요!”

선배? 민재가 상황파악을 하는 순간 눈앞으로 컵이 날아들었다. 민재는 무심코 그것을 붙들었다. 그의 손에 차가운 블루베리스무디가 흘렀다.

나무들 사이로 날아온 지환이 멋쩍은 듯 웃었다.

“아, 오늘은 좀 특별한 자세로 옮겨보려다가…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지환은 한 손에 탑처럼 쌓아 올린 음료 잔들을 들고 있었다. 민재의 손에 들린 한 잔을 제외하고는 모두 흔들림 없이 일정했다.

곡예야 뭐야. 민재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이전에 지환과 시답지 않은 이야길 나누며 생각했던 숲속의 그 카페인 모양이었다. 별게 다 나온다.

민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꾸던 악몽보다는 나았다.

손님도 오지 않는 카페에서 지환과 민재는 각자 먹을 음료나 만들며 하릴없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나쁘지 않은 지루함에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 민재는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오래 자도 되나?’

꿈에서는 길게 느껴져도 깨어나면 아닌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이 꿈은 유독 긴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다가 잠에 들었더라? 민재가 생각해 보려던 찰나였다. 날카로운 통증이 그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선배. 왜 이래요, 선배?”

민재가 머리를 붙들자 지환이 그를 잡고 흔들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장기와 뇌가 흔들려 진탕이 되는 것 같았다.

“우민재 실장님!”

누군가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눈을 떴다.

그리고 민재는 생각지도 못한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신태현이었다. 태현은 민재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이 무언가에 안도한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민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곳, 그 안에 관도 아니고 거대 캡슐 같은 것에 자신이 눕혀져 있었다.

민재는 자신이 눈을 뜨기 전, 그러니까 눈을 감기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해 보았다.

그는… 무너질 건물 안에 있었다. 협박 메시지를 받았고, 그가 혼자 들어가야 할 곳에 우석이 들어가는 것을 보아 급하게 따라 들어갔다가….

“너….”

민재가 태현을 가리키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목이 뻑뻑한 것이 느껴졌다. 말을 할 때마다 모래알갱이가 목 안쪽을 할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건조했다. 그리고 팔에 힘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민재는 그제야 자신이 어쩌다 쓰려졌던 것인지 기억해냈다. 카운트다운, 건물. 민재는 그 안에서 태현과 마주쳤다. 그리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맞아요. 내가 당신을 이곳에 데려다놨어요.”

태현이 긍정했다. 왜? 민재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민재를 향해 태현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아버지는 나와 내 누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누나를 지켜야 했고, 그래서 당신이 필요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아듣게 해.”

민재는 겨우 말을 내뱉었다.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것도 어쩐지 좀 힘들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일 년 전에 죽었을 거예요.”

일 년 전? 민재는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의 핸드폰은 그에게 없었다. 심지어 옷도 환자복 같은 것으로 갈아입혀진 상태였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던 민재는 유난히 뼈가 도드라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쪽 소매를 위로 걷어보았다. 그러자 앙상해진 팔뚝이 보였다. 가죽만 남은 듯이 보일 정도였다.

태현이 자신에게 이상한 약물을 먹였거나, 혹은 일 년이 지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누워 있던 이것은 일종의 생명유지장치인가 보군.

민재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자 한동안 기다리던 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민재 에스퍼. 나랑 거래를 해요.”

태현의 얼굴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민재에게 다른 선택권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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