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서연은 옷장에서 검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오늘은 엄마와 동생의 기일이었다. 성인이 된 후로는 매년 이 옷을 입고 둘을 만나러 갔었다.
서연은 검정 리본으로 장식된 핀을 머리 옆쪽에 찔러 넣었다. 한참 동안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있으니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
태현이 문 앞에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올해는 나도 같이 가게 해주면 안 될까?”
태현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와 동생을 보러 갈 때면 서연은 항상 혼자 움직였다.
엄마와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녀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 약속한 일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태현은 단정하게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 때문인지 온통 검은색이라 색을 빼앗긴 사람 같았다.
서연은 태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탈색한 채로 밝은색의 머리칼만 고집하던 그는 검은색으로 염색을 하고 나타나 아버지인 신경준 의원을 찾아갔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돕게 해달라고 했다. 꽤나 달콤한 정보도 함께였다.
“그래. 같이 가자.”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현이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연은 조금 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보다 조금 더 확실하게 네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연은 그러지 못했다. 정확히는 하지 않았다.
태현은 서연을 잘 따랐다.
그녀가 첫 발현의 순간에서 그를 구해주었기 때문인지, 혹은 에스퍼로서 가이드에게 생기는 의존성 때문인지, 정말로 그녀를 친누나로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연은 그런 태현이 필요했다. 그녀보다 쉽게 정보와 힘을 얻을 수 있으나 배신하지는 않을 그런 존재가.
서연은 연신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현은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서연의 손을 잡았다.
서연은 태현과 함께 센터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검은색의 차 한 대가 둘의 앞으로 와 섰다.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
본가에서 보낸 모양이었다. 서연의 양아버지인 신경준 의원은 다른 건 몰라도 이날만큼은 잊지 않았다. 서연이 차에 올라타자 태현도 따라서 탑승했다.
“오늘은 도련님도 가시는 건가요?”
“네.”
비서가 묻자 태현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개입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서연과 태현은 추모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서 침묵했다.
추모 공원은 산과 바다가 모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서연은 태현을 이끌고 커다란 납골당 건물을 지나쳐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
태현이 물었다.
“엄마랑 가연이는 다른 데 있어.”
가연이. 너무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태현은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나오는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다.
“…여기야.”
서연은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앞에 섰다. 나무 아래에는 기둥형으로 만들어진 유골 안치함이 있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진열장 안에는 엄마와 가연이 웃고 있는 사진이 액자에 전시되어 있었다.
태현은 조용히 서연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나무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엄마, 말한 적 있지? 새로 생긴 동생이야.”
태현이 나지막하게 인사하자 서연이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서연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나뭇잎을 손으로 살살 쓸어보던 서연은 챙겨온 나무용 영양제를 흙바닥에 잘 고정시켰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서서 태현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비밀 하나 이야기해 줄까?”
“…응.”
서연의 질문에 어쩐지 태현이 긴장한 표정을 했다. 서연은 살짝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유골함에는 유골이 없어. 그러니까 엄마도, 가연이도 없지.”
“뭐…? 그럼 어디에 있어?”
태현의 얼굴이 당황한 듯 멍하니 굳어졌다.
“이렇게 하면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자랄 수 있지 않겠니. 네가 성인이 되고 나면 찾아올 때마다 그늘을 드리워 줄 거야.”
서연은 양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플라타너스 나무의 꽃말은 휴식이라고 일러준 것도 그였다. 휴식이 필요할 때면 이곳을 찾아와 쉬고 가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그는 서연에게 너를 위해서라도 꼭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이 서연을 살게 했다.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기꺼이 하게 했고, 앞으로 하게 될 일 역시 망설임 없이 하게 할 것이다.
“내 마음속에는 여기 있는 게 맞으니까. 그럼 된 거지.”
“…누나.”
태현이 슬픈 눈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손을 들어 태현의 눈을 가렸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서연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신경준 의원의 말이 맞았다. 엄마와 가연은 사진 속에선 언제나 그대로였지만, 그녀와 함께 자랐다. 무성한 잎들을 키워낸 나무는 매년 그녀의 머리 위에서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었다. 여태까지 그가 맞았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연은 속으로 되뇌었다.
“센터에 들어가던 날, 기억나?”
서연이 묻자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손을 들어 서연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때 내가 많이 울었지, 아마.”
태현의 말에 서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난 그날 조금 들떴었던 것 같아. 드디어 내가 바라던 일이 시작되는구나 싶어서.”
“…….”
“내가 센터에 스스로 들어간 이유는 딱 하나야.”
“누나.”
태현이 나지막하게 서연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센터를 무너뜨리고 그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야. 나는….”
태현이 손을 뻗어 서연의 눈가를 훔쳤다. 볼이 축축했다. 아. 내가 울고 있구나. 그때 서연은 깨달았다.
“멈추지 않을 거야.”
서연이 지금 하는 것은 맹세였다. 서연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두 주먹을 꼭 쥐고 떨면서 했던 그것이었다.
그리고 태현에게 하는 마지막 경고였다.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갈 것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태현은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를 죽여서… 죗값을 치르게 되면 면회나 와줘.”
농담처럼 던진 말에 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현은 서연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럴 일은 없어.”
태현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아.”
다짐하는 듯한 목소리에 서연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래, 알겠어.”
뭘 알겠다는 건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서연은 늘 그렇듯 태현을 달래는 말을 했다.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둘의 등 뒤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무가 드리워 주던 그늘이 희미해졌다.
“이제 가자.”
서연의 말에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올게.”
서연은 엄마와 가연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태현이 따라붙어 서연의 손을 슬그머니 그러쥐었다.
“넘어질까 봐.”
우스운 변명이었다. 서연은 태현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시늉을 했다.
“아, 누나!”
태현이 다급하게 서연의 팔을 붙잡고 중심을 잡았다. 바보. 서연이 웃자 태현이 밉지 않게 째려보았다. 그러다 같이 웃기 시작했다.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언덕을 내려갔다.
***
민재는 회의실에 앉아 정승규가 받았다던 협박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승규의 숙소에서 은정과 호영이 찾아낸 것이었다.
죄와 값이라. 정승규가 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이던가? 내용은 조잡했지만 누구인지 짐작하기 어렵게끔 만든 것은 확실했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민재의 팀원들은 모두 정승규를 찾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으나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정승규 주변에서 원한 관계에 있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열심히 뒤져보았으나 건진 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치야.”
은정이 말했다. 그녀는 몇 번의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계속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그런데?”
은정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선뜻 움직이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민재는 한숨을 삼키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망할 놈의 두통이 또 올라오고 있었다.
“구조 요청도 없었잖아. 도망이 아니라고 확신할 방법이 없어.”
행정실 쪽에선 그를 도망자라고 칭했다. 그건 센터장의 의견이라는 뜻이었다. 별다른 증거 없이 납치라고 일을 벌이는 건 좋지 않았다.
“하… 미치겠네.”
은정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쿵 하고 꽤 큰 소리가 났다. 은정이 웅얼거리면서 혼잣말을 했다.
“진짜 너무 생각이 많아. 정말 납치라면 이미 늦어버린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민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근데 만약 납치를 가장한 거라면….”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요?”
말끝을 흐리는 은정에게 지환이 물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은정은 여전히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선배, 이게 맞을까?”
은정이 물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간절히 센터를 나가고 싶어 도망을 친 거라면? 협박 편지도 그 준비의 일원이었다면? 하는 가능성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민재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만약 정승규를 찾아냈는데, 그가 센터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놓아달라고 하면?
그러면 그를 억지로 데려오게 될까. 아니면 놓아주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도망자라면 굳이 협박 편지를 이용했을 것 같진 않았다.
도주가 납치 사건으로 간주되면 구조를 위한 수색대가 꾸려지고, 언론에도 보도가 될 것이다. 그럼 포위망만 좁혀지게 될 터였다.
정승규는 수색대가 바로 꾸려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예측했을까? 혹은 센터 내부의 상황을 전달해 줄 조력자가 있다면?
민재는 자신의 가까이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지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민재는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승규의 목숨이 위험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센터장이 따로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다. 민재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한쪽으로 단정을 지을 수가 없으니, 나는 정승규 에스퍼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어떻게?”
은정이 물었다.
“그러려면 일단 이 건을 마무리해야 해.”
“뭐? 그냥 끝낸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은정이 되물었다. 그러나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완전히 ‘도망자’로 낙인찍지 않은 채 수색을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