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민재는 은행으로 들어가 대기표를 뽑고는 대기석에 앉았다.
지금 들어온 은행은 센터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센터에서 성인이 된 후 기본적으로 만드는 에스퍼 전용 신용카드를 거래하는 은행이니 정보를 열람해 보기에도 적합했다.
따라 들어온 지환도 민재의 곁에 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돈 출금하시게요?”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출금한 이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게.”
“출금이요? 굳이 현금 들고 다니지 않아도 카드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나요?”
지환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추적이 쉽잖아. 현금은 인출한 건 기록에 남지만 그 후로 추적이 어려우니까.”
“아….”
지환이 민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지환은 왜인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민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일 낮인데도 은행에는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야, 얼마를 뽑았을 거 같아? 도망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민재는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환을 팔꿈치로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인출 기록에서 어떻게 유추하면 좋을까 싶어 한 질문이었다.
“음… 일단 이삼백…?”
“그렇게 적게…?”
“선배님… 저 월급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요.”
아.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영향을 미치겠구나. 정승규는 민재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에스퍼니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비슷할 수도 있었다.
“선배님은 얼마를 인출하실 것 같아요?”
지환이 역으로 물었다.
민재는 잠시 고민해 보았다. 얼마가 좋을까.
사실 민재도 어렸을 때부터 센터에서 자랐기 때문에 경제관념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정해진 숙소에서 살고, 센터 내부에서 밥을 먹을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멀리 도망치는 게 좋을까. 그러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선 오히려 가까이에 숨어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순식간에 너무 멀리 가버리면 센터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파악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한 일이천?”
“…저도 금방 모을 수 있어요.”
민재의 말에 지환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 전 지환이 언급한 금액을 적다고 한 것을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민재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돈을 찾고 나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선배님은?”
“음… 그때가 되어봐야 알지 않을까.”
세세한 도주 경로에 관해서는 별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에 맞게 움직일 텐데.
정승규의 목적은 무엇일까?
민재가 고민에 잠기던 찰나에 그가 들고 있는 대기표의 순번이 전광판에 떴다.
“선배님.”
지환이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당 창구로 향했다. 지환 역시 따라와 민재의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세요. 지점장님을 좀 뵙고 싶은데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간 민재의 말에 은행원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고객님,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으셨나요?”
민재는 에스퍼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임무 수행에 필요한 것이 있어 협조 요청을 드리려고요.”
“헉. 무슨 일이신지….”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보고 민재를 알아본 은행원이 조금 전보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물었다.
도주 가능성이 있는-심지어 정확한 정보도 없는 상태인- 에스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면 은행이 시끄러워질 가능성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은행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전화로 지점장을 호출했다. 지환과 민재는 곧이어 은행 안쪽에 있는 vip실로 안내되었다.
지환은 주위를 살짝 경계하며 민재의 곁에 붙어 걸었다. vip실이라고 하면 눈을 빛내며 좋아할 것 같았는데 조금 의외의 반응이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인가요?”
지점장은 정승규의 출금 내역이 담긴 서류를 내밀며 물었다. 민재가 요구하자마자 두말없이 준비해 온 것이었다.
쓸데없는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으나,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정승규의 최근 6개월간의 통장 입출금 내역이 낱낱이 적힌 종이를 얻는 게 이렇게 쉽다니.
“지금은 대피가 필요한 사항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민재는 간단한 정보로 지점장을 달래고는 은행을 나왔다. 지점장은 그리 안심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그건 민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민재와 지환은 서류를 들고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바깥의 더위를 느끼자마자 민재의 발걸음이 다시 느려졌다. 민재는 행정실에 문자로 정승규의 사진 파일을 전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돈을 뽑은 기록이 없는데요…?”
지환이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정말 정승규는 큰돈을 뽑은 기록이 없었다. 그리고 실종 당일 이후로는 돈을 사용한 기록도 없었다.
“…그럼 다시 머물 만한 숙소를 찾아보러 가나요?”
지환이 고민하는 듯 말없이 걷다가 물었다. 민재는 빠르게 도착한 정승규의 사진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지환을 훑어보았다.
흰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은 지환의 옷차림은 평범했으나 키가 커서 그런지 눈에 띌 것 같았다. 또 이렇게 보니 쉽게 잊힐 만한 흐릿한 인상은 아니었다.
이렇게 계속 같이 다니게 될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인터뷰 사진에 손 좀 봐둘걸. 민재는 약간의 후회를 했다.
민재는 손을 올려 지환의 머리를 헝클였다. 지환은 의아한 듯 민재를 바라보면서도 허리를 살짝 숙여 민재가 편안하게 머리를 만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민재는 지환의 앞머리를 옆으로 갈라 이 대 팔 가르마를 만들어보았다. 이렇게 보니 인상이 좀 다른 것도 같았다.
“따라와.”
민재는 그대로 지환을 데리고 근처 안경점으로 데려가 도수가 없는 안경테를 지환에게 씌웠다. 가르마를 만들어놓았던 머리칼을 다시 헝클어뜨리고는 앞머리를 내려보았다.
지환은 순한 양처럼 민재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너도 얼굴 노출이 많이 되었으니까 돌아다닐 땐 대충이라도 변장해서 다녀.”
“…네.”
웬일로 지환은 반문하지 않고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민재는 힐끔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평온한 얼굴로 민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적이 되기 쉬우니까.”
조금 민망해진 민재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민재의 얼굴 위에 선글라스를 하나 씌웠다.
“그럼 선배는 이거 쓰세요. 밖에 아직 햇빛 눈부셔요.”
민재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는 사각형의 렌즈로 되어 어쩐지 촌뜨기 같은 인상을 주었다. 뭐, 차라리 이게 낫나. 민재는 지환의 안경과 자신의 선글라스를 결제했다.
둘은 곧장 근처 낡은 모텔로 향했다. 허름해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외관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었다.
민재는 곧바로 프런트라고 하기 민망한 작은 창문 앞으로 가 노크를 했다. 잠시 후 창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성이 민재와 지환을 힐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방 하나?”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내밀어 정승규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 여기 방 얻은 적 있어요?”
“모르겠는데?”
입구를 지키고 있으면서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도 모르나.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동네에 뭐 흉흉한 일 있어? 총각들 어디서 나온 거야?”
사장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민재와 지환을 바라보았다.
에스퍼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누굴 찾고 다녔다는 소문이 나선 안 될 일이었다. 민재는 재빠르게 지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희 형인데 도박에 미쳐서 집에 안 들어와서요.”
형사나 사설탐정인 척을 할까 싶었지만, 순간 지환의 더벅머리-자신이 만든 것-와 안경을 보자마자 그건 좀 어렵겠다 싶었다.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누르며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세요.”
지환은 민재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장단을 맞추었다. 어색한 말투긴 했으나 안경과 머리 때문에 얼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젊어 보이는데 도박을 해? 어휴. 아무튼 여긴 온 적 없어.”
사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민재와 지환은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둘은 동일한 방식으로 주변 숙소들을 돌아다녔으나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6번째 연기를 마치고 건물을 나오고 나서는 지환의 제안으로 피시방이나 24시간 운영하는 카페, 만화방도 돌아다녀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복귀하자.”
민재가 말하자 지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분간은 이렇게 들쑤시고 다녀야 할 테니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찾은 둘은 해가 지고 있는 붉은 하늘 쪽으로 날아올랐다.
***
정승규가 사라지고 2주가 지났다. 그는 도망을 준비했던 것이라면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은정과 호영은 센터 내에서 그가 떠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내비쳤거나, 그럴 이유가 될 만한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러 다녔으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민재와 지환은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조사해 보았으나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제1팀의 회의 시간은 은정의 한숨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니 근데, 이렇게까지 동기가 없으면 납치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민재는 책상에 엎드린 채 말하는 은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정승규가 협박 편지를 받았단 사실을 알고 있는 은정은 정승규를 도망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펼쳐왔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납치로 단정 짓기도 어려웠다.
“납치는 보통 인질을 잡는 거니까 센터 쪽으로 무언가 언질이 있어야 하는데, 기간이 너무 길어. 가족들 쪽으로도 연락 온 게 없다고 하고.”
“아, 진짜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어디로 간 거냐고.”
은정이 짜증 섞인 한탄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납치해 놓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건 어떤 경우일까요?”
호영이 고민하는 얼굴로 물었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납치범의 목적이 살인과 고문, 혹은 복수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가정이었다.
민재는 더 어두워진 얼굴로 앉아 있는 은정의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은 어느 경우든 빨리 찾는 게 중요하지. 도망과 납치 어느 쪽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두 가지 가능성을 잘 염두에 두고 움직이자.”
시간이 늦어질수록 정승규의 목숨이 붙어 있을 확률이 떨어진다. 최악의 경우, 에스퍼 폭주 신고로 그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었다.
실종 당시 가이딩 수치가 어땠더라? 민재는 우석에게 다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의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