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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90)화 (9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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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센터 입구에 들어서고 나서야 민재를 내려주었다. 민재는 지환을 한 번 노려보고는 그대로 가이딩실로 걸어 들어갔다.

가이딩실로 들어서는 민재와 지환을 발견한 우석이 손짓을 해 보였다. 민재는 손으로 바깥쪽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사무실로 가자는 말을 전했다.

우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민재는 곧바로 몸을 틀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박지환. 너도 가이딩 받고 먼저 숙소 들어가 있어.”

“…전 가이딩 안 받아도 돼요. 같이 가면 안 돼요?”

민재가 부르자 지환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썹을 팔자로 축 늘어뜨리는 꼴이 간식을 뺏긴 리트리버 같았다. 요즘 은근히 불쌍한 척을 많이 한단 말이지.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의문만 가득한 상황인 데다 오늘 다쳤던 사람이 신태현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태현이랑 친한 것 같던데.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섣불리 왈가왈부하기가 꺼려졌다. 민재가 입을 다물고 있자 지환이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누구랑 싸웠는지 말해주세요. 말해주기 전까진 저 여기서 꼼짝도 안 해요.”

어째 조용히 넘어간다 했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안 싸웠어.”

“…그럼 뭘 했는데요?”

지환이 의문을 표했다. 민재는 우선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급히 좀 보자고 한 사람이 있어서. 혹시나 싶어서 너한테 부탁한 거야.”

민재의 말에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빤히 민재를 바라보았다.

“누구요?”

“뭐?”

“누구 만났는데요. 몰래 만나서 힐을 써줘야 할 정도로 애틋한 사이라도 돼요?”

비꼬아대는 지환의 얼굴은 꽤 살벌했다. 누가 보면 민재가 취조를 받는 줄 알 지경이었다.

불과 몇 달 전을 생각해 보면 상상이 가지 않을 구도였다. 어이가 없어진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너 많이 컸다.”

“…선배는 왜 그렇게.”

무언가 말하려던 지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민재의 반대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재가 황당함에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지환을 붙잡으려는 찰나, 그의 옆에서 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

지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끝에서 몸을 돌려 민재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왜? 박지환이랑 무슨 일 있어?”

우석이 물었다. 민재는 대충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방금 전의 황당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민재는 우석의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석은 그런 민재를 슬쩍 쳐다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같이 사무실로 향했다.

“이서연 어때?”

민재는 우석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으며 본론부터 꺼냈다.

“뭘 어때? 질문을 할 거면 말 좀 잘라먹지 마.”

우석은 투덜거리며 민재의 손목을 확인한 뒤 가이딩을 시작했다.

“가이드실에선 평판이 어떤 것 같아?”

“…걔 뭐 특별할 게 있나. 은정이 가이드로 유명하지. 착하고.”

그렇긴 했다. 은정이 자신의 가이드를 애지중지하는 것은 센터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녀의 가이드인 서연도 이름은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근데 갑자기 왜?”

“…네가 보기에 요즘 좀 이상한 거 없었어?”

민재는 우석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전달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우석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보통은 그러면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거나, 범인을 찾아내서 어떻게 하겠다고 분노를 표출하기 마련인데, 곧바로 자기 때문인 것 같다고 자책을 하고는 현장에서 제외당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고.”

“걘 뭐가 문제야? 나였으면 한 두어 달은 얌전하게 쉰다.”

우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가 계획을 읊었다. 그러나 실장인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민재는 가볍게 우석의 말을 무시했다.

“왜 꼭 나 혼자 와달라고 했을까. 그 범인이 다시 돌아오거나 할 확률도 있는데.”

민재가 중얼거리자 우석이 얼굴을 굳혔다.

“야, 넌 그래서 그걸 혼자 갔어?”

“근처에 박지환 대기시켰어.”

우석은 그것도 못마땅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재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걔 최근에 일 뭐 했어? 따로 파견 나간 건?”

민재가 묻자 우석이 책장에서 몇 개의 파일을 꺼내 뒤적였다.

“특별하게는… 아. 근데 걔 얼마 전부터 에스퍼 발현 현장에 지원한 것 같던데.”

“…굳이?”

활동 이력이 특이한 가이드였다. 페어 에스퍼를 두고 지방으로 돌지 않나, 남들 꺼리는 발현 현장에 나간다고 지원을 하지 않나.

“그거 정리된 자료가 있어?”

민재의 물음에 우석이 서류 두 개를 건넸다. 하나는 서연의 보고서였고, 하나는 에스퍼 발현을 건별로 모아놓은 것이었다.

민재는 곧바로 서연의 보고서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석은 민재의 뒤에 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다시 가이딩을 시작했다.

현장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케이스가 많진 않았다. 이서연은 총 6건 중 단 한 건만 실패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에스퍼 발현 신고 현장에 간 날이었다.

이서연은 폭주를 막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 주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실드를 사용했다고 보고했다.

민재는 다른 서류를 확인해 보았다. 주변 인명피해는 전혀 없었다. 처음 투입된 것치고는 깔끔한 일 처리였다.

보통은 자신의 손으로 가이딩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아 가이드 본인이 다치거나 주변에 피해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러나 서연은 꽤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급박한 상황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가?

그때 서류를 살피던 민재의 눈에 한 가지 정보가 들어왔다. 얼마 전 죽은 에스퍼의 가족이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었다. 민재는 손가락으로 그 지점을 짚었다.

“이쪽이 유력하긴 하네. 첫 현장 폭주 건.”

우석은 민재가 짚은 곳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원한 관계라고 말하던 서연을 떠올렸다. 원한 관계라는 걸 짐작할 정도면 무슨 일인지 본인은 짐작을 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누군지 못 봤다는 건 거짓말일 수도 있겠군.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서연은 자신이 더 위험해질 수 있는데도 상황을 덮고 싶어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건 죄책감인가? 민재는 서류를 덮고는 우석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일단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해.”

이런 문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민재의 말에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민재의 손목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땡큐.”

인사를 건넨 민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우석이 살짝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지환이 방에 가?”

최근 들어 지환의 방에서 자주 잠을 청한 것을 알았는지 우석이 놀리려 들었다.

아주 재밌어 죽지. 민재는 대답하지 않고 우석의 사무실 문을 거세게 닫고 나왔다. 문 너머로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재는 복도를 걸으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지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원래라면 삼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 마련이었으나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재는 꽤 오랜만에 자신의 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

지환은 방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숙소에 있다는 걸 확인시키고 싶지 않아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화면에서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지환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민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는 단 2건이었다.

지환은 오늘 낮 골목에 서서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와 걸었던 전화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십오 분. 그 정도면 되니까. 그 이후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구조 요청할게.”

지환은 싫다고 거부했으나 민재는 결국 지환을 남겨두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었다. 무슨 일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보았으나 민재는 들어주지 않았다. 최근 대체로 져주면서 어디나 그를 데려가던 민재였는데, 그 순간에는 단호했다.

그것이 지환을 미치게 만들었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 기어코 자신을 내버려 두고 가야 할 일이 무엇일까.

지환은 아무런 낌새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에스퍼 정승규를 떠올렸다. 그는 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센터가 싫어서? 혹은 누군가에게 당해서?

제1팀 선배들은 최근 모두 그 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환은 정승규라는 선배를 알지 못했지만 팀 내를 잠식한 분위기 속에서 민재를 살폈다.

우민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기 힘든 인물이었다. 사람을 구해야 할 때는 망설임이 없으나 자신을 구하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떤 것에도 딱히 미련을 두지 않는 듯했다.

지환은 그런 그가 언제든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까마귀에 잠입했을 때, 더 이상 에스퍼로 살지 않도록 만들어주겠다는 거짓 정보를 들었었다. 그때 민재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랐었다. 갈망과 절망이 묘하게 뒤섞인 듯한 눈빛에서 지환은 그의 본모습을 잠깐 엿본 것만 같았다.

정승규의 자취를 쫓을 때도 그랬다. 정승규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에 실패할 때마다 지환은 민재가 표한 실망감 아래 깔린 작은 기대감을 읽었다.

정승규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면 우민재는 희망을 품게 될까?

민재는 정승규가 부러울 것 같냐는 질문에도 정확히 아니라고 답하진 않았다. 민재는 지환을 끝까지 찾아주겠다고 했으나 그를 찾겠다는 지환의 약속에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우민재는 자신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어서 무슨 일을 당해도 최선을 다해 지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환이 떠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아주 작은 미련이라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환은 뱃속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 초마다 초조와 불안에 잠식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냥 뛰어 들어가 골목을 뒤져볼까 싶기도 했으나 자칫하면 자신이 일을 더 망치게 되어 민재를 다치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상황들이 지환의 머리를 거세게 뒤흔들고 지나갔다.

민재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지환은 숨을 쉬는 것도 버거웠다.

그런데 민재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설명하길 꺼려 했다. 그가 능력을 사용하게 만든 놈을 찾아내 값을 치르게 하고 싶었다.

만약 그 존재가 민재가 감춰주고 싶어 하는 대상이라면? 그와 같이 센터로부터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라면?

지환은 순간 맹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정말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지환은 조용한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장 민재의 방으로 향했다.

민재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가 누워 있는 것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민재가 방에 있는 것을 확인하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잠을 설치는지 민재는 계속 뒤척거렸다. 그의 뒤척임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야 지환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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