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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93)화 (9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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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난감한 얼굴의 호영과 눈물범벅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주 에스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환과 함께 날아와 보니 이 꼴이었다.

골목 초입에서부터 에스퍼가 목 놓아 울면서 욕을 해대고 있었다. 호영은 민재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붙잡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울더라고요.”

그렇겠지.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많은 사람이 우르르 날아와 자신의 앞에 서니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인지, 시끄럽게 굴던 에스퍼가 입을 다물고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슬쩍 살펴보니 볼 쪽에 생채기도 나 있었다.

민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의아한 표정으로 민재를 마주 보았다.

몸싸움이 있었던 모양인데. 다시 봐도 지환은 멀쩡해 보였다.

급박한 상황이었으니 폭주 진행만 막아도 잘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저 정도 생채기만 내고 제압했다니 민재는 조금 놀랐다.

“가이딩 좀 부탁해.”

민재가 서연에게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스퍼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민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에스퍼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에스퍼는 화를 내거나 폭력적인 행동도 딱히 보이지 않고 얌전히 가이딩을 받았다.

앳된 얼굴을 보니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민재는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는 에스퍼에게 말을 걸었다.

“몇 살이야?”

“…고2요.”

“야, 너 조금 전까진 반말 엄청 잘하더니.”

에스퍼가 대답하자 호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발현 시기가 조금 늦은 편이지만 어리긴 어렸다. 센터에서 생활하다가 도망친 것과는 다르니 민재는 태도를 살짝 유하게 바꿨다.

“이름은?”

“강지훈이요.”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이 없자 민재를 보고 있던 에스퍼는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저 어떻게 돼요…?”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간도 크게 왜 도주를 했대. 민재는 몸을 숙여 지훈과 눈을 맞췄다.

“뭐 네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네?”

“왜 도망친 건데?”

민재의 질문에 강지훈은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운지 눈치만 봤다. 잠깐의 침묵 후 그는 꽤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센터에 가기 싫어서요….”

매우 솔직한 답이었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센터에 가고 싶어서 도망치는 새끼도 있나.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닌가. 민재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질문했다.

“센터가 오기 싫다고 안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그럼 도망쳐서 뭘 하려고 했어?”

“뭘… 해요?”

강지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럼 목적도 없이, 싫다고 무작정 도망쳤다는 건가? 민재는 눈앞에 있는 어린 에스퍼의 순진함에 당황했다.

왠지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때의 지환 같은 느낌이라고 민재는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니 민재는 심란해졌다.

지환처럼 영웅 같은 존재가 되는 걸 동경하는 애들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살다가 한순간에 갑자기 센터에 인생을 저당 잡히는 걸 끔찍해하는 애들도 있었다.

민재는 문득 정승규를 떠올렸다. 그는 술을 먹으면 노래를 불렀다. 횟수가 많진 않지만 몇 번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마다 들었다.

꽤 괜찮은 음색이었는데, 그는 어릴 땐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가끔 부르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심란해졌다고 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덮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재는 살짝 달래듯이 한 번 더 물었다.

“그냥 싫어서 도망친 거라고?”

“…네.”

강지훈은 무언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그 잠시의 침묵으로 민재는 그가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대책 없이 그냥 도망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방금 한 말 기억하지? 너는 이제 센터 소속이 되어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될 거야. 지금 네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내 결정이 달라져.”

“결정이요?”

“발현을 했는데 구조 가이드를 다치게 하고, 센터에 소속되는 것에 반항했으니까….”

민재가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뭉뚱그려 말하면 상대는 알아서 최악을 가정해 상상하고, 겁을 먹게 되기 마련이었다.

역시나 강지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저 진짜 뭐 이상한 짓 저지르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누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센터 안 들어가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해서….”

센터에 들어가지 않고 자유롭게 살게 해준다고? 순간 민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디서 그걸 들었는데? 누구한테?”

민재가 묻자 강지훈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때 강지훈을 가이딩하고 있던 서연이 말했다.

“이제 슬슬 다 된 것 같아요.”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길거리에서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센터로 데리고 돌아가야 했다.

민재는 출발 전 강지훈의 얼굴에 있는 생채기를 좀 치료해 두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갑자기 강지훈이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 근처에 있는 데로 가면 가이딩 약품을 추가로 준다고 했어요. 누군지는 진짜 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저 토막 내지 마세요!!”

빠른 속도로 내뱉는 말에는 쓸모 있는 정보와 어이없는 소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연의 다 되었다는 말을 오해해서 겁을 먹은 것 같긴 했으나, ‘토막 낸다’는 표현을 구체적으로 내뱉은 건 이상했다.

민재는 손을 뒤쪽으로 물렸다.

“토막을 낸다고?”

“…네. 기분 나쁘면 그런다면서요.”

“누가?”

“…그쪽 우민재 아니에요?”

“실장님이라고 불러.”

강지훈이 민재의 이름을 부르자 지환이 빠르게 호칭을 정리했다. 민재는 호칭은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당혹감에 빠졌다.

‘내가… 기분 나쁘면 토막을 낸다고? 사람을?’

자신에 관해 이런저런 소문이 돌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졌던 민재는 소문에 대한 것은 좀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 가이딩 약품 준다던 사람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강지훈은 자신이 도망치던 주택가 내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167-255. 그의 말에 따르면 강지훈은 오늘 그곳에 가던 길에 갑자기 발현했고, 센터에 끌려가기 전에 그 장소로 가려고 도주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럼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호영이 말했다.

“접견 시간 같은 건 안내받았어?”

“아뇨. 장소만….”

민재의 질문에 강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장소만 알려줬다면, 어쩌면 나오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럼 약품은 어떻게 전달하려고 한 거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찾아가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민재는 호영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여전히 강지훈을 잡고 있던 호영은 그를 곁에 있던 다른 비행 에스퍼에게 부탁하고는 민재에게 다가섰다. 강지훈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 민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쟤 센터 데려가서 검사시키고, 칩 넣은 다음에 곧바로 어디 구석진 회의실 잡아서 둘이 같이 있어. 허튼짓 못 하게. 그동안 난 쟤가 말한 장소에 다녀올게.”

“…선배님, 저도 선배님이랑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민재의 말에 호영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평소의 호영이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너라면 마음 편히 맡길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건데. 왜? 무슨 일 있어?”

민재가 되묻자 호영은 잠시 옆쪽을 힐긋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환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뇨. 없습니다. 센터 복귀할게요.”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한 호영은 다시 강지훈 쪽으로 걸어갔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 민재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정작 지환은 별생각이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지금 상황에 호영에게 꼬치꼬치 캐묻기가 애매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여러모로 이상하네. 민재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선배님 167번 길 쪽은 저쪽 같아요.”

언제 살펴본 것인지 지환이 민재의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166이라는 숫자가 보이는 걸 보니 근처인 모양이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서연은 민재와 지환이 사라진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다고 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영 불안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처음 에스퍼를 놓쳤을 때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스퍼를 잡아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불안함이 생겼다.

누군가 센터를 벗어나게 해준다고 했다는 것과, 약품을 준비했다는 것이 그랬다.

혹시 신경준 의원이…? 하는 의심이 생긴 순간부터 서연은 최대한 침착하게 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시중의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불법 가이딩 약품이 판매되긴 했다. 그러나 엇비슷한 효과라도 낼 수 있는 걸 만들어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우민재 실장이 찾아내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론이 날 것이다.

만약 그 약물이 아무런 효과도 없다면? 그 약품만 믿고 찾아온 에스퍼가 폭주해서 큰 피해로 번졌을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부러 이런 주택가를 약속 장소로 잡은 것마저도 너무나 악질적이었다.

그러나 효과가 있다면 가이딩 약품을 개발해 낼 만큼의 자본과 인력이 있는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은 이 나라에 많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본거지를 찾아내 없애고 싶었지만, 혹시 신경준 의원이 얽혀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소극적으로 발언할 수밖에 없었다. 분한 마음에 서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

지금이라도 몰래 따라붙을까? 볼일이 있다고 빠지면 안 되려나. 고민을 하는 서연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가시죠, 가이드님.”

자신과 센터에서 함께 출발했던 에스퍼였다.

출발할 때는 자신이 발현 현장 경력이 얼마니 자신만 믿으면 된다느니 하는 허풍이나 떨더니, 쥐뿔 아무것도 못 하는 새끼였다.

정작 에스퍼가 서연을 밀치고 도망치자 당황해서는 멀뚱히 쳐다보다가, 그녀가 쫓으라고 말을 하고 나서야 부리나케 쫓지 않았나.

“발현 에스퍼는 가이딩이 불안정하니 제가 도우면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웃는 얼굴이었지만 싸늘한 목소리였다. 서연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호영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는 뒤치다꺼리나….”

호영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평소 부드럽게 웃고 다니는 인상과 꽤 다른 느낌의 말투였다.

서연은 못 들은 척을 하기 위해 부러 발소리를 내 기척을 알렸다. 그러자 살짝 놀란 듯 호영이 빠르게 서연 쪽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복귀 중에 발현 에스퍼의 가이딩이 부족해질 수도 있으니, 호영 에스퍼님이랑 같이 복귀해도 될까요?”

“아, 네!”

호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모습과 달리 평소처럼 온순하고 착한 이미지였다.

“감사합니다. 센터에서 제일 실력 좋으신 비행 에스퍼시니까 안심이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서연은 은근슬쩍 호영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호영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1팀끼리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나 보네. 마음속에 작은 확신을 얻으며 서연은 마주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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