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민재는 우석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지환이 자신을 꽤나 뜨거운 눈빛으로 보는 것 정도는 민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우석이 말하는 ‘좋아한다’는 어쩐지 의미가 다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뭐, 이쪽에 동경심이랄까 그런 게 있는 애인 데다 내가 직속 선배니까….”
어물거리며 말을 하는 민재에게 우석이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 동경 그런 거 아니고 너 좋아한다고. 우정이나 동경 말고 사랑이라고.]
“뭐…?”
[실수라는 거 보니 걔가 키스라도 했어?]
아, 미친. 민재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세면대의 물을 튼 민재는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을 찬물에 적셨다. 참나. 우석이 어이없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넌 괜찮다고 했고?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우석은 혹시나 험한 일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피해 다니길래 적당히 분위기 풀고 지내려고 그랬지. 지도 실수니까 그렇게 숨어 다녔을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두렵나 보지.]
“뭐가.”
내가 뒤지게 팰까 봐? 내가 그 정도 이미지인가. 민재는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티 나면 완전히 밀려날까 봐.]
그 말을 하는 우석의 목소리가 어딘가 씁쓸하게 들렸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우석이 물었다. 어떻게, 라니. 민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환이 자신을 향해 성애적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벅찼다.
“야… 확실해? 걔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박지환도 좀 불쌍하네.]
우석이 동정 어린 목소리로 지환을 걱정했다.
“야, 뭔데. 네가 틀릴 수도 있잖아!”
[그래. 그래. 아무튼 크게 심각한 상황 아니면 됐다.]
심각한 민재를 남겨두고 우석은 바쁘다며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동안 손에 계속 찬물을 끼얹으며 열을 식힌 민재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환은 자신의 몫인 햄버거를 다 먹은 상태였다.
민재는 어쩐지 지환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워 다 녹아버린 밀크셰이크를 휘적거렸다. 그때 지환이 민재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제 방에서 자고 갈래요?”
“…왜?”
“피곤하시잖아요. 다크서클 내려왔어요.”
평범하고 담백한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슬쩍 민재의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밖에 나와서 밥 먹고, 같은 방에서 자고? 진짜 이거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민재는 왠지 지금 지환의 제안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뭐 하려고?”
무심코 튀어나간 질문이었다. 지환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냥 푹 주무시고 가면 돼요. 아니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민재는 다른 건 몰라도 유독 연애 쪽으로는 무지했다.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몇 번의 고백을 받아보긴 했으나 곧바로 거절했기 때문에 이렇게 애매한 관계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센터에서 사랑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진짜 우석이 말대로 그런 건가? 얘 나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나? 민재는 지환이 이렇게 요상하게 구는 걸 콕 집어서 말하는 게 좋을지, 잠자코 있는 게 좋을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저는 선배님 페어고, 후배니까 이 정도는 그냥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는 지환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면서 민재는 고민했다.
사실은 그냥 실수를 만회하고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내고 싶은 건데 내가 오버하는 건가? 본인 입으로 날 좋다고 한 것도 아니고.
[두렵나 보지.]
우석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멀어질까 두렵다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아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나? 민재는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환의 말대로 둘은 계속 같이 다니게 될 페어였다. 민재 자신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먼저 지환의 실수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않았나.
민재는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최선인 쪽을 선택해야 했다.
잠시 후, 민재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지환의 현재 상태에 맞춰 모른 척을 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지환의 제안은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으나 민재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민재는 지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오늘도 신세 좀 질게.”
“네!”
지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실실 웃는 모습이 익숙했다. 민재는 그런 지환의 모습에 같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환은 그의 방으로 민재를 들여놓고도 이상하게 굴지 않았다. 그저 평이한 태도로 이부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구석에 붙어 잠을 잤다.
민재는 두어 개의 악몽을 꾸었으나 그때마다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 손길에 이내 곧 고요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둘의 ‘평범한 선후배 관계’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이전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같이 밥을 먹고, 훈련을 했다. 지환의 곁에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잠을 잤다.
민재가 이따금 사무실에 들를 때도 지환이 따라붙게 된 것과, 지환이 이전보다 민재의 잔심부름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
오준은 구인 광고를 모아두는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구석에 조그맣게 창을 띄운 채였다.
이렇게 많은 곳에서 인재를 필요로 하는데 왜 내 자리는 없는 거 같지. 오준은 씁쓸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스크롤을 내렸다. 그때 갑자기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 불이 들어왔다.
[윤 비서.]
오준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네, 네! 센터장님.”
[잠깐 들어오지.]
센터장의 호출이었다. 한동안은 별다른 말도 없고 시키는 일도 거의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오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센터장실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짧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오준은 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안으로 들어서는 오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문을 닫고 입구에 선 오준은 진성의 눈치를 살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나요?”
“일단 좀 앉지.”
진성이 손을 뻗어 테이블 앞쪽에 있는 소파 자리를 권했다. 짧은 지시 사항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한숨을 삼킨 오준은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정작 사람을 앉혀두고 진성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놓지 않고 오준을 응시했다. 뭔데. 오준은 억지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건가요?”
“다른 곳에 서류를 넣었다지?”
헉. 결국 그때 만난 희망물산 대표가 알고 귀띔을 한 건가? 오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근데 그냥 서류를 파기하면 그만이지 일러줄 건 뭐야. 오준은 낭패감을 느꼈다.
“그….”
너무 오래 침묵해도 안 될 것 같아 입을 열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당당하게 여길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좋겠으나 자칫 잘못하면 관련 직종에는 발을 못 붙이게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일이라고 못 할 것까진 없었으나 진성의 아량에 따라 ‘관련 직종’의 범위가 어디까지 뻗칠지 알 수 없었다.
그 생각을 한 순간 오준은 자신을 죄는 목줄이 엄마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눈앞이 아찔했다.
“꽤나 여러 군데에 지원을 했던데.”
아니 시발. 이 새끼 발이 어디까지 넓은 건데. 각 기업의 대표라는 것들이 죄다 일러바친 거야? 아니면 부러 캐본 건가?
그러나 자신은 그저 문지기 노릇이나 하는 일개 비서였다. 대단하게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센터 내부의 속사정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까지도 아니었다. 이런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오준은 고민했다.
“…제가 아직은 부족해서 이곳에 계속 남아도 되는지 고민이 들었습니다.”
개소리지만 할 수 없었다. 오준이 지원한 곳을 확인했다면 죄다 크기가 크지 않은 곳들임을 알았을 터이니 그나마 적절한 답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윤 비서 덕분에 편하게 지낸 시간이 있는데.”
저게 진짜 개소리다. 오준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진성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윤 비서처럼 유능한 인재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좀 많이 아쉽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준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쥐꼬리만 한 회사라도 들어갈 자리를 남겨두려면 최대한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나가는 게 중요했다.
“어머님을 여의고 요즘 마음이 힘든 것은 알겠으나, 다시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네?”
순간 당황한 오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성이 굳이 자신을 붙잡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짜증 나서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리고 내쫓으면 몰라도.
오준은 눈을 깜박였다.
“당분간은 좀 더 머물러 보지. 의외로 이 자리가 자네한테 어울릴 수도 있지 않나.”
왜지? 오준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쓸모에 대해 생각했다.
진성의 유능하다는 평은 진심이 아니었다. 설사 오준이 정말로 유능하다고 치더라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오준이 나가면 진성에게 좋지 않다고 판단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오준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오준은 진성이 하는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가 만났던 이들 중 몇몇의 존재를 알고 있다. 진성이 하는 언론플레이 방식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 중에서 하나, 혹은 몇 가지가 진성의 목숨줄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아직 오준이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무언가.
오준은 진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오준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순식간에 손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진성의 권유는 권유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진성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장전된 총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좆됐다. 진짜 잘못 걸렸다.
잘못하면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매장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준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겠나?”
제대로 말을 하라는 듯 진성이 되물었다.
“네. 좀 더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배워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준은 자신이 무얼 깨달았는지 티 내지 않도록 열심히 말을 골랐다. 자신이 단어 선택을 알맞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겠네.”
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오준은 인사를 하고 센터장실을 나섰다.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