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호영은 거울 앞에 서서 꽤 비장한 마음으로 자신을 뜯어보았다. 그는 최대한 단정해 보이기 위해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었다. 너무 신경 쓴 것처럼 보이진 않으나 예의 바른 이미지로 보일 수 있었음 했다.
그는 어제저녁 센터장으로부터 개인 호출을 받았다.
“내일 오후 3시쯤 개인적으로 좀 보자고 하셨습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센터장의 비서는 그에게 약속 시간을 물어보았다. 호영은 무언가 잘못된 건가 싶어 몇 번이나 자신을 호출한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설렘과 불안이 한꺼번에 호영을 잠식했다. 대체 센터장이 그를 찾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팀에서 내치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으나, 그렇다면 쓸모도 없는 자신을 굳이 개별적으로 불러서 통보할 것 같진 않았다.
약속 시간 10분 전까지 호영은 센터장실 앞에 도착했다. 비서는 호영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잠시 대기하라며 의자를 권했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소파에 앉은 호영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고, 들어가서 나쁜 소식을 듣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호영은 센터장의 개인 손님이었다.
센터장의 일정표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힐끔 본 호영은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팀장님은 자주, 어쩌면 질릴 만큼 이곳에 호출을 받았겠지? 팀장님도 처음에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호영이 상념에 한창 빠져 있을 때였다. 무언가 확인한 듯한 비서가 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호영은 센터장실 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가볍게 두어 번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어. 왔나? 앉지.”
센터장이 호영을 향해 손짓했다. 조도가 꽤 낮은 사무실이었다. 크기가 큰 사무실 안에는 넓고 기다란 센터장의 책상과 그 앞에 놓인 소파와 테이블만 존재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곳에서, 호영은 묘한 위압감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호영은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자신의 책상에 앉아 호영을 바라보던 센터장이 몸을 일으켜 호영의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센터에 온 지 꽤 되었더군.”
“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긴장한 호영은 간략하게 대답하고 센터장의 눈치를 살폈다.
센터장은 꽤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팀 내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잘 해내는 친구라고 이야기 많이 들었다네.”
조금 뜬금없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호영은 기분이 살짝 들떴다. 민재 선배님이 그렇게 전해주신 건가? 호영은 생각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자네에게만 특별히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네.”
특별히 맡길 일? 호영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서둘러 대답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센터와 관련해서 시끄러운 일이 많지.”
센터장이 운을 뗐다. 확실히 최근 인터넷에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센터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최근 사망자가 나온 현장에 관해서 히어로 우민재의 능력에 관한 억측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에스퍼 실종이 거듭되다 보니 외부로도 일부 정보가 새어 나가,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까지 기사화되고 있었다. 덕분에 센터의 에스퍼 관리가 부실한 거 아니냐며 좋지 않은 여론이 돌았다.
거기에 최근 잦아진 테러 사건들까지 겹쳐 센터의 이미지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럼 무슨 일을 나한테 맡기려는 거지? 호영은 센터장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지 않아 긴장이 되었다.
“자네, 히어로가 필요한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나?”
센터장이 물었다. 꽤 이상한 질문이었다.
히어로가 필요한 곳? 현장 말하는 건가? 돌려 말하는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호영은 센터장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센터장은 호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호영은 어쩌면 센터장이 자신을 평가하려 이런 질문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다.
그러나 호영이 무어라 답을 내놓기 전에 센터장이 친절한 목소리로 답을 일러주었다. 꽤 유쾌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드라마. 매력적인 사건이 필요하지.”
“…네?”
호영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자 센터장이 씩 웃었다. 그러고는 호영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근 또 에스퍼 실장이 너무 바쁘지 않나. 그러니 자네가 실장과 다른 현장에 있을 때는 스스로가 팀장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뷰나 현장 브리핑을 좀 잘 해주면 좋겠는데.”
“인터뷰요…?”
“윤 비서가 파일을 전달할 테니 그걸 참고로 하면 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지금… 나더러 실장 대신 인터뷰하고 다니라고 한 거 맞지. 호영은 센터장의 말이 믿기지 않아 곱씹어보았다.
“근데 왜 저를…?”
호영이 멍하니 물었다. 그런 거라면 자신과 능력도 똑같을뿐더러 S급까지 단 박지환이 있지 않나. 그때 센터장이 호영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무슨 소리야. 호영 군이 센터에서 더 오래 일했고 능력도 뛰어나지 않나. 그러니 내가 특별히 부탁하는 거야.”
센터장이 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많았다. 센터에 오래 있었으며, 능력도 뛰어난 사람들이. 어떤 우연에 의해 자신이 센터장에게 불려 온 건지는 몰라도 호영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은 태도군. 믿고 있겠네.”
센터장은 호영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호영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어쩐지 호영은 그것만으로 센터장에게 굉장히 신뢰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호영은 구름 위를 나는 기분으로 센터장실을 나섰다.
***
“현장에는 몇 분 만에 나오신 건가요?”
민재는 이제 막 정리가 되어가는 현장에서 불쑥 마이크를 내미는 기자를 째려보았다.
어디 모자라는 건가? 저런 걸 질문이랍시고 하는 이유가 뭐야. 어떻게 해서든 트집을 잡아보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아 민재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오늘 방화 사건에는….”
다급하게 따라붙으며 말을 잇는 기자의 앞으로 지환이 다가섰다.
“아직 구조 현장 정리가 덜 끝나서요.”
지환은 예전에 민재가 한 적이 있는 말을 적절히 인용해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키가 큰 지환에게 위압감을 느낀 건지 기자는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현장에서 눈만 굴리며 멍청하게 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민재는 눈치껏 알아서 도움을 주는 지환의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다 컸네. 민재는 자신의 앞에 서서 기자를 막아서고 있는 넓은 등을 보며 생각했다.
“가자.”
민재의 말에 지환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잠깐만요! 이 인터뷰 좀 하고 가주세요.”
기자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민재의 옷깃을 잡아챘다. 팽팽하게 당겨진 옷을 본 민재는 고개를 들어 기자를 노려보았다.
지환이 기자의 팔을 낚아채려는 것을 민재가 막았다. 힘 조절을 잘못하면 기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오늘 방화 사건은 우민재 에스퍼와 박지환 에스퍼가 7분 50초 만에 현장에 도착해 부상자들을 치료했습니다. 우민재 에스퍼의 지도 아래 현장 정리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요.”
기자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민재에게 물었던 질문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정보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민재는 기자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덕분에 주변 피해도 미미합니다. 화상을 입은 부상자들도 빠른 속도로 일상에 복귀할 수 있을 테고요. 이 모든 것이 히어로 센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저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민재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기자를 바라보았다.
기자는 민재가 그냥 가버릴까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히어로 센터가 아니면’이라.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자가 누구의 매수를 받은 건지 알 만했다.
최근 여론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센터장이 이런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민재에게 시키면 그는 하지 않으려고 들 테니 모든 내용을 미리 정해놓고 대답만 하게끔 유도했을 것이다.
평소라면 그딴 식으로 기사 쓰지 말라고 경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요 근래 여론은 센터의 ‘쓸모’까지 논하고 있었다.
애초에 히어로 센터는 말이 구조기구지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에스퍼들을 잘 격리시켜 놓기 위해 만든 우리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에스퍼들이 실종되고 있다니, 사람들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았다.
꽤 많은 기사에서 현재 일어나는 테러들이 실종된 에스퍼들이 일으키는 일이라는 추측을 내놓고 있었다. 한마디로 센터는 조금씩 망해가는 모양새였다.
이렇게 대놓고 기자를 매수해 민재에게 피력할 정도면 센터장도 이 상황의 심각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쓰레기 같은 센터 따위,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으나 막상 그 조짐이 보이니 기분이 이상했다.
만약 소위 말하는 반이능력자들이 원하는 대로 센터의 ‘폐지’를 논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히어로 센터에서 유년을 보내고, 성인 시절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어떻게 될까?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쓸모를 다하던 이능력자들은 어떤 입장에 놓이게 될까. 그 생각을 하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제가. 비행 속도가 좀 빨라서요.”
갑자기 민재의 옆에 서 있던 지환이 입을 열었다. 기자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펜으로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야.”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지환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민재의 손을 잡았다. 꽤 강한 힘이었다.
“언제나 선배님을 빠르게 현장에 모셔다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배님을 비롯해서 센터의 모든 에스퍼들은 언제나 시민분들이 안전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민재 에스퍼님과 페어, 맞으시죠?”
기자가 물었다. 그러자 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환 에스퍼입니다.”
꽤 강세를 준 말투였다. 그러고는 지환은 기자의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아. 작게 탄성을 내뱉은 기자는 지환의 이름을 메모했다.
“잠시만요. 그냥….”
지금 뭐 하는 거야. 민재는 당황해서 굳은 얼굴로 기자를 만류하려 했다.
대중에게 노출되어서 이리저리 난도질당하는 건 저 하나로 충분했다. 그냥 원래대로 기사를 내면 된다고 말하려는 민재를 지환이 슬쩍 끌어당겼다.
“선배. 저 괜찮아요. 어차피 해야 하는 인터뷰 같으니 그냥 제가 할게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지환은 너무 과장되게 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민재를 안아 들고 날아올랐다.
“…혹시 제가 끼어들어서 화나셨어요?”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지환이 물었다. 꽤나 눈치가 보였던 건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지환이 받을 주목을 빼앗을 의도는 아니었던지라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노출되면 너만 힘드니까 말린 거지.”
지환이 민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럼 그동안 선배도 힘드셨겠네요.”
나지막한 지환의 목소리가 귓불 아래에서 들려왔다. 별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도, 위로받는 기분이 되었다.
민재는 슬쩍 지환의 머리칼 쪽에 턱을 묻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그의 목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