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최근 민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말은 거의 매일 센터에 비상경보가 울린다는 뜻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테러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민재와 지환은 현장에서 복귀해 가이딩만 받고 다른 현장으로 다시 나오는 길이었다.
현장마다 다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민재는 능력을 계속 사용해야 했고, 그의 가이딩이 소진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지환은 늘 노심초사였다.
현장에도 가이드가 있었지만, 민재가 우석이 아니면 가이딩을 받지도 않고 약물로 버티는 탓에 지환이 고생해야 했다.
민재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지환이 챙겨주는 것 외에도 가이딩 약품을 챙겨 꾸역꾸역 마시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민재를 살핀 지환이 도움을 요청하는 쪽으로 잠시 날아갔을 때였다.
민재 근처에서 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말세다, 말세야.”
한 에스퍼가 현장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민재는 그 에스퍼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게 말이야.”
“하… 진짜 일이 터져도 뭐 이리 한꺼번에… 헉!”
맞장구치는 민재의 말에 무심코 이야길 나누던 에스퍼는 고개를 돌려 민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민재의 눈치를 보았다.
요 근래 잠잘 새도 없이 가이딩실과 현장만 오가고 있는 에스퍼들이 많았으므로 민재라고 저 한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스퍼가 현장에서 해서는 안 될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별말 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에스퍼가 사과를 했다. 저도 힘들어서 한 소리지 별 뜻은 없었던 모양인지 머쓱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민재는 에스퍼의 손목을 확인했다. 노란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복귀해. 가서 좀 쉬어.”
“…네.”
에스퍼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가이드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는 민재의 시야에 땅바닥에 처박힌 비행기의 잔해가 들어왔다.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한 지 3분도 채 되지 않아 추락했다.
누군가는 작은 폭발음을 들었다고 했고, 누구는 갑자기 비행기가 땅 쪽으로 처박혔으니 조종 실수였을 거라고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제대로 된 원인을 모른다는 소리였다.
생각보다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민재는 회생 가능성이 높은 부상자들부터 차례로 능력을 쓰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안고 능력을 사용해 달라고 울었다. 그들을 바로 돌려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민재는 계속 가이딩 물약을 들이켜며 되는 대로 능력을 사용했다.
“선배, 괜찮아요? 이거 마셔요.”
어느새 지환이 다가와 새 물약을 내밀었다. 부상이 심각한 사람들은 얼추 치료가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고마워.”
민재는 지환이 준 물약도 들이켰다. 손목의 가이딩 수치 표시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지환이 민재의 손목을 살피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민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땅 아래로 몸이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재는 지환의 팔을 붙들었다.
“야, 나 좀….”
‘숨겨줘.’
미처 말을 다 마치지 못한 민재의 몸이 기울었다. 마지막 순간에 지환의 부푼 동공과 마주친 것도 같았다.
***
다시 눈을 뜬 민재는 익숙한 천장과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지환을 발견했다. 지환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민재가 물었다. 그러자 지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제가 묻고 싶네요.”
“아….”
민재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환이 빠르게 민재의 등을 받쳐주었다.
“현장은?”
“대강 정리됐을 테니까 문제없어요. 곤란하실까 봐 다른 사람들 안 보게 잘 모셔왔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는 것 같았다. 그가 기절할 때 지환이 눈치 빠르게 숨겨준 모양이었다. 민재는 안심했다.
“…고마워.”
“뭘요. 우린 페어잖아요.”
민재의 인사에 지환이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분명 물약 마시자마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가이딩 수치가 오락가락하는 걸 박지환이 다 봤을까? 민재는 계속 머리를 잡는 척을 하면서 손목을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가이딩 수치는 양호했다. 여긴 센터니까 우석이가 가이딩했겠지? 민재는 지환을 힐끔거렸다.
“근데… 빈혈, 정말 맞아요?”
“어?”
지환이 민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민재의 손을 살짝 잡아 내렸다.
지환의 다갈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민재는 어쩐지 두려워졌다. 지환의 눈이 마치 자신을 꿰뚫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넌… 날 믿어?”
“네.”
민재가 묻자 지환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뭔가 파헤치려는 눈을 하고? 민재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물었다.
“얼마만큼?”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게 뭐야.”
뜬금없이 튀어나온 속담에 민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예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꽤 날 선 눈을 하고도 끝까지 단호하게 저를 믿는다고 하는 지환이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이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래서 민재는 그가 정말로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빈혈 맞아. 좀… 특이체질이야.”
민재의 말에 지환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지환이 낯설게 느껴졌다.
민재가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다그치려는 순간 지환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대답한 지환은 정말로 대화를 끝낼 심산인지 철분이 많은 음식을 찾아봐야겠다며 메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환의 머리통을 보고 있으니 근래 있었던 많은 일이 멀게 느껴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민재는 무언가 심각한 듯 구겨지는 지환의 눈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
서연은 센터장실 앞에 가서 섰다. 이번 주에만 세 번째 호출이었다.
센터장실 앞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윤 비서도 지금 상황이 꽤나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많이 바쁘시죠…?”
“괜찮습니다. 필요로 해주시면 감사하죠.”
윤 비서의 인사에 서연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센터장실로 들어섰다.
“어, 서연 양.”
김진성이 그녀를 불렀다. 서연은 묵례를 하고는 권유를 받기도 전에 사무실 소파에 자리 잡았다. 김진성은 그런 그녀가 익숙한 듯 옆쪽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최근에 능력을 사용하실 일이 좀 있으신가 봐요.”
서연은 최대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정보를 캐내는 느낌을 받지 않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김진성은 서연이 별생각 없이 물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서연 양도 알다시피 최근 센터에 관한 여론이 안 좋은 쪽으로 활개를 치잖나. 좀 준비가 필요해서.”
이쪽저쪽 진을 치고 있나 보군. 서연은 짐작했다.
“요즘 테러가 너무 잦은 게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진 않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뒤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꼬리가 좀처럼 잡히질 않아.”
김진성은 서연을 슬쩍 돌아보더니 떠보듯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본 게 있나?”
서연은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외부의 적이 활개 치고 다닌다는 건 그를 돕는 자가 있다는 뜻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센터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자가요.”
서연이 슬쩍 돌려서 말하자 김진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부에 끈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정도만 던지면 된다. 서연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잘못 맞장구를 치면 자신이 의견을 피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구 추천할 사람 없나? 좀 적당히 맹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김진성이 물었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요?”
서연이 되묻자 김진성이 고개를 저었다.
“뛰어난 인재를 아래 두면 골치 아픈 일이 많지. 물론 이점도 있지만.”
무언가 생각하는 듯, 김진성은 자신의 턱을 쓸었다. 저열한 새끼. 속으로 중얼거린 서연은 어느 정도 뜸을 들이다가 다시 운을 뗐다.
“잘은 모르지만 좀 충직하고 성실한 타입을 좋아하시면 제1팀의 비행 에스퍼는 어떠세요?”
“…박지환? 걘 안 돼.”
“아뇨. 한 명 더 있잖아요?”
김진성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지 한동안 침묵했다.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이름을 흘렸다.
“주호영 에스퍼요.”
이곳에서 불린 적이 없었을 이름이었다. 서연은 떠듬거리지는 않되, 준비해 온 것처럼 들리지 않게끔 하려고 노력했다.
여상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내뱉은 이름에 김진성은 호영에 관한 정보를 떠올려 보는 듯 얼굴을 찌푸리다 중얼거렸다.
“아… A급이던가.”
“네. 저번에 보니… 팀 내에서 입지가 좁아져서 좀 힘들어하는 것 같던데 센터장님께서 챙겨주시면 성실하게 임할 사람 같아 보이더라고요.”
센터장은 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서연 양.”
“별말씀을요.”
김진성이 주호영을 정말 본인의 사람으로 쓰게 된다면 서연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의미일 터였다. 김진성이 고작 한자리 차지하면 만족할 얼뜨기를 수족으로 부리면 서연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서연은 곧바로 김진성의 손목을 진맥을 보는 것처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잠시 눈 붙이실래요?”
서연이 물어보자 김진성이 눈을 끔벅였다.
“…꼭 가이딩을 받을 땐 졸리는군. 부탁하지.”
김진성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견제하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연은 자신의 손아래에서 뛰고 있는 김진성의 맥박을 느꼈다. 그가 살아 있다는 표시니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서연은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하급 에스퍼인 김진성은 자신이 에스퍼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서연은 그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그를 존경하는 척하고, 일부러 약점을 잡혀줬다. 그러고는 이렇게 잡혀 사는 것에 꽤 만족하는 양 굴었다.
이따금 적선하듯 던지는 특권 같은 것들에 그녀가 푹 빠져 있다고 생각하게 하면 되었다.
김진성은 그가 서연의 약점을 잡고 있으니 안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서연의 약점은 모두 조작된 거짓이었다.
‘누가 목줄을 잡고 있는지도 모르는 꼴이라니.’
서연은 잠든 김진성을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뛰고 있는 이 맥박을 멈추게 할 날도 얼마 머지않았다. 서연은 반드시 본인의 손으로 김진성의 숨을 거두고 말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그의 손목에 가이딩을 주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