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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민재와 함께 찾았던 낡은 집 바로 옆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환은 얼마 전 구입한 검은색 가발과 안경을 착용하고 후드 집업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환은 민재가 강지훈의 거취를 정하는 틈을 타 회의실 밖으로 나와 잠행을 준비했다. 약품을 가져다 놓은 자가 있으면, 그걸 타깃이 가져갔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환은 부러 머리칼을 앞으로 내려 덥수룩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가리는 건 얼마 전 정승규를 추적할 때 민재에게 배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덥수룩한 앞머리가 잘 적응되지 않았으나 적응하고 나니 점점 마음에 들었다.
정승규 건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민재는 혼자 모든 걸 안고 가려고 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페어인 지환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근의 민재는 이전과 달리 지환을 배제하진 않았다. 실제로 1팀 팀원들 중에선 지환이 민재와 가장 자주 붙어 있는 편이었다. 임무에 나갈 때도 지환과 함께 가는 것을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 여겨주는 것 같았다.
민재는 지환이 정체 모를 약을 그 대신 먹겠다고 하자 충격받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런 얼굴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선배는 알까. 지환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환은 민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무작정 와서 대기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근처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가만히 대기하는 동안 이 근방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지환은 새롭게 나타난 인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작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환은 더더욱 숨을 죽이고 몸을 띄워 골목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살짝 고개를 내밀면 예의 약품을 찾았던 낡은 철문이 보이는 곳이었다.
지환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정면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핸드폰의 끄트머리만 골목 밖으로 나가게끔 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잠시 후, 화면 안으로 평범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살짝 후덕한 얼굴에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가? 지환이 생각하는 찰나 그 남자가 붉은 철문 앞에 섰다. 지환은 조용히 숨을 멈추었다.
남자는 옆쪽을 슬쩍 살피는 듯하더니 자연스럽게 자물쇠를 열었다. 그러고는 대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혹시 강지훈과 같은 입장인가? 자식이 발현 예정자라든가. 그렇다면 약품이 없으니 나올 때 표정이 좋지 않을 터였다.
잠시 기다리니 남자가 나왔다. 남자의 표정은 어떤 쪽인지 알 수 없으나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자물쇠로 문을 다시 걸어 잠그고는 핸드폰에 무언가를 입력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다시 태연하게 걸어갔다.
화면 안에서 남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지환은 조심스럽게 남자가 향하는 방향을 확인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 있던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뭘 찾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환이 예상한 대로 약물을 누군가 가져갔는지 확인하러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환은 고민하다가 높이 날아올랐다. 애매한 위치에서 뒤따르면 발각되기가 더 쉬울 것 같았다.
지환은 남자의 대각선 뒤쪽에서 길을 따라가며 대강의 경로를 외우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남자는 주택가를 벗어나 조금 더 걸었다. 그러고는 한 건물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환은 건물 옆쪽에서 빠르게 하강한 다음 남자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남자는 엘리베이터에 이미 탑승한 것인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었다.
지환은 조심스레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환은 다시 엘리베이터 쪽을 보며 층을 확인했다. 남자는 5층에 내렸다.
지환은 엘리베이터를 따라 타지 않고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건물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채로 다시 날아올라 상가 건물을 빙 둘러 비행했다.
밖에서 본 건물은 평범한 상가 건물처럼 보였지만 벽면에 간판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상복합 같은 주거 공간이라기엔 층수가 너무 애매했다. 이 건물은 6층이 전부였다.
5층은 모든 창문이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현재 그 건물에선 5층만 불이 켜져 있는 상황이었다.
지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따금 한두 명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긴 하지만 조용했다. 밤 시간대엔 특히나 조용한 곳 같았다.
지환은 창문이 나 있지 않은 건물 벽에 몸을 붙이다시피 했다. 5층과 6층 사이의 지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핸드폰 렌즈를 창문 쪽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화면이 잡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환은 공중에서 물구나무서듯이 한 다음 옆으로 조금씩 움직여야 했다.
어느 정도 내부를 촬영한 다음, 지환은 얻은 것이 있는지 보기 위해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내부의 광경들을 목격했다.
여러 개의 침대와 커튼, 그리고 철제 트레이. 그 위에 놓인 주사기들까지. 지환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
“헉!”
민재는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눈을 떴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꿈속에서 계속 목이 졸려서 그런지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가웠다.
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최근에는 지환과 계속 같이 잠을 잤던 터라 악몽을 꾸더라도 지환이 살짝 깨워주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 혼자였다.
예의 약품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성질을 냈던 것 때문인지 지환은 민재가 강지훈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모르는 노트북도 그대로 두고 가는 바람에 회의실에 남아 기다리던 민재가 방으로 가지고 와야 했다.
민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지환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뭐지? 무슨 일이 있나? 민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새벽 시간이라 조금 미안하긴 했으나 지환의 방에 있는 수면용 향초라도 빌릴까 싶었다. 지환의 숙소 문 앞에 선 민재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려 보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민재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역시 조용했다.
이 정도 소리면 박지환은 이미 일어났어야 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스터키를 꺼내 들었다.
“박지환. 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지환을 불렀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민재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침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베개 쪽을 손으로 짚자 살짝 서늘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민재는 곧바로 방 불을 켜보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간 거지? 민재는 당황했다.
그냥 향초만 가지고 나갈까. 잠시 고민하던 민재는 그대로 지환의 숙소를 나와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따금 지환이 새벽에 혼자 훈련장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훈련장에도 지환은 없었다.
어둡고 적막한 훈련장은 사람이 없는 걸 좋아하는 민재에게 익숙한 공간이었으나 어쩐지 좀 스산하게 느껴졌다.
이 새끼 어디로 간 거야? 민재는 혹시나 싶어 로비나 센터 뒤쪽 통로 쪽으로도 가보았으나 여전히 지환을 찾을 수 없었다.
“제발 좀!”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듯 아무 데나 뛰어들고, 아무거나 먹고 그러지 마요.”
다시 지환의 숙소로 와 빈방을 마주한 민재의 머릿속에 지환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짓씹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지 않냐며 민재에게 화를 내다가 돌연 태도를 바꾸지 않았나.
혹시 도망쳤나? 생각한 민재는 곧바로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 접어두었다.
박지환은 아무리 민재가 싫은 짓을 했다고 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센터에서 도망칠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보란 듯이 해내겠다며 열의에 불타서는 사건을 해결하려고….
거기까지 생각한 민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자신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박지환은 강지훈을 유인한 배후를 찾으러 그 몰래 나간 것이다. 민재는 입술을 짓씹었다.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르는 것이 충격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민재는 새희망복지가 단순히 악질적인 장난을 치려는 단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토록 규모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이런 일에는 몸을 사리면서 조심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혹시나 박지환이 혼자 나섰다가 그쪽에 발각이라도 된다면? 오늘 얻은 단서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지환이 무사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민재는 대규모 테러를 꾸미는 곳들이 에스퍼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민재는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속이 메스꺼웠다.
박지환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아마도 오늘 약품을 발견한 장소에 잠복했을 것이다. 민재는 빠르게 현관문 앞으로 다가섰다. 정말 그곳에 박지환이 있으면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없으면? 발각되어 끌려갔거나 추적하기 힘든 곳으로 이동했으면?
민재는 초조해졌다. 구조팀을 꾸려서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재가 연락망을 뒤지며 소집할 인원을 추리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디서 구르다 온 것인지 전신에 검은 때를 묻힌 지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왜 불이… 어? 선배?”
지환은 자신의 숙소 현관 앞에서 덜덜 떨며 서 있는 민재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 이 개자식아!”
민재는 튀어 오르듯 몸을 날려 지환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열이 확 올랐다가 식는 기분이었다. 분노와 안도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알겠어요, 선배. 저 지금 좀 더러운데… 옷에 뭐가 묻어서요.”
뭘 알겠다는 건지. 이 상황에 한가하게 옷 타령이나 하고 있는 지환을 보면서 민재는 자신이 그답지 않게 유독 불안해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민재는 깨달았다. 자신이 박지환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마음을 마주한 민재는 아찔한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여전히 옷깃을 틀어잡은 채였지만 멍청한 박지환은 멱살을 잡힌 채로 잠자코 현관에 서 있었다. 민재가 놓아줄 때까지 그러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