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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은 센터장의 심부름을 하는 김에 우석의 점심거리를 포장해 가기로 했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센터장이 도시락을 사오라고 한 것이었다.
센터장이 주문한 도시락을 가져다준 후, 오준은 2인분의 식사를 들고 우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원래라면 가이딩실을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지만 최근 우석은 자주 사무실에 혼자 처박혀 있었다.
“…안 먹어도 괜찮은데.”
도시락을 들어 보이는 오준에게 우석은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사무실 안쪽으로 그를 들였다. 오준은 한숨을 삼키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우석은 가만히 밥알을 세고 있었다. 오준은 그런 그를 보면서 ‘그날’을 떠올렸다.
무너지는 건물에서 에스퍼 2명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오준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우석이 그 명단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우석이 에스퍼가 아니라 가이드란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오준은 센터장이 습격받았을 당시 우석이 어떤 기분으로 그 많은 부재중 전화를 걸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괜찮냐는 질문을 보낸 문자에도 한참 답이 오지 않아 오준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네’라는 한 글자의 답을 받고 나서야 실종된 에스퍼에 ‘우민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센터 내부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늦게 전달된 소식이었다.
우민재 실장이 우석의 절친한 친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센터 내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사이가 각별해 오준이 오해 아닌 오해를 했던 적도 있지 않나.
오준은 무어라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어 문제없이 에스퍼들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구조 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가 발표되고, 오준은 우석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오준은 엄마의 장례식 때 가장 먼저 우석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때 우석은 아무런 말 없이 빠르게 달려와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으나 오준은 우석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석이 부르기도 전에 오준이 먼저 그를 찾았다.
문을 연 우석은 멍한 얼굴로 오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준은 그런 우석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가 앉혔다.
“…나 때문이에요.”
딱 한마디만 내뱉은 우석은 그 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울지도 않았다.
우석은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오준은 그저 잠자코 그 옆을 지켰다.
그 후 우석은 숙소를 벗어나 실장으로서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켰다. 장시간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에스퍼들을 위주로 가이딩을 받을 수 있게끔 조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의 추모식을 준비했다.
오준은 그런 우석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꼭 어떠한 일만 마치면 죽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준은 틈만 나면 우석을 찾았다. 다행히도 우석은 오준의 방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제.”
우석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운을 뗐다. 오준은 그런 우석을 잠자코 기다렸다.
“약간 실마리가 잡힌 것도 같았는데… 단서를 찾으려 들면 들수록 민재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석의 목소리는 퍼석했다. 오준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우석이 받아들여 줄 것 같지 않았다. 오준은 차라리 화제를 다른 곳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실마리가 잡혔다는 건 뭐였는데요?”
“…내가 정보를 받았던 사람이 센터 내부에 있고, 그가 민재의 일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정보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센터의 내밀한 곳에 침투가 가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준은 근래 빈도가 유독 잦아졌던 센터장의 손님들을 떠올렸다.
오준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석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생각해 보았으나 답이 잘 내려지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무력감이 들어 무어라도 쫓아야 할 때는 모든 정보가 소중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오준은 작은 것이라도 우석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하나 이야기할 게 있어요.”
우석이 의아한 눈빛으로 오준을 바라보았다.
“근래 센터장을 찾은 빈도가 가장 높은 사람 두 명은 이서연 가이드와 주호영 에스퍼였어요. 주호영 에스퍼는 비교적 최근에 센터장이 찾기 시작했고요.”
“…….”
“알고 있던 정보인가요?”
오준이 질문하는 순간 우석의 눈이 흔들렸다. 오준은 그 반응으로 자신이 던진 정보가 우석에게 다른 단서를 주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괜찮겠어요?”
센터장과 관련된 정보를 자신이 활용하게 되어도 되겠냐는 말 같았다. 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이 굳이 그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석은 그런 오준을 망부석처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먹어요, 이제. 다 식어.”
오준은 도시락을 우석 쪽으로 좀 더 밀어주었다. 우석이 마지못해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
은정은 서연의 숙소 앞에 서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서연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은정은 서연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은정은 문득 서연도 동생을 잃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은정은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서연의 숙소 앞에 서 있는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은정아.”
땅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은정을 서연이 불렀다. 은정은 고개를 들어 서연을 보았다. 며칠 전보다 더 핼쑥해진 것 같았다.
서연은 은정의 눈을 슬쩍 피하더니 문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잠금을 해제했다.
“들어가자.”
서연이 말했다. 은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던 곳인데, 은정은 서연의 숙소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이 둘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 같아 은정은 씁쓸함을 느꼈다.
서연은 차를 마시자며 물을 끓이겠다고 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키우고 있었다.
“…물어봐, 은정아. 그러려고 온 거잖아.”
서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은정은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때 그 약물 이야기, 해줄 수 있어?”
“…그건.”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가이딩 촉진제야.”
“…가이딩 촉진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가이드용이야. 가이딩 발산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내는데 아직 부작용과 효능 입증도 다 되지 않은 시약품이야.”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은정은 잠시 침묵했다.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은정은 다시 질문을 했다.
“혹시, 혹시… 너 민재 선배가 사라진 일과 연관이… 있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서연의 대답에 은정은 숨을 헐떡이듯 들이마셨다.
“그게 뭐야. 연관이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서연아, 아니지?”
은정의 물음에 서연은 끓고 있는 포트의 스위치를 껐다. 그러고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은정이 소리쳤다.
“난 처음부터 김진성을 죽이기 위해 센터에 들어왔어.”
뭐…?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은정의 앞에 서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양아버지는 그걸 도와주시기로 했고, 그 대가로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해. 이런 일 저런 일들을.”
“…….”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갈수록 다른 걸 쫓으시는 것 같더라고.”
서연은 씁쓸함이 다분히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정은 지금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양아버지가 우민재 실장님을 노리는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어. 막아보고 싶었는데 태현이가….”
서연은 말끝을 흐리더니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곧 다시 고개를 들고는 은정을 바라보았다.
“네가 발견한 저 약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시작이 될 거야.”
경고의 말이었다. 서연이 말을 마치자 은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너 이걸 나한테… 왜 다 말하는 건데?”
“…나는 하나만 해치면 되는 거였는데, 그 길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해치게 되는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서연은 너무 지쳐 보였다. 은정은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민재 선배, 살아 있을 확률이 있어?”
“…희박할 것 같아.”
서연의 목소리는 꺼져가는 불씨처럼 위태로웠다. 물어보지 말걸. 은정은 곧바로 후회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민재의 죽음을 선고받은 기분이었다.
그때 눈을 감은 은정의 앞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려고 눈을 뜬 은정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서연을 발견했다.
“…이서연. 너 뭐 하는 거야.”
“은정아, 날 이용해. 나는 원래 목표만 이루면 삶에 미련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널 지키고, 사람들을 지켜.”
“제발 좀.”
은정은 그만하라는 듯 서연의 앞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서연이 내뱉는 말들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특별하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던 그녀가 자신을 속여 왔다는 것만으로 벅찬데 삶에 미련 같은 건 없고 자신을 이용이나 하라는 말은 너무 잔인했다.
“너 진짜 못됐다, 이서연.”
“…미안해.”
은정은 이를 앙다물었다.
“네 양아버지인 신경준 의원이 이 일의 배후자라는 거지?”
“맞아.”
“그럼 지금부터 내 목적은 신경준이야. 난 네 양아버지를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
상처받은 만큼 서연을 할퀴고 싶어 한 말이었다. 서연이 조금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서연은 이내 곧 침착해졌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해야겠으면 하자.”
서연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자’고 말했다. 은정은 분노와 설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우중충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 와서 나한테 이걸 다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야?”
은정이 물었다. 그러자 서연이 힘없이 웃었다.
“은정아, 나 같은 거한테 그런 거 물어봐 주지 마. 궁금해하지도 마.”
못돼 처먹은 년. 은정은 서연의 말에 울컥했다.
은정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서연의 숙소를 벗어났다. 문이 세게 닫히는 마찰음이 복도를 울렸다. 은정은 빠른 속도로 복도를 벗어나며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