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민재는 전신이 뻐근함을 느끼며 기상했다. 어젯밤 잠을 설쳤더니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던 민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환은 여전히 잠잠했다. 문자 한 통이라도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민재는 조용한 지환에게 괘씸함을 느꼈다.
“…선배는 왜 그렇게.”
뒷말이 대충 예상이 가긴 했지만, 화를 내고 가버렸으면 뭐라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원래라면 대충 설명해도 넘어갔을 법한 놈인데 저 혼자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애틋한 사이라도 있느니 하면서 별 이상한 소릴 하질 않나. 민재는 울리는 머리통을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지환과 비행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우선 훈련장에 가서 기다려 보고, 나오지 않으면 찾아내 족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민재는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현관을 열었을 때였다. 민재는 평소처럼 문 앞에 서 있는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잘 잤어요. 선배?”
지환은 평온한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잠을 설친 자신과 다르게 잘 자기라도 한 것인지 얼굴도 멀끔했다.
대뜸 성을 내고 가서는 연락도 받지 않아 자신은 짜증 나게 만들어 놓고는 태연하게 구는 걸 보자 민재는 약이 올랐다.
“…너 뭐 하자는 거야. 전화는 왜 안 받았는데?”
“아, 어제… 잠들어서 못 받았어요.”
거짓말이다. 박지환은 꽤 잠귀가 밝은 편이다. 민재는 지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환이 손을 들어 민재의 눈가를 살짝 쓰다듬었다.
“전화 기다렸어요?”
지환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민재는 자신이 지환의 전화를 기다렸고, 그래서 내내 열이 받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생각을 하고 민재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민재는 지환이 자신의 곁에 있으며,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부름에 응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지환이 어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민재는 지환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지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제 이야길 하지 않은 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나. 민재는 그런 지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제 있었던 일은… 내가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 좀 확실해지면….”
“말 안 해줘도 돼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단 말을 하려는데 지환이 말을 잘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꼬치꼬치 캐물으며 성을 내더니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민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쳐다보았다.
“뭐?”
“…그냥 선배가 말해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지환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냥 기다리겠다는 말을 다 믿기는 어려웠으나 당장 이야기해 줄 수도 없으면서 정말 기다릴 수 있냐고 되물어보는 것도 이상했다.
“…알겠어.”
민재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지환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 먹고 훈련장 갈까요?”
지환은 평소와 다름없는 여상한 말투로 민재의 끼니를 챙겼다. 생각해 보니 어제 오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 허기가 졌다.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환은 자신이 알아왔다면서 급식실에 새로 나온 메뉴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는 지환의 모습을 보면서 민재는 안도했다. 둘은 나란히 복도를 걸어 급식실로 향했다.
***
“선배, 우리 여기 가볼래요?”
민재는 지환이 내민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새로 생겼다는 일식 돈가스 맛집 리뷰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참을 핸드폰만 보기에 뭘 그렇게 찾나 싶었는데 맛집을 찾았던 모양이었다.
최근 지환은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처럼 맛집을 찾아댔다. 민재가 사정을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지환은 정말로 그럴 셈인지 꼬치꼬치 캐묻는 일을 줄였다.
대신, 이전보다 민재와 붙어 있으려고 하고 맛집을 찾는 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차피 뒤에서 사고를 치게 두는 것보다는 눈앞에 두는 것이 그에게도 편했기 때문에 민재는 지환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었다.
“돈가스?”
“네. 선배 좋아하잖아요, 돈가스.”
내가? 민재는 딱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다. 그냥 있으면 먹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못 먹는 것이었다. 민재는 스스로도 모르는 음식 취향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지환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선배 돈가스만 거의 안 남기고 먹잖아요.”
지환이 태연하게 말하며 싫지 않으면 예약을 해두겠다고 했다.
내가 그랬나? 민재는 그간의 식사를 떠올려 보았으나 얼마나 먹고 남겼는지는 딱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돈가스 별로예요?”
“아냐, 먹어.”
민재의 대답에 예약을 마친 지환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민재 옆에 다시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러더니 실실 웃음을 흘렸다.
“왜 쪼개.”
“선배 까치집 생겼어요.”
지환이 손을 뻗어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솟은 머리칼을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름 집중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만지는 지환의 머리도 사방천지로 솟구쳐 있었다. 민재는 그 모양새가 웃겨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나 정리해. 넌 머리가 활화산 같다.”
“…진짜요?”
지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거울을 봐야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민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민재는 베개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도망자 신고. 에스퍼 발현 현장에서 도주. 능력 염력으로 추정. 신고자 가이드실 소속 이서연 가이드.
행정실에서 온 문자였다. 공교롭게도 또 도망자 신고였다. 거기다 신고자가 이서연이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발현 현장에 갈 용기가 있었나 보다. 어떤 의미에선 대단했다.
“무슨 일 있어요?”
머리에 물을 묻혀 내린 건지 좀 차분해진 머리를 한 지환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어. 바로 나가야겠다.”
“…혼자요?”
지환이 물었다.
“아니, 너도 가야지.”
“네.”
같이 간다는 말에 조금 안심한 듯한 답이 들려왔다.
민재는 행정실에서 보내온 서연의 위치를 지환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민재는 남은 팀원인 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옆에 누구 있어.”
[어… 아무도 없는데요?]
“됐어. 그럼 내가 보내주는 위치로 지금 바로 튀어 와. 도망자 에스퍼 생겼으니까.”
[헉. 또요?]
“이 이야기 어디다 흘리지 마라.”
[네! 은정 선배님도 모셔갈까요?]
“아니, 너 혼자 와. 난 박지환이랑 갈 테니까.”
[아….]
빠르게 전달 사항만 전하는데 낮은 목소리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뭔가 실망한 듯한 느낌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민재는 호영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다시 질문했다.
“…뭐 문제 있어? 혹시 안 들렸어?”
[아뇨. 들었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호영은 방금 전보다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답을 했다. 민재는 알겠다고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민재는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간단하게 양치와 세수를 했다.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은 민재가 고개를 들자마자 얼굴 위로 수건이 얹어졌다.
“호영 선배가 필요해요?”
수건 위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은 수건을 가볍게 눌러 민재의 얼굴을 닦아냈다. 수건이 치워지자 지환의 얼굴이 보였다. 묘하게 날 선 얼굴이었다.
“도망자가 사라진 쪽이 골목이야. 위에서 보고 쫓는 게 빠를 거 아냐.”
민재의 말에 지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가 하면 되잖아요.”
“그래. 그럼 네가 먼저 잡아.”
무엇에 빈정이 상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걸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민재의 말에 지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에게 갈아입을 옷을 내밀었다. 민재는 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섰다.
지환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리더니 허공에서 두 팔을 벌렸다. 창문을 넘나드는 모양새가 퍽 능숙해 보였다.
“뛰어요.”
민재가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자 지환이 그를 안아서 끌어당겼다. 민재의 몸이 공중으로 휙 끌어 올려졌다.
“이번엔 누가 도망친 거예요?”
지환이 민재를 들어 올리면서 물었다. 민재는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한 뒤 지환에게 방향을 일러주었다.
“몰라. 발현하고 구조받다가 튄 케이스라. 신원 정보가 없어. 지금 여기서 나가서 일단 서쪽으로 가.”
지환은 민재가 일러준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은정 선배님은 왜 안 불렀어요?”
지환이 다시 물었다. 1팀에서 그녀만 빠진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신고자가 이서연이야. 만약 다치기라도 했으면 은정이가 당황하거나 흥분해서 일이 더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안 불렀어.”
아. 지환은 작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 가이드님 괜찮으셨으면 좋겠네요.”
지환은 걱정하며 속도를 조금 올렸다. 민재는 지도 어플을 켜 다시 위치를 확인했다. 에스퍼가 도망친 쪽이 골목이 좁은 주택가라 위치가 좋지 않았다.
고민하던 민재는 얼마 전 전화가 걸려왔던 서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실장님.]
“어. 나 가는 중인데. 너 가이딩 얼마나 했어?”
[칩이 없어서 수치 확인은 안 되었는데 쓰러져 있는 상태일 때 도착해서 저랑 다른 가이드님이 같이 가이딩했습니다. 대략 3분 정도 주입했는데, 상대가 눈 뜨자마자 도망쳤어요. 놓쳐서 죄송합니다.]
“너희 중에 부상자 있어? 같이 출동한 에스퍼는?”
[크게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에스퍼분은 우선 쫓아가셨는데 지금은 안 보여요.]
“걔 몇 급인데.”
[B급 비행 에스퍼요.]
민재는 저 앞에 보이는 주택가의 상공을 살폈다. 놓친 건지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 놈이 하나 보였다. 저놈인가 보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네 생각엔 얼마나 버틸 거 같아.”
가이딩을 받던 놈이 튀었으니 폭주까지 얼마나 버티겠냐는 질문이었다. 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다리에 염력 실어서 뛰기 시작하면 최대… 십 분 정도일까요.]
“…알겠어. 다 왔으니까 대기해.”
민재는 전화를 끊었다. 골목 입구 쪽에 서 있는 인영 둘이 보였다. 서연과 다른 가이드인 것 같았다.
민재는 미로처럼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는 골목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