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민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터는 지환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씻고 나서 죄다 설명해 주겠다고 약속한 지환은 옷깃을 쥐어뜯었던 민재의 손부터 씻기고는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러고 왔어요?”
젖은 머리에 수건을 걸친 지환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민재에게 물었다. 민재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그냥 평범한 회색 파자마였다.
“이게 왜?”
“…잠옷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민재가 쳐다보자 지환은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하더니 수건을 내려놓고는 민재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악몽 꿨어요?”
지환이 물었다. 악몽을 꾼 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지환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민재는 멍하니 있던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건 됐으니까 말해, 이제. 어디 갔다 온 건데.”
이미 대충은 예상이 갔지만, 민재는 지환이 솔직하게 말하는지 보자는 심산이었다.
지환은 잠시 민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추궁하는 것은 민재인데 묘하게 탐색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선은 이걸 좀 보세요.”
지환은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먼지투성이인 옷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민재에게 건넸다. 민재는 지환이 보라고 한 영상을 살펴보았다.
어떤 건물 밖에서 안쪽을 촬영한 것 같았다. 위치 선정이 잘 안 된 건지 처음에는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의 풍경이 보였다.
그것은 민재에게 꽤 익숙한 것이었다. 철제 트레이에 놓인 가위나, 주사기,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용액의 색채까지. 초점이 흔들렸지만, 모두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민재는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자신이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을 지환이 알게 해선 안 되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강지훈이 말했던 곳에 다시 갔었어요. 사람이 직접 와서 전한 것이 아니니까 누군가 가져간 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환은 반신반의하면서 잠복해 있었는데 실제로 사람이 왔다고 했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라는 인상착의 설명을 마친 지환은 그를 따라붙은 과정과, 어떻게 이 영상을 촬영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옷이 저 꼴이 되어 가지고… 건물 외벽이 그렇게 더러운지 몰랐어요.”
민재는 옷 타령이나 하는 지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 오늘 만약 거기서 다치거나 잡히기라도 했으면 어쩔 건데!”
지환은 쏘아붙이는 민재의 얼굴을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내가 안 갔으면 선배가 갔을 거잖아요.”
“뭐?”
“제가 오늘 일을 보고하든 안 하든, 선배는 또 절 뒤에 내버려 두고 혼자 처리하려 할 거잖아요.”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찔린 민재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지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선배, 저도 오늘 일 말 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어요. 선배한테 그냥 밖에 갈 일 있었다고 잡아떼면 되는 거였잖아요.”
지금 이 새끼가 뭐라고 하는 거지? 민재는 황망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럴 수 있는 문제였으나 ‘박지환이 나한테?’ 하는 생각이 치밀었던 것이다.
무의식중 민재는 지환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던지라 은근히 타격이 컸다. 지환은 그런 민재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선배가 입을 다물라고 하면 다물고, 멈추라면 멈출 테니까…. 나한테 숨기는 거 그만 만들면 안 돼요?”
지환의 얼굴에는 초조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민재는 조금 전, 지환이 홀로 위험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지금 지환의 얼굴에 깃든 것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민재는 결코 지환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지환이 이렇게 위험하게 돌아다니는 건 막아야 했다.
“…까마귀 때와는 달라. 더 위험한 상대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섣불리 나서지 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민재의 말에 지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민재는 자신이 우연히 까마귀 교주가 죽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며, 남아 있는 세력이 있어도 이렇게 큰일을 벌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어딘데요? 거기가?”
“나도 몰라.”
지환은 민재의 대답에 잠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잠시 후, 지환은 눈을 내리깔며 한발 물러섰다.
“그럼 이제 알아내는 건 안 숨기고 말해줄 거죠?”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지환은 아주 조금만 자고 일어나 움직이자고 제안했고, 민재는 못 이기는 척 지환의 곁에 몸을 뉘었다.
***
자신의 컴퓨터에서 인터넷 검색 기록이 모두 삭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태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빌려 갈 때는 스스럼없이 가져가더니 뒤늦게 정보를 숨겨야겠다는 판단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박지환 그 자식은 이렇게 티 나게 삭제하면 오히려 수상하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요즘 인터넷에서 애들한테 사기 치는 수법이 유행하나 봐.”
어제 평소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지환은 태현에게 컴퓨터를 빌려달라고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태현은 이유를 물었고, 지환은 뭉뚱그려 말하고는 휙 사라졌다.
그러나 지환의 말과 지워진 기록을 보면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상대가 그 우민재니 꼬리를 잡힐 수도 있다고 예상하긴 했는데.’
인터넷 검색 기록만 지워졌을 뿐, 게임과 커뮤니티에 로그인했던 기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커뮤니티에서 타깃을 찾는 걸 알고 상황 파악을 하려 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 컴퓨터로 로그인한 계정은 실장인 우민재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쪽에서 따로 연락을 취해 올까? 아니면 몸을 사릴까?’
태현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며 대응책을 고심했다. 조용히 넘어가 줄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으니 당분간은 빠릿빠릿한 아들 역할을 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태현은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말씀하세요.]
차분하고 건조한 인상을 주는 목소리였다.
“최근 접촉 시도한 연락처 리스트 다 나한테 전송해.”
[어디 쓸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상대 쪽에서 의문을 표했다. 태현의 입가가 삐딱하게 호선을 그렸다.
“내 말에 토 다는 거야?”
[…아닙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잠깐의 침묵 뒤에 답이 들려왔다. 이 인사는 태현에게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작자였다. 아버지가 태현을 곁에 두는 것에 대해서도 끝까지 반대했다는 이야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현은 일을 시키되, 정보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움직임이 세세히 고해지는 걸 막으려면 주절거리지 않고 싸가지 없게 구는 걸 택해야 했다.
“연구실 이사는 어떻게 됐어. 꼬리 잡히지 않게 조용히 완료했겠지?”
[네. 잘 처리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문제 생기면 다 당신 책임이니까 명심하고.”
[…네.]
다시 잠깐의 텀을 두고 답이 들려왔다. 태현은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곧 있으면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가지러 누나가 올 테니 준비를 해야 했다.
***
“날 만나고 싶어 했다지?”
서연은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김 전무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꾸며냈다. 태현이 통째로 빌려준 레스토랑이라 주변에 사람이 없어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
“이서연 가이드는 센터에서 성실히 지내느라 바깥일은 잘 모르는 걸로 아는데. 무슨 용건이 있어 나를 오라 가라 했지?”
김 전무는 턱살을 구기며 기선제압을 시도했다. 태현에게 부탁할 때 다른 건 알려주지 말고 무조건 이 자리에 나오게만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서연을 이미지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로 알고 왔다면 오히려 유리했다. 저쪽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다는 뜻이니 서연의 손아귀에서 놀다가 사라지면 되는 노릇이었다.
서연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작은 조각을 입에 넣은 서연은 음식을 몇 번 씹고는 할 말을 시작했다.
“제가 필요한 게 있어서요.”
“뭐… 좋은 혼처 자리가 필요한가?”
김 전무가 이죽거렸다. 서연에게 얻을 게 없어 보이니 심심풀이로 희롱이나 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서연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뇨.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전 금성과 나누었던 금융거래 기록을 넘겨받고 싶네요.”
“뭐?”
서연의 말에 김 전무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왕이면 판매한 신무기가 어디로 얼마나 흘러 들어갔는지도 좀 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값을 좀 받으려면 외국이 좋았겠죠?”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지금 실수하는 거야.”
김 전무의 표정이 굳었다. 서연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김 전무님이야말로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뭐….”
“금성에 뿌리를 박고 계시면서 우리 아버지 쪽에 줄을 대셨잖아요? 우리 쪽이야 뭐 투자를 해주신다니 환영이지만 금성 이사들 쪽에선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원래 이어져 있던 센터도 그렇고요.”
이어진 서연의 말에 김 전무는 얼굴을 찌그러뜨리더니 앞에 놓여 있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쪽 아버지가 주관하고 있는 거고, 투자를 하겠다는 데 대뜸 와서 이렇게 협박질이나 하는 이유가 뭐야.”
“글쎄요. 그건 제가 말씀드릴 이유가 없죠. 그러게 분산투자를 하시더라도 잘하시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서연의 말에 김 전무는 이를 갈았다.
“난 금성에 청춘을 바친 사람이야. 그럼 자네 아버지가 ‘테스트’까지 마치고 사업성이 보장된 제품을 개발한다는데, 관심을 어떻게 안 가지나? 센터는 그런 절차가 현재 없으니까 추후 계약에 보완을….”
“그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변명처럼 주저리주저리 내뱉던 김 전무는 서연의 지적에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는 어느 쪽으로든 정보를 넘길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금성과 신경준 의원 둘 다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저걸 저렇게 쉽게 털어놓다니.
저런 대가리가 대기업 전무씩이나 되는 자리를 꿰찬 것이 신기할 지경이라고 서연은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나 혼자 죽을 것 같아?”
김 전무가 눈을 빛내며 서연을 노려보았다. 서연은 냅킨을 집어 입가를 가볍게 닦은 뒤 김 전무를 마주 보았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니 저도 정보를 하나 드릴게요.”
“…….”
“저는 분산투자에 능한 편이라서요. 적어도 한쪽 목줄은 꽉 잡고 있습니다. 만약 저를 배신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단단히 손해를 보시게 될 거예요.”
부드럽게 울리던 서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바뀌었다. 김 전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하면 된 것 같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주 내로 제가 요구한 게 도착하지 않으면 협상 결렬로 알고 움직이겠습니다. …그럼.”
서연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김 전무는 기가 완전히 죽은 것인지 서연의 눈을 피했다.
레스토랑을 벗어나자마자 웃고 있던 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쉬운 승리를 쟁취해 냈음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금 전 김 전무가 언급했던 ‘테스트’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늘의 만남을 통해 확신했다. 최근 센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신경준 의원과 연관이 있는 게 맞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서연은 불길한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며 센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