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97)화 (98/181)

097

우석은 사무실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최근 일어난 일로 인해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우석은 최근 소위 말하는 ‘블랙 메일’을 받고 있었다.

며칠 전, 센터에서 사용하는 우석의 메일 주소로 이상한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센터에서는 괴롭힘이나 여러 내부 문제를 고발할 때 익명을 사용해 실장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끔 훈련이 너무 힘들다든지, 사소한 싸움 같은 일을 일러바치는 멍청이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시스템이다 싶어 우석과 민재는 이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며칠 전 도착한 것은 우석이 여태 받아본 메일들과는 달랐다.

-안녕.

뜬금없는 반말이긴 했으나 인사말로만 적힌 메일 제목을 확인한 우석은 혹시 최근에 센터 내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있나 싶어 긴장한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안녕? 난 메리야.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 센터장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지? 도와줄게.

우석은 처음엔 그저 누군가 친 짓궂은 장난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찜찜했다. 아무리 장난이라 쳐도, 자신을 언급하면서 센터장을 무너뜨리는 걸 도와주겠다는 건 영 수상했다.

내가 센터장을 무너뜨린다는 망언을 밖에서 한 적이 있던가? 우석은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다.

물론 우석은 센터장을 진심을 다해 증오한다. 기회만 되면 무너뜨리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동료들 앞에서 내비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한 적이 없었다.

센터 내의 에스퍼나 가이드들은 우석이 센터장을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서 사람 짜증 나게 하는 놈’ 정도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보통 부하 직원이 상사를 싫어하는 정도다.

혹시 센터장이 떠보고 싶어서 이런 짓을 벌이나? 우석은 생각해 보았으나 김진성이라면 차라리 그를 불러 들들 볶아댔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석은 기분 나쁜 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안녕? 메리야.

이번에는 제목부터 메리라고 적혀 있었다.

그냥 읽지 말까? 우석은 잠시 고민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관심을 끄는 게 목적이라면-지금까진 그렇게 보인다-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 같았다.

그러나 이걸 보낸 사람을 추측해 보려면 메일을 읽어야 했다. 만약 이 메일이 외부에서 온 메일이라면? 그 의심이 우석을 흔들었다.

센터 내부에서 사용하는 메일 주소로 익명의 메일을 보내는 존재라면 일이 더 심각해진다. 우석은 메리라고 적힌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메일을 열었다.

-밤을 밝혀주는 것에는 빛과 불이 있지. 그들은 불을 원할 거야.

뭔 개소리야. 우석은 허탈함을 느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는 이유가 뭐야. 조금만 한가해지면 이거 쓴 새끼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조져놓아야겠다. 우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로부터 대략 일주일 후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손에서 화염을 방출하는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민재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우석은 곧바로 메일 내용을 떠올렸다.

우연의 일치인가?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이상했다. 타이밍도, 내용도 모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민재에게 말해볼까 싶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내용으로 신경만 곤두서게 만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너 누구야.

우석은 메일을 썼다가 지우길 반복하며 고민에 빠졌다.

***

“아- 해요.”

지환이 한숨만 내쉬고 있는 민재의 입안으로 주먹밥을 밀어 넣었다. 최근 여러모로 일이 늘어나 끼니를 챙기지 않게 된 민재를 보고 지환은 하루 종일 밥 타령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젠 그걸 넘어서서 이렇게 주먹밥 같은 걸 사와 민재의 입에 쑤셔 넣기까지 했다. 민재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주먹밥을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에스퍼 발현 신고 횟수가 줄고, 센터 내 에스퍼가 실종되는 일이 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숨기는 것이 가능했으나 반복적으로 일이 벌어지자 결국 기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재와 지환은 얼마 전 지환이 몰래 단독행동까지 해가며 입수해 온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날이 완전히 밝자마자 예의 건물을 찾아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곳은 이미 텅 빈 뒤였다.

영상이 아니었다면 지환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되었을 터였다.

“저 진짜 안 들켰어요. 기척도 다 죽였고 창문 밖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어요.”

지환은 당황한 얼굴로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민재는 그 말을 믿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들의 공간에 침입했다는 것을 현장에서 알았다면, 우선 그를 쫓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죽이려고 하거나. 그러나 지환의 뒤를 밟거나 목숨을 노리려 한 사람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우선 확실해진 것은 예의 비합법 가이딩 약물과 관련된 자들이 에스퍼를 모아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센터 내의 에스퍼를 납치하는 것도 이쪽이라면 숨어들어 온 에스퍼 하나 더 잡아낸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센터 내의 누군가가 ‘강지훈’이 잡혀 들어온 걸 알고 정보를 그쪽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강지훈은 자신이 어떻게 센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입을 다문다는 조건으로 신입 에스퍼가 되었다. 만약 본인이 입을 나불거리게 되면 소문보다 혹독하고 끔찍한 훈련을 시켜주겠다고 겁주니 죽어도 입을 열지 않겠다며 약속했다.

강지훈은 구조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다가 도망을 쳤기 때문에 이서연이 신고를 넣었다. 즉, 행정실에 신고 기록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행정실에도 줄을 대고 있으면서 저쪽에 정보를 물어다 나르는 쥐새끼가 있다는 의미였다.

센터 내부에 첩자는 없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의심하기 시작하면 너무 많은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 민재는 피로감을 느꼈다.

“자요.”

지환이 또 주먹밥을 들이밀었다. 민재는 하나 더 입에 넣고는 자신이 씹는 것만 쳐다보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넌 안 먹어?”

“전 대충 먹고 왔어요.”

“그래도 더 먹어.”

민재가 주먹밥을 가리키자 지환은 하나를 집어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제야 민재는 만족하며 다시 생각을 전환했다.

“아무래도 그 약품이 뭔지 알아야겠어.”

“먹는 건 안 돼요.”

지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워낙 단호하게 말하는 탓에 민재는 조금만 먹어보려던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되새김질하듯 주먹밥 하나를 천천히 먹던 민재는 김 박사를 떠올렸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지. 얼마 전 얻어낸 예의 가이딩 약품이 진짜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김 박사에게 있을 것 같았다. 잘못하면 성분 분석도 못 한 채 약을 버리게 될 수도 있지만, 다행히 약품은 한 병이 아니었다.

민재는 지환을 데리고 김 박사의 집으로 향했다. 저번처럼 김 박사는 흔쾌히 민재의 방문을 허락했다.

“오랜만이네. 그래, 몸은 건강하고?”

“네. 잘 지내셨죠?”

“나야 뭐 늘 잘 지내지.”

김 박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권했다.

“민재 군이 누구랑 같이 다니는 걸 보네?”

은근히 웃음기가 섞인 말투였다. 지환은 김 박사의 말에 히죽 웃더니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민재 선배님 페어로 활동하고 있는 박지환이에요.”

“그래. 반가워요.”

김 박사는 저번처럼 꽃차를 내어줬다. 민재와 지환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차를 몇 모금 홀짝였다.

“저번에 고민하던 건 결론이 났나?”

김 박사가 먼저 운을 뗐다.

“어느 정도 실마리가 보이네요. 오늘은 도움받을 일이 있어 찾아뵈었어요.”

“뭔데?”

민재는 챙겨온 비합법 가이딩 약품과 센터의 정식 가이딩 물약을 꺼내 들었다. 두 병에는 각각 출처를 기록한 라벨 스티커를 부착해 두었다.

“이 두 약품 성분 비교분석, 가능할까요?”

“가이딩 약품인가?”

“우선 센터 것은요. 그렇습니다.”

김 박사는 두 병을 들어 올려 유리병 안쪽을 살펴보았다. 병을 살짝 흔들어 점성을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한쪽은 어떤 건지 파악할 수가 없어서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민재의 말에 김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민재를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주책맞은 소린데 조금은 기분이 좋네.”

“…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았는데 오늘은 날 믿고 찾아온 거잖아.”

김 박사의 말에 민재는 할 말을 잃었다. 김 박사는 센터 설립 당시 에스퍼에 관한 실험이 일어날 것을 알고, 센터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센터 밖에 있으면서 에스퍼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김 박사가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으면 민재는 다른 방법을 택했을 터였다. 센터 내 약품을 다른 곳에서 분석하게 둔다는 것은 원래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민재는 민망한 마음이 들어 딴청을 피웠다.

“언제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까요?”

김 박사가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었다. 지환은 어른 앞에서 꽤 색다른 모습을 보이는 민재가 신기한지 김 박사와 민재를 힐끔거렸다.

“금방 줄게. 아무래도 이런 건 전파를 타면 안 좋으니까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

김 박사는 집 뒤쪽에 딸린 창고 같은 실험실로 들어갔다.

막상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긴장이 되었다. 만약 두 약품의 성분이 갔다면? 그것은 가이딩 약품을 만들 줄 아는 자가 ‘새희망복지회’에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피곤해요?”

지환의 질문으로 민재는 자신이 찻잔을 너무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환은 민재의 손에서 찻잔을 집어 들어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민재의 얼굴을 턱 붙잡았다. 그러고는 민재의 눈두덩이를 엄지로 누르며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따듯한 찻잔을 들고 있던 덕분인지 뜨뜻한 온도의 감촉이 눈꺼풀 위를 덮었다.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민재는 지환이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김 박사가 다시 민재와 지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꽤 심각한 표정이었으므로 민재는 어느 정도 결과를 짐작했다.

“거의 유사해.”

“거의라는 말은….”

민재가 묻자 김 박사가 성분이 기록된 표를 보여주었다.

“센터 쪽이 몇 가지 성분을 더 포함하고 있어. 근데 그게 일종의 방부제 역할이나 비타민 활성화를 돕는 것들이라 필수 성분인지는 모르겠어.”

“…그게 무슨 의미죠?”

센터에서 여태 쓸데없는 걸 추가해 오고 있었다는 건가? 생각하는 민재에게 김 박사가 다른 답을 주었다.

“뭔가 좀 더 좋은 효과를 내게 하려고 추가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음… 확실하진 않지만 센터 쪽 약물이 더 발전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발전한 버전이라니.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가능성이 점점 신빙성을 높여가고 있었다. 센터 관련자도 아니면서 저 정도로 유사하게 약물을 개발해 내는 인간이 있을까?

“살려줘!”

민재는 귀를 찢어버릴 것 같은 비명이 가득했던 날을 떠올렸다. 눈앞에 보였던 건 피와 깨진 유리 파편들. 터질 것처럼 뜨거워진 몸.

“선배?”

지환이 의아한 듯 민재를 불렀다.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있다. 민재는 날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태연함을 가장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