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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민재와 지환은 잠시 경보음이 조용한 틈을 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민재는 문득 파란 점프슈트를 입고 급식실에 앉아 있는 지환의 모습이 히어로 센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해 보였는데. 민재는 지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넌 여기에 오지 않으면 뭘 하려고 했어?”
지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발현 안 했으면 말이야.”
“음… 원래는 운동을 했어요. 히어로가 되려면 기초체력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근데 발현이 늦어져서 부모님 권유대로 소방공무원이나 경찰 쪽에 지원하려고 했었어요.”
정말 한결같네. 민재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흘렸다. 이러나저러나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쓰는 일이었다.
“…어울리네.”
“선배는요?”
민재의 말에 지환이 되물었다. 밥 먹던 것을 멈춘 지환은 왜인지 눈을 빛내며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제대로 된 꿈이나 목표를 가지기 전에 이곳으로 왔으니까. 민재는 그 말을 삼키고 말끝을 흐렸다.
“그럼 은퇴하면요? 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지환은 더 묻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은퇴라. 그런 건 히어로 센터에서 불가능했다.
‘최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쩌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지. 센터가 공중분해되어 다들 한꺼번에 강제 퇴직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민재는 지금은 굳이 그런 어두운 이야기로 초를 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민재는 대강 생각이 나는 대로 말했다.
“뭐… 그냥 어디 작은 카페나 열거나….”
“그럼 전 매니저 할게요.”
지환이 재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시켜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지환은 벌써부터 카페 운영 계획을 읊어댔다.
“배달도 해요. 저 잔 안 넘치게 잘할 수 있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상당히 시답지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지환도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으니 제 딴에는 민재의 마음을 편히 해주려고 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민재는 순간 접시 위에 커피잔을 올리고 비행을 해 서빙하는 지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상했다. 지금 센터는 존속이 위태로웠고, 민재는 아직도 과거에 쫓겨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지금 지환이 쏟아내는 미래가 무척이나 안온하게 느껴졌다.
민재는 어쩌면 그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휩싸였다.
“나쁘지 않네.”
부정적 단어로 이루어진 긍정이었다. 민재의 말에 지환이 씩 웃어 보였다.
“그쵸? 그럼 약속한 거예요.”
지환이 뿌듯한 듯 미소 지었다. 지환은 어느새 약속까지 들먹이고 있었지만 민재는 그것이 꽤 달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안온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둘이 막 식당을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민재는 자신의 핸드폰에 낯선 알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확인해 보니 얼마 전 강지훈의 일로 로그인했던 게임 커뮤니티에서 보낸 알림이었다.
민재는 곧장 커뮤니티로 접속해 보았다. 강지훈의 계정으로는 ‘알 수 없음’의 제목으로 개별 쪽지가 도착해 있었다.
민재는 쪽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잘 지내고 있어? 네 비밀을 알고 있어. 우민재.
강지훈의 아이디로 접속한 것이 자신임을 확신하고 있는 메시지였다.
올 것이 왔구나. 민재는 그간 자신을 괴롭히던 불길한 예감이 기어코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마지막까지 숨통을 죄일 심산인지 어떠한 정보나 요구도 없는 도발이었다.
“선배님도 보셨어요?”
식판을 정리하고 걸어오던 지환이 민재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물었다. 설마 박지환에게도 무언가가 갔나? 민재가 눈을 부릅뜨자 지환이 그의 핸드폰 화면을 민재의 앞으로 내밀었다.
-센터장 습격. 병원으로 급히 이송.
“뭐…?”
민재의 입에서 맥없는 질문이 튀어나갔다.
***
우석은 가이딩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조합을 보고는 발길을 멈추었다. 바로 가이드 이서연과 그의 동생이라는 신태현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다녔기에 팔을 이렇게….”
서연은 어디서 긁힌 건지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는 태현의 팔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태현은 그 앞에서 바보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지환과 민재를 떠올린 우석은 물품창고에서 소독약을 꺼내 서연에게 건넸다.
“소독하고 가이딩해 줘.”
“어, 실장님.”
“…안녕하세요.”
우석의 말에 서연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소독약을 받아 들었다. 태현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넌 어쩌다가 그랬어? 현장에서 그랬어?”
“집 앞에 사는 고양이가….”
“말이 돼?”
태현은 서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눈에 띄는 거짓말을 했다. 최근에는 일손이 너무 부족해 웬만한 에스퍼들은 되는 대로 현장에 투입되고 있으니 저 정도 다쳐 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제 누나한테 걱정을 끼치긴 싫은 모양이다 싶었다. 우석이 티격태격하는 둘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헉, 이게 뭐야?”
가이드 몇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석은 그런 가이드들에게 다가갔다.
“뭔데?”
“실장님! 센터장님이….”
칼로 복부를 찔려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우석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우석은 곧장 센터장실로 향했다.
늘 센터장실 입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마 센터장이랑 동행한 거야?’
우석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오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계속될수록 우석은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어갈 때쯤이었다. 신호음이 끊기고 우석이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요?”
우석은 자신의 목소리가 꽤 거칠게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준은 좀 당황한 것인지 목소리 크기를 줄였다.
[센터장님 지시로 기사 보도 확인하느라… 무슨 일 있어요…?]
“다쳤어요?”
[네? 센터장님이요?]
“아니, 너. 다쳤냐고. 윤오준 너.”
센터장이 다쳤다는 건 이미 기사가 났으니 알 바가 아니었다. 우석에게 중요한 것은 오준의 안위였다.
[…난 괜찮아요.]
오준의 말에 우석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걱정할 거라고 생각 안 해봤어요?”
우석의 타박 섞인 말에 오준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진 정신이 없었다는 둥 어물어물 이상한 변명을 하다가, 센터장에게 다시 가봐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우석은 긴장이 풀린 몸을 벽에 기대어 섰다.
이 와중에 동정여론을 얻어 보고자 비서에게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 늙은이가 정정도 하시지. 우석은 중얼거렸다.
대낮에 센터장을 공격했으나 동행하던 비서는 건들지 않았다. 그리고 센터장을 완전히 죽여 놓지도 않았다.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던 우석은 무심코 메리의 메일을 떠올렸다. 메리는 ‘그들’이라고 특정 집단을 지칭했다.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 슬슬 날 만나고 싶지 않아?
우석은 어젯밤 확인했던 메리의 메일을 떠올렸다. 메리라는 존재가 정말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의 배후를 알고 있다면, 접촉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과 장소.
우석은 결국 답장을 썼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메리는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었다. 혼자 와야 한다는 매우 수상한 조건을 덧붙인 채였다.
***
우석은 결국 메리가 요구한 대로 혼자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혹시 몰라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도 썼다.
여러모로 찜찜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찌 되었건 메리는 우석에게 우호적인 관계를 제안했다. 센터장이 습격을 받은 상황에 혼자 움직이는 건 너무 안일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에스퍼도 아닌 자신을 굳이 노릴 이유가 없다는 게 우석의 판단이었다.
이 이야길 하면 민재가 자신이 가겠다느니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석은 방에 쪽지 하나만 남겨두었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마도 민재가 가장 먼저 들어가서 볼 것이고, 메리에 대한 단서를 얻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약속 장소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카페였다. 조금 외진 곳에 있었지만 우석은 장소가 카페라는 것에 조금 안심했다.
점원에게 메리의 이름을 대자 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선 우석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존재와 맞닥뜨렸다.
“그쪽이 메리?”
우석의 질문에 복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이 보이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코입이 모두 가려진 복면이었다.
메리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파일철을 우석에게 내밀었다. 우석은 그것을 받아 들고 확인해 보았다. 금전이 오고 간 기록 장부 같았다.
“우선 이쪽 패를 보여줘야 믿음을 살 것 같아서.”
메리가 설명했다. 자동 음성 변조 기능이 있는 복면인지 목소리가 뒤틀려서 나왔다. 성별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이게 뭔데?”
“금성과 센터가 뒤로 주고받은 돈의 내역이야.”
금성과? 우석은 잠시 멍하니 메리의 복면을 바라보았다.
금성은 대기업이었다. 그런 곳에서 센터에 이렇게 돈을 쏟아부었는데 실장인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금성이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하고 센터에서 받아갈 만한 것. 그게 뭘까.
우석은 쉽게 조 박사를 떠올렸다. 금성이 무기 개발로 돈을 만지고 있구나. 우석은 짐작했다.
“…이걸 나한테 그냥 보여주는 건 아닐 거 아냐?”
우석이 말하자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본이 오고 가게끔 하는 ‘장소’가 있지? 센터 내에 있는 그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궁금한데. 그리고 그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실험실이 있냐고 묻는 말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묻는 거지? 우석은 잠시 고민했다.
만약 메리가 실험실 위치를 묻거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면 우석은 망설임 없이 이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우석이 말할 수 있는 범위에 걸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걸 말해주면 내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줄게. 여태 내가 공짜로 준 것들이 진짜라는 건 확인했잖아?”
우석은 그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는 메리의 복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석이 그 이야길 하면 결국 센터 내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이 정도 정보력이면 메리는 우석이 실험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그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석은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정보만 전달했다.
“있어. 그리고 센터가 생기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만들어진 공간이지.”
우석의 대답에 메리는 한동안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우석은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당신이 말해줬으니 나도 정보를 줄게.”
메리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우석은 중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너와 가까운 자가 큰 위험에 처할 거야. 다음은 아마도… 우민재야.”
놈들이 민재를 노린다고? 우석은 이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맞을지 고민했다.
“그들이 누군데?”
우석이 묻자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오늘 우리의 대화는 이걸로 끝이야.”
기분 나쁜 경고만 해놓고 정보를 더 줄 수 없다고? 우석은 치미는 짜증을 티 내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또 봐.”
감정을 알 수 없는 기계음이 인사를 건넸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우석은 복면을 가만히 노려보다 카페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