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골목의 끝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는 서연의 팔을 태현이 살짝 끌어당겼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태현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셔츠의 모양새와 찢어진 부분, 핏자국이 보였다.
“…봐봐.”
태현은 다시 서연을 세워두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서연의 손바닥이 까진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봐. 다쳤네.”
태현은 셔츠 소매의 깨끗한 부분으로 서연의 상처 주위를 살살 닦아냈다.
대신 칼에 찔린 주제에 고작 까진 상처를 신경 써? 서연은 목에 돌덩이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많이 아팠냐고, 괜찮으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왜인지 그걸 묻는 것이 무서웠다.
“난 괜찮아. 너… 옷 갈아입어야겠다. 가자.”
목소리가 갈라져 나갔다. 서연의 말에 태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하게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우민재 실장 부른 건 너무 위험부담이 컸어. 이제 우리를 주시할지도 몰라.”
“알고 있어.”
그러나 잘못하면 태현이 죽을 수도 있었다. 악수를 둔 셈이었지만 조금 전에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연의 대답에 태현은 침묵했다.
둘 사이의 적막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서연의 손을 내려주었다.
“누나.”
태현이 다시 서연을 불렀다.
“아까 그 새끼, 아는 놈이지?”
태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민재 실장에게 한 말은 거짓이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안다고 해야 하나. 아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고 해야 하나. 서연은 한숨을 삼켰다.
“내가 뭘 모르고 있어?”
서연이 답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태현이 다시 물었다. 그답지 않게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서 에스퍼 폭주를 막으러 갔다가, 정작 에스퍼를 죽이고 돌아왔다고?
그래서 그의 형제가 나를 죽이러 왔다고. 그러나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하면 태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센터로 돌아가서….”
서연은 피로감을 느꼈다.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면 태현의 옷을 갈아입히고, 빠르게 다시 본가로 향해야 했다.
“여기서 이야기해. 이야기하고 가도 누나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가족 모임 갈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주기 전까진 안 가.”
태현이 고집을 부리며 이죽거렸다.
서연은 시간을 확인했다. 꽃집에서 나온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는데, 이것밖에 시간이 안 지났다고? 서연은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화를 내, 태현아. 내가 나중에….”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정말 몰라? 누나가 죽을 뻔했잖아!”
태현은 분에 못 이기는 듯 소리를 질렀다. 서연에겐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서연은 잠시 움찔했다.
죽을 뻔했다니. 그건 서연이 아니라 태현이었다. 그것도 서연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태현이 죽을 뻔한 것이었다.
태현은 그녀와 같이 있지 않았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서연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미안이 아니라…! 왜 누나는 누나가 위험한 줄을 몰라. 왜 나는 아무것도 몰라, 매번? 나를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믿어줄 순 없어?”
태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믿는다라. 서연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일정량 이상의 감정을 주지도 않았다.
서연은 어느 순간이라도 필요하면 센터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을 저버릴 수도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에스퍼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 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연은 태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에스퍼 발현 때 폭주를 못 막을 것 같아서… 실드를 덮고 포기했어. 그… 유가족인 것 같아.”
서연의 말에 태현은 상황을 가늠해 보는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다.
“넌 알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왜 그랬는지. 나 그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에스퍼는 살았을지도 몰라.”
태현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 말이었다. 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넌 날 믿을 수 있어? 내가 이런데?”
스스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것 같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그녀의 말에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누나 믿어.”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덤덤한 얼굴이었다. 뭘 믿어? 나도 날 못 믿겠는데. 서연은 가빠지는 호흡을 누르려고 숨을 들이켰다.
“누나가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뭐든지 전부 다 해. 내가 돕겠다고 했잖아.”
태현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는 서연의 양팔을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에스퍼 발현 현장 나가는 건 그만둬. 위험하잖아.”
“싫어.”
서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나.”
태현이 서연을 불렀다. 낮은 목소리가 꽤 험악했다.
“싫다고 했어.”
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덤덤하던 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의 대치가 길어졌다.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때 실드를 덮은 것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원래 생각했던 대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니 현장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서연을 노려보던 태현의 눈이 빨개졌다. 서연은 그런 태현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태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잡고 있던 서연의 팔을 놓았다.
“마음대로 해.”
태현은 서연을 등지고 골목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태현아.”
서연이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태현은 그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가족 모임은 갈 테니까 걱정 마. 옷 갈아입어야 할 거 아니야.”
태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연은 목울대까지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태현을 따라 걸었다.
***
민재는 골목을 걸어 나가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음으로 해둔 핸드폰에서 불빛이 계속 번쩍거리고 있었다. 지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일 터였다.
이서연에게 일어난 일이 정승규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을까? 그 의문이 민재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이서연은 개인적인 원한인 것 같다며 자신을 자책하는 말을 했다. 정승규도 협박 편지를 받고 얼마 뒤 사라졌다. 만약 이서연도 정승규가 받은 것과 같은 협박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면?
민재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메시지창을 열었다.
-선배 저 들어가요?
-괜찮으신 거 맞아요?
민재가 메시지를 확인하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리 센터 내 후배인 서연의 요청이었다지만 정말 아무런 준비 없이 혼자 움직일 수는 없었다. 협박을 받아 민재에게 혼자 오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우 정말로 혼자서 움직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민재는 지환에게 서연이 보내준 위치에서 가까운 지점까지 같이 가서 대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지환이 거절할 리는 없었지만 민재의 당부를 잘 들어줄지가 관건이긴 했다.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일단 대기하라고 하니 걱정이 많은 지환은 무조건 같이 가야겠다며 고집을 피워댔다.
덕분에 민재는 십오 분이라는 제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그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이었다.
시간을 보니 약속한 십오 분을 넘긴 상태였다.
민재는 빠르게 뒤를 돌아 골목 안쪽을 다시 살펴보았다. 서연과 태현은 아직 골목 안에 있는 듯했다.
민재는 전화를 받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고는 모퉁이를 돌아 나가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는 지환의 앞으로 다가섰다.
“야.”
민재의 목소리에 지환은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꽤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찡그린 미간에 힘이 들어간 눈초리가 민재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아. 진짜.”
탄성 같은 말을 터뜨린 지환은 민재를 와락 껴안았다. 거센 힘에 민재의 등이 뒤로 꺾였다. 지환이 민재의 등 쪽 옷을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야. 야.”
이렇게 격한 반응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재는 당황했다. 큰 소리를 낼 순 없었기 때문에 민재는 작은 목소리로 지환을 만류하듯 불렀다.
지환의 어깨를 툭툭 치자 그가 민재의 손을 그대로 잡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노란불이 들어온 민재의 손목을 확인한 지환은 민재를 바라보고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왜 또 지랄이야. 민재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저주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따라 연비가 더 안 좋은 모양이었다.
“…싸웠어요?”
“내가 조져놨어.”
민재가 허세 섞인 농담을 하자 지환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능력 쓰신 거면 다쳤다는 거잖아요.”
이 새끼가? 민재는 자신을 약골 취급하는 지환에 살짝 약이 올랐다. 그러나 지환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에는 지금 상황이 조금 급했다.
“…왜 나 안 불렀어요? 약속한 시간도….”
지환은 계속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조금 커지는 것 같아 민재는 지환에게서 손을 빼내 그대로 그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에 입이 틀어막힌 지환은 민재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일단 복귀하자.”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자 지환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민재의 허리를 고쳐 안았다. 날아오르려는 것 같았다.
“아니. 여기서 날면 좀….”
잘못하면 보일 것 같은데. 민재는 다시 골목 안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지환의 시선이 민재의 눈을 좇았다.
“알겠어요.”
골목 안쪽을 같이 살핀 지환은 뜬금없이 알겠다고 하더니 곧바로 민재의 몸을 더 위로 들어 올렸다.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기게 된 민재는 인상을 쓰며 내려놓으라고 했다.
“야,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걸어갈게요. 그럼 되잖아요.”
지환은 태연하게 개소리를 늘어놓더니 정말로 걷기 시작했다.
센터 뒤쪽 골목이라 인적이 드물긴 했지만 건장하게 다 큰 사내가 덜렁 들려서 가는 꼴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안겨서 날아다닌 적은 있었지만 나는 것과 걷는 것은 달랐다.
“안 내려놔?”
민재가 버둥거리며 화를 냈으나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고쳐 안았다.
“선배 큰 소리 내시면 안 돼요. 들키면 어쩌려고요.”
지환은 민재가 골목 안을 살피는 것을 보고 짐작한 것인지 은근한 협박을 늘어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야, 너 진짜….”
“선배님 또 쓰러지실 것 같아서 그래요. 선배는 선배 얼굴 어떤지 모르잖아요.”
지환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으나 민재는 멀쩡했다. 민재는 어이가 없었지만 여기서 더 큰소리를 내봐야 자신만 손해인 것 같아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지환의 어깨 쪽에 얼굴을 묻어 알아보는 사람이 없게끔 했다. 지환은 편안하게 민재를 안고는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