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92)화 (93/181)

092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짚고는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 에스퍼 쪽을 가리켰다.

“저리로 잠시만 가봐.”

다가가는 지환과 민재를 확인한 에스퍼는 마주 날아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상대 에스퍼는 도망자를 놓친 걸 문책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냅다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민재는 지금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인상착의.”

민재의 짧은 말에 잠시 당황하던 에스퍼는 빠르게 보고를 시작했다.

“아, 회색 후드티에 청바지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은색 파마머리예요. 길이는 그렇게 길지 않고 관자놀이까지 오는 정도였습니다.”

정말 흔하기 그지없는 외양이었다.

“방향은?”

“처음엔 주택가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가기에 쫓다가… 놓친 뒤로는 입구 근방에서 살피고 있었어요.”

“그럼 아직 주택가에 있다는 거야?”

“그게….”

에스퍼는 쩔쩔매는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보았다. 잘 모르겠다는 거군.

“일단 여기서 계속 망 좀 봐.”

에스퍼에게 남아 있으라고 지시한 민재는 지환에게 하강하자고 말했다.

“저 아래 서 있는 두 명 보이지? 저리로 내려가자.”

“네.”

짧게 대답한 지환은 꽤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그리고 땅에 닿기 직전 속도를 늦춰 가볍게 착지했다. 비행 훈련을 한 성과가 있는지 대담한 움직임이었다.

“오셨어요?”

서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민재를 맞이했다. 옆에 있던 가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지환은 서연을 알아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민재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부상자 있어?”

서연 옆의 가이드는 멀쩡해 보였으나 서연은 왼팔로 오른쪽 팔을 붙들고 있었다. 민재는 서연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너 팔 들어봐.”

“저 괜찮아요. 우선은 에스퍼부터….”

서연이 뒷걸음질을 치며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때 민재와 지환 옆으로 호영이 하강해 착지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안녕하세요.”

호영이 민재와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환이 마주 인사를 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호영은 주위를 살피다가 서연을 알아본 것인지 어? 하고 의아함을 표했다.

호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민재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회색 후드티에 청바지. 검은색 파마머리. 아직 이 주택가를 다 벗어났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니까 5분 내로 찾아.”

“네? 그렇게 빨리요?”

호영이 당황한 듯 민재를 쳐다보았다.

“어. 너희 가이딩 물약 있어?”

“네.”

“몇 개?”

“두 개요.”

“다섯 개요.”

민재의 질문에 호영은 두 개, 지환은 다섯 개가 있다고 말했다. 민재는 지환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한 개 줘.”

지환이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물약을 꺼내 민재에게 건넸다. 민재는 그것을 그대로 호영에게 내밀었다.

민재가 물약을 건네주는 것을 보자 지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저래? 자기 거 뺏겼다 싶은 건가? 민재는 지환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발견해서 제압하면 세 개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어. 안 처먹는다 하면 때려서라도 먹여. 안 그럼 터져.”

터진다는 말에 호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당황스러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급해서 이것저것 다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출발.”

“선배는요?”

민재가 출발을 지시하자 지환이 물었다.

“난 여기서 대기할 거야. 잡아서 물약 쑤셔 넣었으면 전화해. 그리로 갈 테니까.”

“네.”

지환보다 빠르게 대답한 호영이 먼저 위로 튀어 올랐다. 지환은 민재 쪽으로 걸어와 물약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좀 전에 왜 인상을 쓰나 했더니 물약을 민재 본인이 마시려는 건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급하게 나오느라 민재는 오늘 여분의 가이딩 약품을 가져오지 않았다. 옆에 멀쩡한 가이드가 둘이나 있었지만 민재는 말없이 지환이 내민 물약을 받아 들었다.

“어? 저기!”

그때 위에서 망을 보던 에스퍼가 민재의 뒤편 저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호영과 지환이 빠르게 그리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둘이 멀어지는 것을 본 민재는 서연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팔 못 들겠어?”

“괜찮아요. …아!”

민재가 팔을 살짝 잡자 서연이 아픈 듯 신음을 흘렸다. 한숨을 내쉰 민재는 주저 없이 그녀의 팔에 힐을 사용했다.

“그냥 어딜 다쳤다고 바로 말하면 더 효율적이겠지?”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아요.”

민재가 미소를 지으며 타박하는 말을 하자 서연이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민재는 서연이 팔을 돌릴 수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놓아주었다.

“넌.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옆에서 걱정스레 서연을 바라보던 가이드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민재는 한시름 놓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찾을 수 있을까요?”

가이드가 물었다.

“쟤네 실력 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가이드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한 민재는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오 분에서 일 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

지환은 자신보다 앞서 날고 있는 호영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더 앞에는 빠른 속도로 점프해 골목을 달리고 있는 에스퍼가 있었다.

뒤에서 날아서 쫓아오는 지환과 호영을 발견한 에스퍼는 욕이 섞인 비명을 마구 지르더니 염력을 사용해 주변에 굴러다니던 쓰레기봉투를 뒤쪽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아! 던지지 마세요!”

아슬아슬하게 쓰레기봉투를 피한 호영이 짜증을 냈다. 허공에 쓰레기가 휙휙 날리는 데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터지는 것도 있어 상당히 더러운 광경이었다.

지환도 자신의 근처로 날아온 종이 상자를 피한 다음 몸을 쭉 뻗어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도망치던 에스퍼가 우측으로 휙 방향을 꺾었다. 다리와 바닥 사이에 염력을 발생시켜 순간적으로 속력을 급증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법을 그새 터득한 모양이었다.

방향을 잡고 쫓던 지환과 호영은 허공에서 방향을 급히 틀다가 부딪혔다. 그때 호영이 팔로 지환을 밀쳤고, 지환은 뒤쪽으로 밀려났다.

“조심해서 다녀. 제대로 못 할 거면 뒤로 빠지든가.”

호영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며 지환을 노려보았다. 지환도 지지 않고 호영을 노려보았다.

지환은 오늘 문자를 받자마자 호영부터 호출하는 민재를 본 순간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민재가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저였으면 하고 바랐다.

지환은 혹시 민재가 아직 자신을 못 미더운 에스퍼로 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평소라면 호영의 날 선 태도에 반응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저도 모르게 호영의 말을 받아쳤다.

“선배님이야말로 조심하세요. 방향 조절하다가 같은 팀 밀치지 마시고요.”

지환의 말에 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민재는 오 분 내로 에스퍼를 잡으라고 했다. 지환은 그 시간 내에 자신이 먼저 잡아내 민재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 공이 호영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싫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 방향을 꺾어 다시 에스퍼를 쫓기 시작했다.

호영은 날면서 길을 살피는 듯하더니 다시 한번 방향을 틀었다. 에스퍼가 가는 방향을 파악하고 먼저 앞지르려는 것 같았다.

지환은 빠르게 눈으로 에스퍼가 가는 길을 쫓았다. 굽이굽이 꺾인 골목을 따라 계속 달리면 돌아서 민재가 있는 곳 근방으로 가 닿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지환은 순식간에 속도를 올렸다. 허공에 발차기를 하듯 발을 움직여 가속한 지환은 거의 미사일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에스퍼를 조금 앞지르는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 지환은 날아온 것과 비슷한 속도로 빠르게 하강했다.

“악!”

갑작스러운 지환의 등장에 놀란 에스퍼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려고 했다. 그러나 지환이 더 빨랐다.

재빠르게 에스퍼의 팔 쪽을 낚아챈 지환은 에스퍼를 들어 올려 공중에서 한 바퀴 돈 다음 착지했다. 빠른 속도로 하강해 가해지는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에스퍼는 앞으로 엎어진 자세로 지환의 밑에 깔리게 되었다.

“이거 놔!!”

지환은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리는 에스퍼의 팔을 뒤로 꺾었다. 지환의 앞으로 약물이 내밀어졌다. 착지한 호영이 내민 것이었다.

지환은 약물을 받아 들고는 에스퍼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

“지금 이거 안 마시면 폭주할 거예요.”

“…마, 마실게! 마실 테니까 이거 놔!!”

지환의 말을 들은 에스퍼는 두려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에스퍼의 입에 가이딩 물약 한 병을 흘려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에스퍼를 일으켜 앉히고 다시 가이딩 물약을 내밀었다.

에스퍼는 지환의 눈치를 보더니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내가 보고 드릴까?”

지환과 에스퍼를 지켜보던 호영이 물었다. 지환은 왼쪽 팔로 에스퍼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요? 제가 잡았는데.”

“…허. 야,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 너 폭주 위험 있는 에스퍼한테 그렇게 충격을 가하면 어떡해. 바로 터지면 어떡할 건데. 다 같이 죽자 그거야?”

호영이 어이없어하며 지환을 노려보더니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터지는 거 무서워서 계속 쫓기만 하면요? 이대로 쭉 뛰었으면 가이드들 서 있는 입구 쪽으로 가서 주택가 벗어났을 텐데 그럼 더 위험하잖아요.”

지환의 말에 호영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래. 너 잘났다. 너 민재 선배님이랑 같이 다닌다고 너도 실장급이 되었다고 착각하나 본데….”

지환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 나갔다. 자신이 실장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실장이 누군데. 그 눈 안에 들기라도 하려고 아등바등하기나 하는 자신이 무슨 실장이 된 줄 알고 설친단 말인가.

“착각한 적 없어요.”

싸늘하게 대답한 지환은 곧장 핸드폰을 꺼내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잡았어?]

“네, 약물도 3병 먹였어요.”

[잘했네. 위치 어디야? 저기 보초 서는 애 불러서 갈 테니까….]

“부르지 마세요. 제가 갈게요.”

지환은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호영 쪽을 쳐다보았다.

“선배님 모시고 올게요. 그때까지 저 에스퍼 좀 부탁드려요.”

“…야.”

“민재 선배한테 제가 실수했다고 이야기하면 저도 선배가 밀쳐서 부상 입을 뻔했다고 말할 거예요.”

지환의 말에 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바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저 멀리서 공중에 있던 비행 에스퍼가 골목을 향해 하강하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가겠다고 했는데 기어이 다른 사람을 부른 모양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지환은 빠르게 속력을 올렸다.

“일단 내가 출발하면 가이드들이랑 같이 움직여서 따라와. 물약 먹였다고 해도 좀 더 채워서 데려가자.”

비행 에스퍼와 가이드들에게 지시하고 있는 민재가 보였다. 지환은 민재가 다른 사람과 날지 않은 것에 약간의 안도를 느꼈다. 부드럽게 착지한 지환이 민재의 곁으로 다가섰다.

“선배, 저 왔어요.”

“어.”

간단히 대답한 민재가 지환의 손목을 잡고 훑더니 슬쩍 살피는 것이 보였다. 부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지환은 그 시선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지환은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민재를 안아 들었다.

“가요, 선배.”

“어. 야, 너네 따라와.”

민재가 자연스럽게 지환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환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라 자신이 잡은 에스퍼와 호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