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지환은 급식실 입구에 서서 살벌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민재를 피해 몸을 돌렸다.
요 며칠 지환은 열과 성을 다해 민재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민재가 투박한 손길로 생크림을 덜어내 자신의 얼굴에 문질렀을 때, 지환은 가슴이 뻑적지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어난 날을, 축하받아 마땅한 날을 싫어한다고 말하던 그가 자신의 축하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주려 했다는 사실이 지환을 그렇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화를 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으로 그러는 것 같았으나 그런 것은 지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지환은 스스로가 민재를 생각하는 것의 십 분의 일이라도 민재에게 어여쁨을 받을 수만 있다면, 화난 민재에게 혼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얼굴에 얼핏 웃음이 어렸을 때, 지환은 그를 웃게 만들고, 울게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환은 민재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환은 복도 구석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저지르고 만 일이니 사과를 하거나 무어라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데, 민재만 보면 몸이 먼저 튀어 올라 부리나케 도망을 치고 있었다. 지환은 민재와 제대로 마주했을 때 민재에게 듣게 될 말이 두려웠다.
“네 마음 들키지 마. 진짜 한순간에 다 끝날 수도 있어.”
태현의 경고가 떠올랐다.
민재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럭저럭 괜찮은 후배’의 자리를 꿰찬 그였다.
그러고도 민재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환은 본인이 그 선을 넘으면 영영 궤도 밖으로 내쳐질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숨어 있는….”
무심코 대답하던 지환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숨어 계셨어?”
민재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끝났다. 지환은 눈을 질끈 감고 민재에게 들려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또 도망가 보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꽤나 살벌한 목소리에 지환이 착한 학생처럼 대답했다. 민재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지환은 민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지환이 그동안 상상했던 만큼 험악한 표정은 아니었다.
별로 화 안 나신 건가? 고민하는 지환의 어깨를 민재가 손으로 짚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지환은 우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태현이 조언한 대로라면 민재가 그렇게 생각하게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지환은 그러고 싶진 않았다.
“…됐어.”
민재에게서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지환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민재를 바라보았다.
“뭐… 따지고 보면 너도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런 실수는 할 수 있고.”
어? 선배가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지? 지환은 멍해졌다.
“그냥 뭐 분위기 때문이거나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 그냥 선후배 사이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라고 쳐.”
그렇게 말하는 민재의 목소리는 여상했다.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화를 내면서 다신 눈에 띄지 말라고 하는 경우까지 상상했으니 안심하고 기뻐할 법도 한데, 지환은 그러지 못했다.
“…선배님 화나신 게 아니라고요?”
“뭐. 딱히. 그러니까 그렇게 기겁하면서 도망칠 거 없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지환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찼다. 자신과 입을 맞춘 일 정도는 별일 아니라고 넘길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는 건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렇게 반응했을까? 이렇게 평온하게. 없었던 일처럼.
“그럼 선배님한텐 그 일이 흔한 일인가요?”
지환의 질문에 민재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답했다.
“뭐…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
민재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가 아닌 사람과 입을 맞추는 민재의 환영이 지환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지환은 목 뒤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며칠 내내 머리가 터져라 고민하던 일이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네. 알겠습니다.”
“…뭐?”
지환의 대답에 민재가 살짝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잘 알겠다고요. 선배님 말씀.”
지환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들킬 순 없었다. 민재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지환에게도 그래야 했다.
***
오준은 정시 퇴근을 위해 시계를 바라보며 조금씩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런다고 정시에 퇴근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바로 나갈 수 있게 정리해 두는 게 마음 편했다.
엄마를 보내주고 나서, 오준은 곧바로 일상으로 복귀했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했다. 그간의 병원비와 장례 비용을 생각하면 곧바로 퇴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퇴사를 하지 않을 거면 출근을 해야 했다.
시간이 평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의 일상은 변함없이 흘렀다. 퇴근하고 불 꺼진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오준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피로감에 깜박 잠이 들고 나면 다시 다음 날에는 출근을 했다.
오늘은 퇴근해서 새로운 이력서를 다시 수정해 보아야 했다. 한두 군데는 이미 지원서를 넣어보았으나 자신을 받아줄지 알 수 없었다. 이력서를 새롭게 작성하면서 오준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한때는 엄마가 없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는데, 최근 오준은 계속해서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우석에게 큰소리를 치고 상처를 줘놓고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자신이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일자리에 지원서를 넣게 되었다.
저녁 6시를 3분 앞두었을 때였다. 센터장실의 문이 열렸다. 오준은 몸을 일으켜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윤 비서, 운전 좀 하지.”
수행 비서는 또 어디 팔아먹고. 오준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수행 비서님은….”
“새로 구해야 해서. 빨리 구할 테니 오늘은 좀 부탁해.”
그건 부탁이 아니잖아, 개새끼야. 오준은 욕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장례식 이후로 원래 일하던 수행 비서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원래도 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모시는 인간이 같다 보니 이따금 마주칠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전혀 만나지 못했다.
그만둔 건가? 아니면 잘렸나? 오준은 왠지 모르게 존재감이 옅었던-자신과 비슷한 느낌의- 중년 남성을 떠올렸다.
김진성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들이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그 후로는 쉽게 바꾸려 들지 않으니 해고보다는 스스로 그만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준이 운전대를 잡자 진성이 주소를 불러주었다. 오늘처럼 진성이 운전을 시킨 날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딱 봐도 가격대가 있어 보이는 선술집으로, 슬쩍 본 내부는 개인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혔다. 오준이 빽빽한 도로의 틈 사이를 파고들어 차선을 변경하려 할 때였다.
“…어머님은 잘 보내드렸나?”
진성이 물었다. 특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은 무심한 말투였으나 예의를 차리는 듯 꽤나 진중한 목소리였다.
김진성은 오준에게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할 수 있게끔 일자리를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오준의 목줄이라는 것을 알고, 틀어쥐었다. 필요할 때면 개의치 않고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씨발 새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엄마를 들먹여. 이제 목줄이 사라져서 아쉽다 이건가. 오준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네.”
‘덕분에’ 같은 말이 더 나와야 할 법한 타이밍이었으나 오준은 간단한 답만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창문을 살짝 내렸다. 살짝 매캐한 매연의 냄새와 클랙슨 소리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로 예의상 했던 질문이었는지 진성은 오준에게 더 말을 시키지 않았다. 창문을 닫으라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오준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오준은 목적지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오준은 백미러로 뒤에 앉아 있는 진성을 슬쩍 살폈다.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약속 시간에 문제가 생길 만큼 늦진 않았길 바랐다.
“어! 김진성 센터장님!”
차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급하게 불을 끄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게 보였다. 선탠이 그렇게 짙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건지 신기했다. 차 자체를 알아본 건가.
오준은 그가 자신이 본 적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몰래 그 사람의 행색을 훑었다. 그러나 여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진성이 차 문을 열고 나서며 그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설마 술 처먹고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란 소릴 하지는 않겠지. 오준은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진성과 그 앞에 선 남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 윤 비서. 고마워.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장님 비서님이신가 봐요.”
“네.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는 인재입니다.”
진성은 언제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개소리를 지껄였다. 오준은 억지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참. 좋은 비서를 두신 것 같아 부럽습니다. 저도 최근에 비서를 채용하려고 하고 있거든요.”
“희망물산 대표님께서 여태 비서를 안 두고 계셨어요?”
“예. 뭐 제 사업이야 크기가 작으니 굳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최근에 좀 시도하는 것들이 생기면서 바빠지니까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희망물산? 오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며칠 전 이력서를 낸 곳이었다.
센터에 물품을 납품하거나 관련이 있는 기업들은 어느 정도 추린 다음 피해서 지원한 건데! 더군다나 희망물산은 중소기업이라기엔 크기가 조금 크고, 대기업이라기엔 아직 역부족인 느낌의 기업이라 안심하고 지원했다.
“허허. 그렇지요. 큰일을 할 때는 또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센터장이 은근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가 도와줄 것이 있다고 내비치는 것일까? 오준은 눈치를 슬쩍 살피다 한숨을 삼켰다.
희망물산에 자신의 서류가 통과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1차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오준은 면접에 갈 수 없었다.
저 새끼는 발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 거야. 오준은 심란한 마음으로 선술집으로 들어서는 진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센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오준은 완전히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 도로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