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민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만. 계속 에스퍼 한 명의 행방만 찾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도 우린 정승규를 찾는 일에만 매달리느라 다른 임무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잖아.”
민재의 말에 은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원인 불명의 실종 처리로 해두자. 납치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두고.”
“네.”
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보고를 올리면 센터장도 받아들일 것이다. 센터에 못 잡아낸 도망자를 만드는 것보다 실종자가 생기는 것이 나으니까.
문제는 이 이후의 것들이었다. 센터장이 개별적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으니 그보다 먼저 민재가 정승규의 행방을 찾아야 했다.
“겉으로만 그렇게 마무리하고, 계속 찾는 거야. 언제든 단서 발견하면 나한테 연락하고.”
민재는 말을 끝마친 뒤 은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최선을 다했어.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은정이 힘없이 대답했다. 민재는 쓴웃음을 짓고는 팀원들을 내보냈다.
***
팀원들이 돌아가고 나서 민재는 회의실을 나섰다. 당연하다는 듯 민재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환이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불러 세웠다.
“선배님.”
“왜.”
“그럼… 이걸로 끝이에요?”
왜인지 지환의 얼굴은 비장했다. 다른 안건이 있는데 내가 놓쳤나? 민재는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끝냈다.
의아한 민재의 얼굴을 보고 지환이 다시 질문했다.
“만약 그 사람이 도망자라면… 이렇게 끝나는 건가요?”
조금 의외의 질문이었다. 아니, 박지환이라 오히려 할 법한 질문인 건가. 민재는 지환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민재가 되묻자 지환은 잠시 말없이 민재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영원히 못 찾게 되는 건가 싶어서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민재가 단언했다. 운이 좋든 나쁘든 센터에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고 도망자로 사는 것과, 센터에 소속되었다가 도망치는 것은 또 달랐다.
후자는 오히려 드문 편이었고, 그런 경우 대개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폭주 신고로 발견되곤 했다.
“보통은 어떻게든 찾게 되어 있어. 끝이 좋진 않지만.”
“그럼….”
지환이 갑작스레 민재에게 가까이 붙어 섰다. 그는 민재의 옷소매를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악력이 세서 민재의 팔이 그쪽으로 따라갔다.
“만약 계속 발견되지 않게 되면, 폭주 신고도 들어오지 않으면….”
지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민재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민재는 지환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면, 부러울 것 같나요?”
지환의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민재는 그가 왜 도망자를 놓아주냐고 가볍게 투덜거리거나, 도망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걸 묻다니.
민재는 지환의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얼핏 듣기에는 민재의 도주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긴 했으나, 떠보려는 의도를 가졌다기에는 애매한 질문이었다.
지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은정이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좀 걱정이 된 건가? 민재는 솔직하면서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답을 내놓았다.
“…잘 모르겠어.”
민재의 답이 그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던지 지환의 눈가가 처졌다. 민재는 그가 쥔 옷소매가 조금 더 구겨지는 걸 느꼈다.
“여기서 그런 게 소용이 있나?”
민재가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한 혼잣말 같은 것이었다.
센터를 나갈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센터가 돌아가는 꼴을 잘 알고 있으니 여태 도망친 자들 중에는 제일 오래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죽게 되는 것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민재에게는 명분이 부족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서 만날 사람도, 이루어야 할 목표도 없었다.
머물 이유도, 떠날 이유도 없으니 오갈 데 없는 떠돌이인 셈이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동료들이 있는 센터가 그가 존재할 명분이 조금 더 있는 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있을 수도 있죠.”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집스러운 말투였다.
참나.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만약 진짜 자유로워질 방법이 있다고 해도… 선배님이 저랑 있고 싶어질 수 있게 제가 잘할게요.”
지환은 그렇게 말하며 민재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기대오는 몸만큼 무게감이 있는 말이었다.
지환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몸이 들썩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간지러움을 느낀 민재가 뒤쪽으로 몸을 살짝 빼자 지환이 더 바싹 붙어왔다. 뭐가 마음에 많이 걸렸나?
“너 잘하고 있어. 뭐 처음에 비하면 비행 실력도 훨씬 좋아지고….”
민재는 지환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지환은 잘하고 있었다. 초반이야 사고를 좀 쳤다지만 지금은 그러지도 않았고, 오히려 민재의 일정이나 상황을 잘 살펴줘서 이전에 비해 편해진 것도 있었다.
“선배님.”
지환이 다시 민재를 불렀다. 여전히 민재의 옷소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채였다.
“왜.”
“저는 도망 안 칠게요.”
지환이 약속을 했다. 부질없는 것이었지만.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지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민재는 지환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제가 사라지면 꼭 끝까지 찾아주세요.”
지환은 살짝 붉어진 눈으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승규를 실종 처리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확실히 지환은 센터에서 도망을 칠 만한 인물이 아니긴 했다.
민재는 순간 지환이 사라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랬다면 실종 처리가 아니라 납치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일을 키웠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못 찾게 되면 그 결과를 고스란히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은 지환을 믿게 되었다.
“그래, 알겠어.”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조금 안심하는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저도 끝까지 선배 찾을게요. 절대 포기 안 해요.”
지환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신입다운 다짐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많이 흘러 능력을 인정받은 지환이 민재와 비슷할 정도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면 저렇게 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재는 왠지 지환이라면 정말로 끝까지 쫓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라는 말은 기약이 없었다. 기약과 한정이 없는 단어로 하는 약속이라니, 장난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둘이서 아무런 효력도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민재는 조금 민망해졌다.
가까이에서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쳐다봐서 그런가…. 민재는 지환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 그의 볼을 찌그러뜨렸다. 입술이 튀어나온 물고기 같은 얼굴이 되었다.
“왜요.”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지환이 의문을 표했다.
“나 피곤해. 이제 가도 되지?”
화제를 돌리자 지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배 제 방에서 자고 가요.”
“왜 또.”
“오늘은 제가 악몽을 꿀 것 같아서요.”
악몽을 꿀 것 같은 건 뭐야. 누가 예고라도 해주는 거야? 민재는 지환의 말이 어이없었지만 매번 자신이 악몽을 꿀 때마다 지환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가자, 가.”
민재의 대답에 찌그러진 얼굴을 한 지환이 실실 웃었다. 상당히 바보 같은 모양새였다. 민재는 지환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지환이 두 팔을 벌리며 물었다.
“많이 피곤하시면 날아서 가실래요?”
“됐어.”
회의실에서 숙소까지는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였다. 에스퍼랑 가이드들이 득실득실한 복도를 안겨서 간다고? 민재는 빠르게 거절한 후 앞서 걷기 시작했다.
***
-준비 끝났어?
서연은 태현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가방을 챙겼다.
오늘은 가족 식사의 날이었다. 보통은 두어 달에 한 번 있는 행사로 그녀의 양아버지가 원할 때 약속이 잡히는 편이었다.
오늘은 아마도 얼마 전 서연의 엄마와 동생의 기일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식사 자리일 터였다.
서연에게 대가 없는 애정만을 베푼 것은 아니었으나 신경준은 그래도 그녀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오갈 데 없었던 자신을 거두어준 데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끔 늘 도와주었다.
또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지켜주었다. 가족의 기일에 차를 보내주는 것과,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 식사를 마련하는 것.
그건 경준이 그녀의 일을 잊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여전히 그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완벽한 가족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서연은 그것에 만족했다.
-나 다 됐어. 어디야?
-누나 방문 앞.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서연은 현관문을 열었다. 태현은 오늘도 정장 차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좀 더 캐주얼하게 입은 것 같은데. 서연은 손을 들어 스캔하는 것처럼 아래위로 태현을 살폈다.
“우리 동생 다 컸네.”
“아, 누나는 무슨. 다 큰 지가 언젠데.”
태현은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웃으면서 툴툴거렸다.
“가자.”
서연의 말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센터를 벗어나 근처 골목에 있는 꽃집으로 향했다.
“누나는 그냥 가도 되는데 매번 이런 걸 사가더라.”
서연은 급하게 불려가는 일이 아니면 꼭 작은 선물을 들고 경준을 찾아갔다. 이렇게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은 더 그랬다.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굳이 작은 것 하나도 책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태현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서연은 그냥 웃었다.
“어서 오세요.”
꽃집 사장은 종종 찾아오는 서연이 낯이 익은지 눈인사를 건네며 알은체를 했다.
서연은 최근 철을 맞은 꽃이 있는지 물었고, 버베나를 추천받았다. 다른 꽃들과 색깔이 맞게끔 꽃을 포장해 달라고 부탁한 서연은 꽃다발이 완성되길 기다리며 태현과 잠시 꽃구경을 했다.
“누난 무슨 꽃이 제일 좋아?”
“나? 그냥 아무거나 다 좋아해.”
“음….”
태현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으로 꽃을 잠시 바라보았다.
“너도 아버지 사드리게?”
“…아니?”
그녀의 말에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 것으로 둘이 같이 사왔다고 하자.”
“그럴 필요 없어.”
태현은 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이 완성되었고, 꽃다발을 든 서연과 태현은 꽃집을 나섰다.
두 사람이 큰길가로 나가기 위해 걷고 있을 때였다.
“이서연 가이드님?”
좌측의 좁은 골목에서 누군가 서연을 불렀다. 서연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우비 같은 것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보였다.
“맞구나, 이 살인마!”
남자가 빠르게 서연 쪽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