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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84)화 (8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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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빠르게 더워지고 있었다. 더운 걸 싫어하는 민재는 좀비처럼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팀 회의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민재는 짜증 섞인 얼굴로 회의실로 향하던 참이었다. 그런 민재를 녹고 있는 소프트아이스크림 보듯이 초조하게 본 지환은 재빠르게 손 선풍기를 들어 올렸다.

원의 중심부에 혀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선풍기였다. 민재는 지환이 꼭 저 같은 걸 골라왔다고 생각하며 힘없이 손을 휘적거렸다.

“야… 그냥 너 해라….”

“전 별로 안 더워요.”

어떻게 안 더울 수가 있지? 민재는 쌩쌩해 보이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환이 민재의 목덜미 가까이에 선풍기를 가져다 대었다. 선선한 기운이 등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움직이는 게 귀찮아진 민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환이 쐬어주는 바람을 즐겼다.

“야, 민재 매니저~”

그때 뒤쪽에서 놀리는 듯한 말투의 인사가 들려왔다. 은정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은정 선배님.”

지환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은정이 고개를 까딱이고는 민재를 향해서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야, 민재 매니저가 뭐야.”

“뭐긴 뭐야, 선배 페어 별명이지.”

민재의 질문에 은정은 그것도 모르냐는 말투로 대답했다. 매니저는 무슨 매니저. 민재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은정을 바라보자 은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얘랑 선배 요즘 센터 유명 인사잖아. 맨날….”

은정이 말을 하다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힐끔 보니 지환이 고개를 저으면서 무언가 어필하는 것 같았다. 뭔데? 민재는 손을 들어 그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선배 일정 얘가 뻐꾸기시계처럼 읊고 다니잖아. 선배님, 이제 어디 가시면 되는데요.”

은정은 지환을 가리키며 그의 흉내를 냈다. 지환이 늘 그러듯 민재 쪽으로 얼굴을 들이민 채였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민재는 눈을 깜박였다. 아, 선배님. 민재의 손 뒤에서 지환이 은정을 말리는 듯 말하는 걸 보니 진짜 그런 별명이 돌아다니긴 하나 보다 싶었다.

별로 문제가 될 만한 소문이나 별명은 아닌 듯했다. 아니 근데 왜 매니저지? 일정을 읊어주는 거면 개인 비서나 뭐 그런 호칭이 붙어야 하는 거 아닌가. 민재는 생각하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민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민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행정팀에서 발송된 문자였다.

-도망자 신고. 이름 정승규. 능력 빛. 등급 C. 나이 29세. 출장지에서 종적을 감춘 지 5일 경과.

정승규…? 낯이 익은 이름을 확인하고 민재가 당황하는 순간 뒤이어 다른 문자가 날아들었다.

-1팀만 움직이세요.

재수 없는 센터장의 문자였다. 도망자 관련 정보는 민재에게만 발송되었을 터였다. 만에 하나 승규를 잡지 못한다면 문제가 커질 테니 비밀리에 빨리 잡아다 놓으라는 뜻이었다.

민재의 얼굴이 굳어지자 지환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민재는 주머니에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묵묵히 걸음을 재촉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팀 회의실에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호영이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어. 어. 앉아.”

민재는 상석에 앉았다. 팀원이 전부 다 자리에 앉고, 민재는 눈가를 손으로 몇 번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승규는 민재보다 조금 늦게 발현한 에스퍼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능력이 약한 편이라 센터보다 지방에 머무는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릴 때 에스퍼 학교에서 만났던 인상으로는 센터에서 딱히 한자리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이렇게 위험을 감수할 만큼 센터 탈출을 염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지만, 행동의 이유를 좀체 알 수 없었다. 민재는 손을 내리고는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팀에 최우선 임무가 하나 내려왔다.”

“극비인가요?”

호영이 물었다.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환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도망자가 생겼어. 최대한 신속하게 잡아와야 하는데 문제는… 정보가 없어.”

“도망자요?”

지환이 물었다.

센터에서 도망쳤다는 거야. 호영이 작은 목소리로 답을 해주었다.

“그런 게… 가능해요?”

왜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지환이 민재에게 물어왔다.

“끝이 안 좋지.”

민재는 담담하게 답을 했다. 여태까지 센터로부터 달아나 완전히 종적을 감춘 에스퍼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번 공급받던 가이딩이 없으니 불법으로 유통되는 가이딩 물품에 의존하거나 버티는 방법밖에는 없었는데, 그러다 보면 명줄을 재촉하게 되거나 결국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잡혀 들어온다고 해서 멀쩡하게 예전처럼 살게 놔두지도 않았다.

“누군데?”

은정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은정이 정승규와 나쁘지 않게 지내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민재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정승규.”

“뭐어? 말도 안 돼.”

은정은 예상대로 딱 잘라 말했다. 호영과 지환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정보가 잘못된 거 아니야?”

“최근에 만난 적 있어?”

민재의 질문에 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한… 두 달 전에. 산사태 난 곳에 떨어진 돌 주우러 갔었는데 거기 있더라고.”

“그때 이상한 낌새 없었어?”

“아니, 낌새고 뭐고 그 선배 성격이….”

은정은 말끝을 흐리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민재는 말을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 생각났어. 이상한 거 있다. 그 선배 협박 편지 받았어.”

협박 편지? 민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 사람이 협박을 당할 일이 뭐가 있지?

“그 사람 성격이 변했어?”

“아니? 그래서 나도 더 황당했지. 그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내용이 뭐였는데? 봤어?”

민재가 묻자 은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확한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며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다.

잠시 후 은정이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뭐… 네 죄를 알라고 하면서 값을 치르게 될 거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뒤에서 뭔 일을 벌인 건가? 생각하는 민재에게 은정이 덧붙였다.

“본인도 그런 편지를 받은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어.”

알게 모르게 원망을 사는 타입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근데 거짓말이 아니라면 협박 편지와 그의 도주를 연결 지을 수도 있나? 그 협박 편지는 너무 정보가 없었다. 협박이라기엔 오히려 저주에 더 가깝지 않나.

“납치가 아닐까?”

은정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을 제외할 수는 없지만 이상했다.

에스퍼를 납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성격도 얌전하고 조용해 눈에 띄질 않는 데다가 꽤 흔한 편인 빛의 능력에 등급도 낮은 그를 굳이 누가 납치까지 한단 말인가.

뭐에 쓰려는 거지? 그 순간 민재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교주가 말한 제삼자의 움직임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째서 정승규 같은 에스퍼를 납치했지?

“…그 가능성도 아예 버리고 갈 수는 없겠지.”

민재의 답에 은정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안심하는 것 같았다. 정말 정이 많다니까.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우선은 조를 짜서 발품을 팔아야겠다. 정승규가 다녔던 곳이나 갔을 법한 곳들 다니면서 도망과 납치 둘 다 가능성을 두고 조사하자.”

민재가 이야기하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

아주 자연스럽게 민재와 지환, 그리고 은정과 호영으로 조가 짜였다.

은정과 호영은 가장 최근의 행적부터 조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민재와 지환은 ‘정승규’가 갈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민재와도 딱히 사이가 나쁠 건 없지만 자주 만나진 못하는 편이라, 그는 정승규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센터를 나가면… 어디로 갔을까. 고민하는 민재를 슬쩍 살핀 지환이 질문을 했다.

“어디로 갈까요?”

“글쎄다….”

민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센터를 나가면 가고 싶을 만한 곳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지환이 말했다. 민재는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넌 뭘 하고 싶은데?”

“…네?”

“넌 센터 나가면 뭐가 하고 싶냐고.”

“선배는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물었더니 지환은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역으로 민재에게 물어왔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이나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민재는 따로 보러 갈 사람도 없었다. 민재가 대답하지 않자 지환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 사람이요. 부모님을 만나러 갈까요…?”

“센터가 가장 먼저 추적하는 곳일 텐데? 그 선배가 능력은 약해도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할 것 같진 않아.”

“…조금 안쓰럽네요.”

지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도망을 쳤다 해도 그 동기를 알 수 없으니 추적이 더 어려웠다.

사라진 지 5일. 날짜를 곱씹던 민재는 문득 그가 어디서 숙박을 해결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박업소를 털어볼까?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짚었다.

“일단 근처 시내 가보자.”

지환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민재는 지환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에게 업혔다.

지환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내에 도착해 숙박업소를 찾아보자는 말에 지환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호텔을 가리켰다.

“저기부터 가볼까요?”

“…저긴 너무 눈에 띄지 않아?”

민재는 지환이 가리킨 호텔을 검색해 보았다. 가격대가 상당한 숙소였다. 민재는 핸드폰 화면을 지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너는 도망치면 하루 안에 잡히겠다.”

헉. 가격을 보고 놀라 신음을 낸 지환은 건물 외관에 비해 너무 비싼 거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민재와 지환은 계속해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햇빛이 강해서 걸음마다 힘이 쭉쭉 빠졌다. 지환은 계속 선풍기 바람을 쐬어주며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어디라도 들어갈까요? 선배 뭐 좀 시원한 거라도 마실래요?”

지환의 말대로 어디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민재의 눈에 몇 발자국 앞에 있는 은행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에스퍼 카드를 쓸 수는 없을 테니 현금이 꽤 필요했을 텐데. 그 생각을 한 민재는 손가락으로 은행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업어드릴까요?”

지환은 민재와 은행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민재가 급하게 더위 피난소를 선택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민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본 뒤 제 발로 은행에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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