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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88)화 (8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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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살인마라고? 내가?

서연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려고 했으나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것 같은 순간이었다.

“누나!”

다급한 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뒤쪽으로 휙 당겨졌다.

넘어진 서연이 다시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손에는 더 이상 칼이 들려 있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옆에 태현이 있었다. 칼이 태현의 옆구리 부근에 꽂힌 것을 확인한 서연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남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남자는 서연을 노려보았다.

“너…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동생을 죽였잖아. 그래서 이 새끼가 끼어들었고….”

남자는 횡설수설하면서 서연 쪽으로 다가섰다. 동생을 죽였다고? 서연은 뒷걸음질을 쳤다.

“누나, 도망쳐….”

“윽…!”

태현이 뒤쪽에서 남자의 몸을 잡는 게 보였다. 남자는 놀라 태현의 팔을 잡고 패대기쳤다.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은 건지 태현은 고꾸라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안 돼!”

서연이 태현에게 뛰어가 그의 몸을 살피며 가이딩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안 돼, 태현아, 태현아! 서연은 정신없이 태현을 불렀다.

“내 동생한테도 그렇게 해주지 그랬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은 고개를 들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 누구야?”

“네가 죽인 에스퍼의 형.”

남자가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자 서연은 그를 알아보았다.

첫 발현 에스퍼 구조 현장에서 그녀가 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원망과 증오를 담은 눈으로 그녀를 잠시 노려보던 남자는 이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잠깐만!”

서연은 남자를 쫓아가려다가 멈추었다. 태현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가이딩을 주입하고 있으면 에스퍼의 회복 속도가 빨라지긴 하지만 몇 분 만에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서연은 아직 태현의 배에 꽂혀 있는 칼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센터로 가야 하나? 가이딩실로?

서연은 제일 먼저 센터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면 길거리에서 칼을 맞은 이유를 기술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이야기가 경준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병원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에스퍼 진료를 봐주는 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서연이 태현을 부축해 갈 수 없으므로 구급차를 불러야 했다.

그렇게 되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진다. 서연과 태현은 어떤 방식으로든 최대한 남들 눈에 노출되는 것을 피해야 했다.

서연은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서연은 우민재 실장을 떠올렸다. 그의 능력이라면 비교적 조용하고 간단하게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도 있을 터였다.

그가 혼자 오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서연은 망설였다. 그러나 계속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비상 연락망을 확인했다. 우민재의 이름은 가장 상단에 위치해 있었다.

서연은 GPS에 잡힌 위치 정보를 우민재 실장의 번호로 전송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이서연인데요.”

[…어어. 무슨 일이야?]

“태현이가… 태현이가 칼에 찔렸어요.”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서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가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뭐?]

전화기 너머로 당황한 민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보내드린 위치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어. 잠깐만, 넌 지금 괜찮아? 몇 명 필요해?]

“전 괜찮고요. 실장님.”

[잠깐 기다려. 출동 명령을….]

“아니요!”

다급해진 서연이 큰 소리로 민재의 말을 잘랐다.

“혼자요. 실장님 혼자 와주실 수 있나요.”

서연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와줄까?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서연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이렇게 다짜고짜 혼자 와달라고 하면 의심스러울 것이다.

무언가 말을 더해서 설득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서연은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후 민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칼 뽑았어?]

“…네?”

[뽑았냐고. 애가 찔렸다며.]

“아뇨….”

[그럼 뽑지 말고 있어. 그게 편하니까.]

그 말을 한 뒤 민재는 전화를 끊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안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서연은 숨을 삼키고는 다시 태현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태현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 어쩌면 우민재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쯤,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네.”

민재는 서연과 태현 쪽으로 뛰어왔다. 정말로 혼자 오라는 말을 지켜준 것인지 그의 뒤에 따라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박지환도 떼어놓고 온 모양이었다.

“어이고.”

민재가 작게 한탄을 하며 태현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검지로 허공을 가리켰다.

“저쪽 좀 봐.”

“…네?”

서연이 민재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눈앞에는 전봇대가 있었다.

“그러고 잠깐만 있어. 칼 뽑을 건데 그렇게 허옇게 질린 얼굴로 보고 있으면 나도 심장 떨려서 못 뽑아.”

배려를 하는 건지 겁을 주는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금 상황이 별일이 아니라는 듯 차분했다. 그것에 서연은 약간의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는 민재의 말대로 전봇대를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등 뒤에서 민재가 칼을 빼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는 옷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의 바라보고 있는 전봇대 쪽에 살짝 빛이 어렸다.

“…이제 뒤돌아도 돼.”

민재의 말에 서연은 고개를 돌려 태현을 살폈다. 셔츠가 말려 올라간 그의 옆구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물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서연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제 괜찮을 테니까 얘 좀 깨워봐.”

민재는 고개를 까딱여 태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지? 서연은 잠시 민재의 눈치를 살피다가 태현을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태현아, 내 말 들려?”

“으….”

태현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잠시 후 눈을 뜬 태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연을 붙잡고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누나, 괜찮아? 그 새끼 어디 갔어?”

서연을 살피다가 몸을 돌려 주변을 살피려던 태현은 바로 옆에서 떡하니 서 있는 민재를 보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태현이 서연을 슬쩍 바라보았다. 설마 이 새끼가 칼 든 놈은 아니었지, 누나? 하는 얼굴 같았다.

서연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내가 너무 급해서 전화 드렸어.”

“아….”

민재는 서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현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너 일어나 봐.”

“…네?”

태현은 조금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민재는 더 말하지 않고 한 번 더 손짓했다.

서연이 부축하는 시늉을 하자 민재가 서연을 말렸다.

“아니. 너 하지 말고.”

태현은 바닥에 손을 짚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파?”

민재가 물었다. 태현은 자신의 옆구리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민재는 손을 뻗어 태현의 옆구리를 눌렀다.

“이렇게 하면?”

“…안 아파요. 감사합니다.”

“됐네, 그럼. 가이딩은 니 누나가 잘 넣어줬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태현의 상태를 확인한 민재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보려나. 서연은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이 골목에 사람이 너무 없는 것 같지 않아?”

민재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 골목은 원래 사람이 적은 편이긴 했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서 민재가 말해준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이 골목을 중간에 두고 한 구역에 공사 중 팻말이 놓여 있었어.”

내가 꽃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유인한 건가? 아니, 이곳에 올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문지르고 있던 서연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민재와 눈을 마주치고는 손을 내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뭐 아는 거 있어?”

민재가 물었다. 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연이 말하는 대로 두겠다는 것 같았다. 서연은 우선 침묵했다.

“이서연 가이드. 위급상황이라 상사인 날 부른 건 잘했어. 하지만 나 혼자 오라고 해놓고 이렇게 입을 다무는 데엔 이유가 있겠지?”

민재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올 리가 없지. 서연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무슨 말이야?”

“개인적인 원한 관계 같았어요. 저를 원망하는 말을 했는데, 태현이가 절 구하려다 찔린 거예요.”

서연의 말에 민재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는 사람이었어?”

“잘은 모르겠어요.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 확인을 제대로 못 했어요. 달아나는데 태현이 때문에 잡으러 가볼 수가 없어서….”

이 정도 거짓말은 해두는 게 나았다. 서연의 말에 민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했어. 넌 가이든데 잡으러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근데 얠 찌르고 넌 다시 찌르지 않았네?”

민재가 태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연이 찔리는 장면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태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연은 침착하게 상황을 떠올려 보고는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찔러서 좀 당황한 것 같았어요. 또 다른 무기는 없는 것 같았고요.”

납득이 가지 않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초범이면 가능한 전개였다. 민재는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익숙한 행색은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도 다시 올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네.”

“실장님, 저 현장에서 제외되고 싶지 않아요. 개인적인 문제니까 제가 잘 대처할게요.”

우민재 실장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되거나, 보호가 필요한 가이드로 간주되어 현장에 나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연은 방금 전의 일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했다.

그냥 넘어가 줄까? 서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민재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괜찮겠어?”

민재의 질문에 서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런 일 한 번 더 있으면 내가 우석이한테 일러서 너 외출 금지시킬 거니까 그렇게 알아. 조심해서 다녀.”

“네.”

민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연에게 당부했다. 질책을 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민재는 부드럽게 넘어가 주고 있었다. 왜 은정이 그를 그렇게까지 따르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서연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그런 서연을 보고는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

“…본가에요. 가족 모임이 있어서 가는 길이었어요.”

민재의 질문에 태현이 대답했다.

“…그럼 너 옷 갈아입고 가야겠다. 혹시나 마주치는 사람들 있으면 놀랄 테니까 센터 들어갈 때까지는 웃옷으로 잘 가리고 가.”

“…네.”

“그리고 팻말은 너희가 살짝 치워놓고.”

태현에게 간단한 당부만 한 민재는 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간다고 말하고는 골목을 나갔다.

서연은 민재가 골목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일이 모두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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