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민재는 지환과 근처 골목을 빠르게 뒤져보았지만 255라는 숫자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167로 시작하는 주소를 가진 집은 몇몇 있었으나 강지훈이 말한 숫자에 부합하는 주소를 가진 곳은 없었다.
“혹시 주소가 아니라 암호 같은 건가?”
민재의 말에 지환은 고민하는 듯 비행을 멈추었다. 늘 그렇듯 민재를 안아 든 채였다. 그 상태로 잠시 대기하던 두 사람은 옆 골목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자 재빠르게 다른 길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평범한 복장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근방에 사는 주민인 것 같았다.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변장을 한 게 아닐까 의심스럽긴 했으나,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지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이제 어쩌죠?”
지환이 말했다.
“혹시 끝자리가 2인 주소 있었어?”
지환은 곧바로 끝자리가 2로 끝나는 주소를 찾아냈다. 붉은 철문은 칠이 벗겨져 꽤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문을 따라 꽤 낮은 담장이 이어졌고, 그 옆은 5로 끝나는 주소를 가진 문이 있었다.
2 옆에 5라.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공교로웠다.
민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지환이 주위를 다시 살피더니 좀 더 위쪽으로 몸을 띄웠다. 그 덕에 민재는 좀 더 편안하게 담장 안쪽을 살펴볼 수 있었다.
“…폐가 같지 않아요?”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담장 안쪽에는 집인지 창고인지 모르겠으나 작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마당에는 시멘트 바닥이 깨진 곳이 꽤 많았는데, 그 사이에서 자라난 잡초들이 무릎까진 올라올 것 같았다.
“잠시만. 문 앞에 내려봐.”
민재의 말에 지환이 곧바로 붉은 문 앞에 착지했다. 사실 지환에게 담장을 넘어가자고 하면 편했겠지만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민재는 지환에게서 뛰어내려 낡은 철문을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집었다. 낡은 철문과 어울리지 않는 새것이었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세 자리의 숫자를 맞추면 되는 자물쇠였다.
그는 지환과 눈을 맞추었다. 안쪽에 강지훈을 불러낸 범인들이 잠복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장소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민재는 다이얼을 255로 돌리고 자물쇠를 해제했다. 자물쇠는 너무 쉽게 풀렸다. 실제 주소를 바로 노출하면 위험도가 크고, 너무 어려운 암호라면 쉽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암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 열까요?”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동시에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잡초들을 지나 잘못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낡은 문 앞에 섰다. 작고 좁은 미닫이문이었는데 이런 집을 어디서 구해낸 건지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민재가 손을 뻗자 지환이 그 손을 붙들었다.
“제가 열게요.”
지환은 곧바로 다른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상체만 문 안쪽으로 넣어 안쪽을 살폈다. 지환이 상체를 넣자 문이 거의 꽉 차는 것 같았다.
“선배.”
안쪽 공간이 좁은지 살짝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지환의 등을 손으로 살짝 짚었다.
“뭐가 있어?”
지환은 이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뒤쪽으로 몸을 뺐다. 그의 손에는 작은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안은 텅 비어 있고 이거 하나만 있었어요.”
이렇게 덩그러니 뒀다고? 이런 좁은 골목에선 의심받을 일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놔둔 건가? 이상해 보였지만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민재는 지환이 들고 있는 구급상자를 열어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지환이 다시 또 그 손을 붙잡았다.
“여기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덥석 열어요? 함정이면 어쩌려고요?”
지환이 정색하며 물었다. 민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고는 휙 몸을 돌리더니 몇 발짝 떨어져서 상자를 열었다.
“야, 너….”
“있어요. 약품.”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민재 쪽으로 지환이 다시 몸을 돌렸다.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상자 속에는 정말 가이딩 물약으로 보이는 것이 3병 있었다. 약품을 담은 병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만한 공병이었지만, 유리병 안 약품의 색은 센터에서 지급하는 가이딩 물약과 동일했다.
물론 색이 동일하다고 해서 같은 약품이라는 법은 없었다. 민재는 지환에게서 병을 받아 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자 자양강장제에서 맡아질 법한 향이 났다. 이것도 센터의 것과 유사했다. 맛도 동일할까?
민재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지환이 병을 든 민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 덕에 지환의 손에 파란색 약물이 왈칵 넘쳤다.
“미쳤어요?”
지환은 굳은 얼굴로 민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재에게서 병을 완전히 뺏어 든 지환은 뚜껑을 닫고는 다시 구급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먹어보려고 한 거잖아요, 지금.”
“…그게 제일 빠르니까.”
살짝 맛을 봐서 확인하는 방법이 제일 간단하고 빠른 길이었다. 성분 분석을 하려면 지금 상황에선 조 박사에게 가져가야 하는데, 그 찝찝한 작자에게 또 다른 빚을 지고 싶진 않았다.
“제발 좀!”
민재의 말에 지환이 짓씹듯이 소리를 뱉었다. 무언가 참는 듯 이를 악물던 그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듯 아무 데나 뛰어들고, 아무거나 먹고 그러지 마요.”
저더러 대신 마셔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지환은 끔찍한 소릴 들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민재는 순간 멍해졌다. 지환이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먹어야 하면 내가 먹을게요. 무슨 문제 생기면 선배가 힐 써주면 되잖아요.”
“아니 누가 너더러 먹으라고….”
“일단 센터 복귀해요. 이거 제가 잘 챙길게요.”
지환은 민재의 말을 잘라먹더니 그를 휙 안아 들었다.
“야!”
“큰 소리 내지 마세요. 사람들이 수상하다고 생각하겠어요.”
민재가 화를 내자 은근히 협박까지 했다. 민재는 분노에 떨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민재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강지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지훈은 민재의 뒤편을 볼 때마다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가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민재의 뒤에는 호영과 지환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까 이야기하던 거 마저 해봐.”
민재는 다시 한번 친절하게 물어줬다. 그러나 강지훈은 ‘그러니까’, ‘그게’와 같은 말만 뱉고는 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야. 너 왜 이야길 안 하는 거야? 너한테 약물 주겠다고 한 놈한테 의리라도 있는 거야?”
“…그게요.”
강지훈은 다시 눈치만 살폈다. 진짜 대가리가 좀 멍청한가. 민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압하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 약품, 독극물이야. 너 같이 순진한 애들 꼬여내서 죽이려고 한 거라고.”
“미친. 진짜요?”
민재의 말에 강지훈은 눈을 크게 뜨며 격하게 반응했다. 그러더니 혼자 한탄을 했다.
“아. 어쩐지.”
“뭐가 어쩐지야. 어떻게 아는 놈인데 널 죽이려고 해?”
부러 너를 노린 것이라고 강조하자 강지훈이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인터넷에서 만난 새끼 믿으면 안 되는 건데….”
인터넷? 민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그럼 저 말고도 이렇게 당한 애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강지훈은 발끈하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빨리 이야기해야 걔네를 찾을 수 있겠지?”
민재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강지훈은 흠칫하더니 이내 어물어물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지훈이 이 정보를 알게 된 것은 그가 하던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에서였다. 10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게임의 공략법을 나누는 커뮤니티라고 했다.
그곳에 ‘발현했는데 센터 안 가는 법.’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고, 반응이 꽤 뜨거웠다는 것이다.
그 글의 게시자는 자신도 발현 예정자라며, 자신이 경험한 일을 알려주겠다고 게시글을 적었다 했다.
글에는 게시자가 우연히 알게 된 정보로 ‘새희망복지회’라는 곳에 연락을 넣었고, 정말로 센터에 안 가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발현 예정자가 되면 국가랑 센터에서 쥐꼬리만 한 가이딩 약품을 준다는데, 게시자는 그 ‘새희망복지회’인지 뭔지에서 엄청 많은 양의 가이딩 물약을 받았대요.”
게다가 예의 ‘새희망복지회’ 단체에서는 발현된 게시자를 복지관으로 데려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하며, 그 덕분에 게시자는 본인이 지금 꿀 빨면서 지내고 있다고 게시글을 적었다는 모양이다.
심지어 그곳에서 개발한 ‘신제품’은 센터의 가이딩 약품보다 질이 좋다는 얘기까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 게시글은 올라온 지 한 시간 만에 삭제되었다고 강지훈은 덧붙였다.
센터에서 지급하는 소량의 가이딩 약품은 말 그대로 당장 폭주하지 않게 막아줄 정도의 양이라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또한 폭주 증상이 아니면 몸에 가이딩이 얼마나 차 있는지 세밀하게 느끼는 건 어려웠다. 그러니 센터에선 스스로 몸 상태를 체크하게끔 손목에 칩을 삽입하는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해 보면 게시글에 적힌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꽤나 자극적인 내용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센터 오면 그냥 인생 종 친다고 그러던데. 근데 그 이야기는 학교 애들도 다 알아요.”
그 게시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센터에 관한 소문이 발현 예정인 10대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게시글에 적혀 있었는데, 히어로 센터에서 발현 예정자한테 가이딩 약을 조금밖에 안 주는 건 에스퍼들이 죽지 않으려고 얌전히 잡혀 와 노예로 살게 하기 위해서래요. 센터에 끌려가면 죽는 게 나은 생활만 한다고도 그랬어요.”
특히 유명한 우민재는 능력이 힐이라 사람 토막 내고 다시 붙여주는 걸 즐긴다더라 하는 대목에서 민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기 댓글 진짜 많이 달렸기에 저는 바로 쪽지 넣었거든요.”
강지훈은 그 말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제 딴에는 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게시글의 내용은 언뜻 듣기에는 허황된 소리 같았지만 묘하게 센터의 현황과 맞닿는 지점들을 꼬집고 있었다. 민재는 그 점이 신경 쓰였다.
이걸 그냥 악질적인 장난이나 개인의 테러 같은 것으로 보는 게 맞나? 민재는 생각해 보았으나 이게 일부분일 뿐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장난이라기엔 오늘 약품을 발견한 장소가 석연치 않았다. 허술하다고 하기에는 약품을 가져다 놓은 존재를 짐작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감추어두지 않았나.
“증거.”
“네?”
“내가 네 말이 진짠지 어떻게 알아.”
민재가 말하자 강지훈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낸 쪽지 보여주면 될 거 아니에요. 게임 아이디로 그 커뮤니티만 들어가면 바로 보여드릴 수 있어요.”
민재는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뒤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컴퓨터 가져올게요.”
지환의 목소리였다. 그는 빠른 속도로 노트북을 가져와 강지훈에게 내밀었다. 심지어 해당 게임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해당 커뮤니티는 새 기기로 로그인을 시도할 경우 게임에서 인증을 받아야 했으므로 로그인을 하려면 게임이 깔려 있어야 했다.
그 짧은 시간에 게임을 깐 건가? 민재는 의아해하며 지환을 쳐다보았다.
“행정실에서 가져온 거 아니야?”
“빌렸어요. 잠시.”
민재가 묻자 지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근데요… 그 사람한테서 온 쪽지만 보여드려도 돼요?”
“안 돼.”
로그인을 한 강지훈은 또 뜬금없이 딴소리를 해댔다. 인내심이 바닥난 민재는 마우스를 빼앗아 쪽지 목록을 확인했다.
강지훈은 자신이 발현 예정자인데, 아프신 엄마를 두고 센터를 갈 생각을 하니 큰일이라고 적어놓았다. 민재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진짜야?”
“…아뇨.”
민망한 듯 웃는 강지훈을 보며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이래서 보여주기 싫다고 했나 보군.
민재는 곧바로 익명의 존재로부터 온 쪽지를 열었다. 그 쪽지엔 민재와 지환이 갔었던 곳의 주소와 하나의 단어만이 적혀 있었다.
-새희망복지회.
새로운 희망이라. 민재는 단어의 본래 뜻과 달리 불길하게 느껴지는 글자들을 계속해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