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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은 컴퓨터 화면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동영상 파일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민재와 태현이 사라진 건물 주변의 cctv 기록이었다. 근 한 달 동안의 영상을 모두 요청했기 때문에 양이 많았다.
은정은 뻐근한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쁜 것이 나았다.
은정과 지환은 센터로 돌아온 후 계속해서 민재의 실종과 관련된 실마리를 찾는 데 집중했다. 은정 또한 민재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민재의 사고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민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한, 조사를 멈출 순 없었다.
이 사고로 은정은 가족보다 소중한 민재를, 자신의 친구 서연은 동생을 잃었다.
마치 짜고 친 것처럼, 더 불행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인생이 한순간에 암흑에 처박혔다.
‘그냥 따라 죽을까?’
그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딱히 사는 것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꽤 이전에 그만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민재가 살려놓지 않았나. 은정은 그가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놓자니 다 죽어가는 꼴인 우석과,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마르는 서연과, 미친개처럼 날뛰는 지환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히어로 센터마저 조금씩 와해의 조짐이 짙어지고 있었다.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 살던 민재가 히어로 센터만은 끝까지 지키려 했다는 걸 아는 은정은 센터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은정은 민재가 자신에게 책임져야 할 삶을 남겨두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은정은 뭐든지 해보기로 했다.
은정은 최근의 것부터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서 무너진 건물은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따금 화면 안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살피는 민재의 모습이 보였다.
은정은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거칠게 닦아냈다.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봐야 했다. 놓치는 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좀 더 이전 영상을 확인할 때였다. 그러니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6분이 채 되지 않은 때, 은정은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비행 에스퍼와 함께 출동한 서연은 착지하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듯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연은 한참을 건물 근방에서 서성이다가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은정은 영상을 되감기했다. 그리고 좀 더 화면 가까이로 다가가 앉았다. 은정은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다시 봐도 서연이 맞았다.
서연은 분명 그날 은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지금 오냐는 그녀의 말에 조금 늦었다며 멋쩍게 웃어 보이던 것을 은정은 똑똑히 기억했다.
은정이 발견한 서연의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으나 어쩐지 은정은 쉽사리 넘겨지지가 않았다.
“은정아, 제발. 진짜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 믿어주면 안 돼?”
순간 은정의 머릿속에 믿어달라던 서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믿어달라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서연은 은정에게 소중한 친구였다. 그랬기 때문에 은정은 서연의 그 말에 막연히 어떠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만 짐작했다.
‘혹시 그게 민재 선배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까?’
작은 의심이 물꼬를 트자 은정은 견딜 수 없어졌다. 은정은 우선 다른 영상들을 모두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별다른 수확을 얻을 수 없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일에 쓰인 폭탄은 현재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공식 폭탄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단서를 찾기가 어려웠다.
건물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만한 위력을 가진 폭탄인데 커다란 가방을 들고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든가, 어딘가 수상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폭탄이 소형이거나 건물 내에 범인이 아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시 모든 것이 미궁으로 빠졌다.
서연에게서 어떻게든 사연을 알아내야 했을까? 아니면 미리 민재에게 언질이라도 해야 했을까?
내가 뭔가 잘못 판단해서, 그래서 민재 선배가 잘못된 건 아닐까?
아찔한 공포감이 은정을 뒤흔들었다.
***
우석은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와 멍하니 앉아 있는 은정에게 따듯한 물을 내밀었다.
“이거 마셔.”
“…어.”
혼이 나간 듯 은정은 바로 앞에 있는 물 잔도 제대로 받아 들지 못하고 손을 휘적거렸다. 우석은 은정의 앞에 물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
은정이 그제야 우석을 보며 왜 그러냐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은정아.”
우석의 말에 은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배… 나 어떡해. 내가… 내가 잘못해서 민재 선배가 그렇게 된 것 같아.”
자책을 한 은정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우석은 은정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원인이 우리 중에 있다면 그거 나일 거야, 은정아.”
우석이 힘겹게 말했다. 그날, 갑자기 건물로 들어가는 우석을 발견한 민재가 그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석은 죽고 싶었다.
민재가 그렇게 된 것에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심지어 우석은 메리로부터 민재가 위험할 것이라는 경고도 받았었다.
그때 그냥 민재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내가 건물에 들어가지 않고 억지로라도 민재 곁을 지켰어야 했나?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가 민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우석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이 먼저 가면 남은 쪽이 센터 운영 책임지는 걸로 하자.”
둘이 나란히 실장직을 떠맡게 된 날, 민재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센터 같은 거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민재는 센터 안에서 살고 있는 자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은정은 울면서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았다. 이서연의 방에서 이상한 약품을 발견했고, 자신은 그것을 덮어주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이서연이 그날 현장에 자신보다 일찍 와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우석은 순간적으로 이서연이 메리일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확신할 만한 정황이나 근거는 없으나 그녀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메리가 나를 도와 협력관계를 형성하려고 했던 것이 맞을까?’
우석은 무너진 건물로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민재를 죽음의 길로 몬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우선 민재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설사 관련이 있다고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우석은 은정을 다독였다. 그렇다. 은정의 탓이 아니었다.
이제 우석은 반드시 메리의 정체를 밝혀야만 했다.
***
히어로 우민재와 신태현의 추모식이 이루어졌다. 진성이 직접 짜놓은 판이었다. 진성은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민재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민재는 김진성에게 있어 꽤 중요한 인물이었다. 민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진성은 정말로 민재를 꽤 예뻐했다.
국내에서 좀처럼 나오질 않던 SSS급 에스퍼였다. 하필 능력이 치유인 게 조금 단점이었지만. 사실 민재의 큰 장점은 초능력 외의 것들에서 더 돋보였다.
센터와 센터장인 진성을 증오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쉽게 포기하거나 도망치는 법이 없었다. 우민재는 언제나 진성의 신경을 긁으면서도 항상 센터장의 그늘 아래 있었다. 진성은 그것이 은근히 기꺼웠다.
우민재는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가진 것에 비해 약점이 많았다. 유독 정에 약해 지켜야 하는 것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그의 습성 때문이었다.
숨겨야 하는 것이 있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진성은 민재와 자신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성은 어쩌면 은연중에 자신이 민재를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에스퍼였지.”
진성은 중얼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진성은 히어로 우민재를 추모하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신문 기사 제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으로 센터에 대한 공격이 조금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테러는 줄어들지 않았다.
진성이 의도한 대로 동정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으나, 우민재의 부재와 연관 지어 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우민재가 없는 센터가 이대로 괜찮으냐는 의혹이었다.
진성의 작은 오판은 언제나 크기를 부풀려 돌아왔다.
그는 센터를 대표하는 얼굴을 잃었다. 센터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센터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고, 센터장인 김진성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패배자가 될 바에야 죽는 게 낫다.”
진성의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었다.
진성은 센터의 위기를 극복시켜 줄 무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역시 완벽한 형태의 에스퍼가 필요하다.’
진성은 곧바로 S급 에스퍼인 박지환을 떠올렸다. 꽤 흔한 능력에, 민재와 페어였던지라 꽤나 괴로워하고 있는 눈치였다.
박지환은 최근 센터의 기물들을 파손하고 다녔기 때문에 진성에게도 몇 번 보고가 올라왔다. 실장을 시켜놓은 놈이 꽤 징징거리기도 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박지환이 실장이 되는 것이 맞았다. 가장 강한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아래가 자연히 안정되는 법인데. 쯧 진성은 혀를 찼다.
어찌 되었건 박지환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다는 건 그의 정신이 약해진 상태라는 의미였다. 그런 상황일수록 휘두르기는 좋았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에스퍼를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될지도 몰랐다. 진성의 얼굴에 기분 좋은 호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