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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00)화 (101/181)

100

태현은 급하게 본가로 향했다. 간밤에 일어난 일로 아버지에게서 호출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지난밤 태현이 관리하는 연구실 중 한 곳에서 에스퍼 폭주로 인한 폭발이 일었다.

폭발은 연구실뿐만 아니라 붙어 있던 다른 건물에도 여파를 끼쳐 인명피해가 났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사라져 버렸고, 태현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남아 있는 연구실의 잔해와 증거물을 처분했다. 가스 유출 사고로 위장하긴 했으나 만일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젯밤, 연구실에는 소방구조원들만 방문했을 뿐 센터 쪽 출동은 없었다. 테러사고로 추정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아버지의 방문을 열자마자 두꺼운 책이 날아왔다. 태현은 슬쩍 몸을 옆으로 기울여 책을 피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신 모양이군. 태현은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리는 그의 아버지를 보고는 한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태현은 순순히 사죄했다. 그는 이미 범인도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그 연구소를 관리한 이는 태현을 고깝게 여기던 아버지의 측근이었다. 일부러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책임을 따지자면 태현으로서는 억울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여기서 내비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까지 그따위로 철없이 굴 거야! 내가 너한테 준 기회를 걷어찰 셈이냐!”

“아니에요, 아버지.”

태현은 이를 악물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동네방네 기사 나가려는 거 막으려고 돈을 얼마나 낭비한 줄 알아?”

혀를 끌끌 차고는 머리를 손으로 짚은 신경준이 의자로 가 앉았다.

태현은 신경준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론조작이라니. 그런 건 센터장이 제일 잘하는 짓이었다.

신경준 의원은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숙적과 똑같이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다.

태현은 서연이 말해주었던 그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는 정치인. 청렴결백한 사람. 그와 함께라면 정말로 자신이 원하던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하던 자신의 누나.

‘누나.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어. 저 괴물을 좀 봐.’

쓴웃음을 삼킨 태현은 좀 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플랜B를 앞당겨야겠다.”

신경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리를 지르다 잠긴 목소리가 갈라졌다. 태현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아직은…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아버지. 연구실을 이전한 것도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 그런 거니 조금 더….”

“닥쳐.”

태현의 말이 단칼에 잘렸다. 태현은 손을 우그러뜨릴 기세로 주먹을 쥐었다. 신경준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다시 명령을 내렸다.

“우민재를 죽여. 그가 우리 계획에 가장 큰 방해요소다.”

“…….”

“미끼를 던지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탈 없게 해라.”

신경준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태현은 꿇고 있는 무릎을 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태현의 짧은 대답에 만족한 신경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날 실망시키지 마라.”

“네.”

순순히 대답한 태현은 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넓은 저택을 벗어났다.

최대한 빠르게 본가에서 멀어진 태현이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입에 물었을 때였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연의 전화였다. 그녀의 전화가 달갑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태현은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응, 누나.”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태현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담뱃갑 안에 쑤셔 넣었다.

[태현아, 사람이…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어. 너… 너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서연의 목소리가 점차 젖어 들었다.

“누나.”

태현이 서연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서연의 것과 반대로 퍼석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서연이 물었다. 태현은 그 질문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누나, 누나는 그냥 날 믿어.”

[…뭐?]

“나는 누나 말이면 김진성도, 망할… 신경준도 다 무너뜨릴 수 있어. 목을 따다 달라면 따다 줄게.”

[신태현!]

서연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태현의 이름을 불렀다. 태현은 그 와중에 그녀가 성을 붙여 자신을 부르는 것이, 그 성이 ‘신’ 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누나는 나 믿어줘.”

태현의 말에 서연은 한동안 침묵했다.

“어제 일은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도 아직은 다 몰라. 근데 알아낼 거야.”

[…하.]

태현은 아버지가 오늘 어떤 일을 지시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연에게 말한 것들은 모두 진실이었다. 태현은 아직 신경준의 ‘계획’까지 파고들진 못했다.

그러니 적어도 태현은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었다. 서연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태현아.]

서연이 사과했다. 모질 거면 끝까지 모지든가. 의심해서 날 세워 놓고는 금방 사과를 건넨다. 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서연이 이런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누나, 아무래도 우리가 준비한 패를 써야 할 것 같아.”

태현이 말했다. 알겠어.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은정은 가이딩실에 앉은 민재와 지환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환은 지금 민재의 곁에 딱 붙어서 주먹밥을 ‘먹여주고’ 있었다. 가이딩 받으러 왔을 뿐인데 왜 자신이 그런 꼴을 봐야 한단 말인가.

“…뭐 해?”

“안녕하세요.”

은정의 질문에 지환이 인사를 건네 왔다. 여전히 도시락통을 든 채였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민재는 은정을 보더니, 잠시 굳어서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지환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놔.”

민재가 지환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지환은 괜히 불쌍한 척 입을 비죽거리더니 민재의 손에 도시락통을 올려놓았다. 은근슬쩍 은정을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새끼는 날이 갈수록 뭔가 재수가 없어진단 말이야. 은정도 지지 않고 지환을 노려봐 준 다음 민재를 바라보았다.

“선배, 밥은 좀 먹고 다니지. 왜 여기서 주먹밥으로 때워.”

“정신없고 귀찮아.”

귀찮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시간이 없을 터였다. 은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민재가 은정을 향해 손짓했다.

“너 이리로 와봐.”

은정은 말없이 민재 앞으로 다가섰다. 민재는 은정의 손목을 잡아 가이딩 수치를 확인했다. 꽤 위험한 수치까지 내려간 것을 확인한 그는 큰 소리로 우석을 불렀다.

“최우석! 빨리 와!”

“간다, 가!”

그러자 저쪽에서 우석이 투덜거리며 걸어왔다. 그도 꽤 피곤한지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얼굴이었다.

“은정이부터 빨리 해줘. 애 얼굴 좀 봐. 쓰러지겠어.”

민재의 발언에 곁에 있던 세 사람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중에서 가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은정이 아니라 민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민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환이 은정을 엄청 기분 나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은정은 진심으로 지환을 한 대 갈겨 버릴지 고민했다.

“됐어. 자, 둘 다 손잡아.”

우석이 한쪽 손은 은정에게, 한쪽 손은 지환에게 내밀었다. 다 큰 성인 셋이서 손을 맞잡고 있는 꼴이라니 좀 웃기긴 했다.

“은정아, 최근에는 워낙 일이 많이 생겨서 센터 내부도 안전하지 않으니까 몸 잘 챙겨 다녀야 해.”

민재가 차분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비합법 가이딩 약물로 에스퍼들을 꼬여내는 놈들부터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테러 사건까지, 이런저런 정보를 민재에게 전해 들었던 터라 은정은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야말로 조심해서 다녀.”

은정의 당부에 민재는 웃어 보였다.

가이딩을 받은 후 좀 쉬다 가라는 우석의 제안을 거절한 은정은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언제 비상벨이 울릴지 모르니 방 정리도 조금 하고 눈만 붙이려는 생각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걷던 은정은 본관 건물로 들어서는 서연을 발견했다. 은정은 긴 팔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 보았으나 서연은 보지 못한 듯했다.

근데 본관엔 무슨 일이지? 은정은 핸드폰을 꺼내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은정아.]

차분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정은 별생각 없이 서연에게 물었다.

“응. 서연아, 뭐 해?”

[아, 나 본가로 갈 일이 생겨서.]

본가?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그러나 서연은 방금 센터 본관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어딘가 애매한 대답이었다.

은정은 자신이 발음을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집?”

[응… 미안, 은정아. 내가 조금 이따 다시 전화할게.]

서연은 다소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은 핸드폰을 들고 잠시 생각했다. 서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나? 은정은 빠르게 본관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서연아!”

서연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은정이 서연을 부르며 그쪽으로 뛰었으나 듣지 못한 것인지, 서연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은정은 서연이 탄 엘리베이터가 어느 층으로 올라가는지 확인했다.

꼭대기 층. 그 층은 센터장실만 있는 층이었다.

뭐지? 은정은 자신이 잘못 보았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숫자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였다. 서연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은정은 그대로 서연의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서 서서 서연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정리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서연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정은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은정아?”

“본가에서 벌써 와?”

은정의 질문에 서연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가라앉았다.

“가는 길이었는데 아버지가 괜찮다고 하시네.”

“…그렇구나.”

서연은 잠시 은정을 보다가 자신의 숙소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은정은 말없이 서연을 따라 들어갔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은정은 서연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서연은 차를 끓이겠다며 싱크대 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받았던 차가….”

서연은 찬장 위쪽, 그냥 닿기에는 살짝 빠듯한 위치에 놓인 상자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은정은 서연에게 다가가 그 상자를 대신 집어 내려주었다. 그러다가 찬장 구석 안쪽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파란색 액체가 담긴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가이딩 약품? 은정은 그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이거 가이딩 물약이야?”

“어…? 어, 아마 그럴 거야.”

아마 그렇다고? 서연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은정은 뚜껑을 열어보았다. 센터의 약물보다는 색이 조금 진한 것 같았다.

“먹으면 안 돼!”

서연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은정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빼앗았다. 넘친 약물이 바닥에 튀고 둘의 옷에도 튀었다.

“이거 아, 암시장에서 구한 거라 무슨 성분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암시장이라고? 너 거길 혼자 갔어? 왜?”

은정이 묻자 서연의 눈이 잘게 떨렸다.

“최근 일어나는 일을 파악해 보려고 그랬어.”

물론 알아보고 싶을 수는 있지만 지금 상황에 그러는 것은 위험했다. 은정은 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재 선배와 의논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건 내가 우선 팀에 가져가서….”

“아니! 은정아, 그럼 내가 의심받을 수도 있잖아….”

서연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유리병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면서 왜 그랬어, 그럼?”

은정이 묻자 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빨개진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은정아, 제발. 진짜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 믿어주면 안 돼?”

그녀는 절벽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서연은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정은 이런 서연을 처음 보았다.

순간 은정은 이것이 서연의 맨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서연이 저토록 절박하다면, 그녀를 돕고 싶었다. 그리고 서연을 믿고 싶었다.

“…알겠어.”

은정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결국 은정은 서연이 한 거짓말을 덮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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