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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좋아해요.”
민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웃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둘은 황금빛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지환을 마주 보고 있는데, 제삼자의 시선처럼 자기 자신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꿈이구나. 민재는 중얼거렸다.
어린 후배가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민재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연하고 완전하게 느껴졌다.
민재는 파도처럼 머리칼 사이로 빠져나갔다가 다시금 다가오는 손가락의 감각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민재는 자신이 그런 표정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실제의 민재는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서는 그랬다. 지환이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민재는 눈을 떴다.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고 있는 아침에 가까운 새벽이었다. 부지런한 지환이 아침을 사러 나간 모양이었다.
괴이한 꿈이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민재는 베개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의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졌다.
미친놈. 민재는 자조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확인했다. 얼마 전 익명의 협박 메시지를 받은 민재는 최근 지환이 없을 때마다 틈틈이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민재는 현관을 힐끔 보고는 메시지를 열었다.
-그날의 실험을 마무리 짓자.
덧붙여서는 날짜와 장소가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 머지않은 날짜와 한 건물의 주소였다.
그날의 실험. 그 말은 민재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상대는 그날의 생존자다. 그리고 그 상대가 원하는 것은 우민재의 목숨이다.
민재는 밤과 아침의 중간 사이의 빛을 띠고 있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상대가 지환을 원했더라면 민재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민재는 지환의 침대 옆 서랍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이따금 지환이 민재의 심부름을 갈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민재는 메모지에 짧은 편지를 적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그대로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만약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파기하면 될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는 지환이 보지 않을까 싶었다.
민재가 막 서랍을 닫았을 때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아침을 사 온 지환이 돌아온 것이다.
***
쪽지에 적힌 날짜는 빠르게 다가왔다. 시간이 표기되지 않았다는 점과 건물의 층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질 나쁜 장난은 아닐까 민재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일 오후 1시쯤이 되자 약속 장소인 건물 외곽에 갑자기 빛이 쏘아지며 커다란 숫자가 드러났다. 60부터 시작한 숫자는 1분이 지나자 59로 바뀌었다. 카운트다운이었다.
‘곱게 해결하고 싶지는 않다 이거군.’
소식을 접한 민재는 출동 준비를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 가요.”
지환과 함께 현장으로 날아가며 민재는 센터에 명령을 내렸다. 출동 가능한 인원은 모두 출동해 해당 건물과 주변 건물에 있는 모든 인원을 대피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건물은 15층짜리였다. 어떠한 정보도 없이 시작된 카운트다운이니 폭탄일 확률이 높았다. 민재는 숫자가 깜빡이고 있는 건물 외벽을 바라보며 폭탄이 어디에 놓여 있을지 생각했다.
“넌 사람들 대피시키는 것 좀 도와. 그리고 좀 이따가 내가 부르면 이쪽으로 오고.”
“…네.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세요.”
민재의 말에 지환은 당부를 남겨두고 사람들 쪽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폭탄 처리반이 도착했다. 민재가 자신이 먼저 들어갔다 나오겠다는 이야길 하고 있을 때였다.
“폭탄이 있는 건 맞아?”
우석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민재는 잠시 놀라 멍하니 우석을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길 나왔어?”
“가능한 인원은 모두 나오라며?”
이런저런 상황을 대비해 현장 가이드들도 출동하긴 했으나 우석이 올 줄은 몰랐다. 우석은 잠을 못 잔 건지 꽤 파리한 안색이었다.
민재는 그런 우석의 얼굴이라도 본 것이 퍽 반가웠으나, 혹시 모를 상황에서 지켜야 할 인원이 늘어났다는 데 난감함을 느꼈다.
“우석아, 이따가 넌 우리 팀 호영이랑 은정이랑 붙어 있어. 내가 말해둘 테니까.”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은 민재를 힐끔 바라보더니 그의 어깨 위에 팔을 올렸다. 어깨동무를 한 우석이 물었다.
“그래서 폭탄이 어딨는데?”
민재는 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너는 폭탄 근처에 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우석은 약골 취급하냐며 인상을 썼다.
민재는 작은 소란을 일으키는 우석의 등을 밀어 은정에게 넘겨줬다.
카운트 종료까지 45분이 남은 시점이었다.
***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서연은 태현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태현이 전화를 받지 않아 찾아온 것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서연은 잠시 복도를 살펴보았다. 딱히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서연은 태현의 방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현의 방 비밀번호는 서연의 생일이었다. 그가 언제든 방에 찾아오라며 일러준 것이었는데 서연이 자진해서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숙소 안에는 태현이 없었다. 혹시 본가로 가보아야 하나? 무슨 일이 생겼나? 생각하던 서연은 문득 냉장고 위에 떡하니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곱게 접힌 채로 자석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서연은 종이를 집어 들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지금 좀 떨리는데. 이걸 발견하는 게 누나였으면 좋겠어서 해보는 작은 도박이야. 때가 되면 돌아올게. 몸 잘 챙기고 있어. 그리고 원래 쓰던 것은 이제 사용하지 마. 안녕.
미친.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안녕이라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난 누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순간 서연의 머릿속에 최근 태현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왜인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서연은 태현의 방 안을 뒤져보았다. 서랍에 숨겨 놓았던 몇몇 서류들이나 데이터를 담아놓은 외장 하드가 없었다. 찾아볼 수 있는 곳을 다 살펴도 없었다.
신태현이 떠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멍하니 서 있던 서연은 자신이 어지럽혀 놓은 태현의 방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때 경보음이 울렸다.
서연은 미친 듯이 달리다가 로비에서 날아오르려는 에스퍼를 붙잡았다.
“저도… 저도 현장에 좀 데려가 주세요!”
서연은 계속해서 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태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현장에 도착했다. 건물 외벽에는 커다란 숫자가 떠 있었다. 그 숫자가 줄어들수록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 한다는 건데. 사람들이 대피하는 것을 도우면서 서연은 끊임없이 생각했으나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놔!”
사람들의 대피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건물 입구에서 누군가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서연은 건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돌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숫자를 발견했다. 서연은 숨을 멈추었다.
***
우석은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제대로 설명해 줄 수도 없는데 계속 조심하라느니 하는 말을 하면 민재가 귀찮다는 말로 대충 넘길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석은 현장에서 은정을 도우며 민재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같은 말이 붙긴 했으나 메리는 다음 타깃이 민재일 것이라고 했다. 그 경고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니 우석은 불안함이 컸다.
왜, 어떻게 우민재를 노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친구인 민재가 위험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카운트다운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제발 그냥 사람들 다 대피시키고 조용히 복귀하게 되었으면. 우석은 되뇌었다.
그때였다. 30에서 29로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던 우석은 건물 중앙쯤 되는 층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우석은 빠르게 층수를 세었다. 8층이었다. 예의 인영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순간 우석은 그 복면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메리? 우석은 눈으로 민재를 찾았다. 그러나 민재는 건물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우석은 잠시 망설이다 빠른 속도로 건물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대피할 사람들을 빼내는 통로를 통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실장님?”
누군가 우석을 부르는 것 같았으나 우석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메리가 맞다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캐물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구해서 나가면 되는 것이고. 아직 시간은 있으니 괜찮을 터였다.
우석은 엘리베이터를 확인했다. 8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니 그가 헛것을 본 것은 아닌 듯했다. 우석은 비상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당연하게도 8층 복도는 고요했다. 우석은 빠르게 그 층에 있는 문을 모두 열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몇 층으로 가봐야 하지? 우석이 머리를 굴리다 아래층으로 향했다. 메리가 여기서 뭘 했든 준비가 끝났다면 위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야 입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기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계단을 내려가는 우석에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석은 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덜미를 낚아채듯 잡았다.
“너 뭐야.”
“네? 왜 이러세요!”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당황한 듯 우석의 팔을 뿌리쳤다. 우석은 그를 놓칠세라 재빨리 다시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너 뭐냐고.”
“당신은 뭔데. 숙직실에서 자다 깼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남자는 황당해 보이는 얼굴로 우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석은 이 자가 메리일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복면을 벗고 일반인인 척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걸 캐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우석이 붙잡은 남자는 그가 가늠해 보았던 메리의 체구와는 확연히 달랐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여긴 폭탄이 설치되어 있을 확률이 있어서 구조 작업 중이니까.”
“억! 폭탄? 폭탄이요? 근데 아니 어떻게 아무도 나를 안 깨우고….”
“숙직실에 다른 사람 있어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꽤 소란스러웠을 텐데 잠에서 깨지 않은 것이 신기했으나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남자의 반응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우석은 우선 남자를 데리고 1층으로 향했다. 입구를 벗어난 그가 남자를 에스퍼에게 넘기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우석의 팔을 잡아챘다. 우석의 몸이 옆으로 돌려졌다.
“민재 선배는요.”
이마에 핏줄이 선 지환이 물었다.
“뭐…?”
“민재 선배는 어쩌고 당신만 나오냐고.”
지환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낮았다. 왜 나한테서 민재를 찾지? 생각하던 우석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민재가 저 안에 들어간 거야?
그때였다. 10분을 남기고 있던 카운트다운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10, 9, 8….
지환은 숫자를 확인하더니 건물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우석은 그런 그를 붙들어 뒤쪽으로 밀었다.
“놔!”
날아오르려는 지환을 옆에 있던 에스퍼들이 붙들었다. 다른 비행 에스퍼들은 건물 가까이에 있던 가이드와 다른 에스퍼를 데리고 거리를 벌렸다.
3, 2, 1.
숫자가 1을 가리키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