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생일 케이크를 들고 찾아와 대뜸 입을 맞추고 도망간 지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길 기다린 건 아니었으나 아무런 연락도 없으니 민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보통은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변명을 좆같이 하면 죽일 거지만.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민재 자신이었다. 지환이 무어라 말하든 간에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민재가 내린 결론은 지환의 변명을 들어보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민재는 아침이 되자마자 숙소를 나섰다. 민재는 고민을 하다 우선 지환의 숙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501호 앞에 도착한 민재는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자고 있었던 것인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면서 지환이 문을 열었다.
“헉!”
민재의 얼굴을 본 지환이 경악했다. 귀신을 보는 것처럼 굳어버린 지환 때문에 민재는 민망해졌다.
“그… 내가 여기 온 건.”
“안녕히 계세요!”
어제 이야기를 좀 해보자고 운을 떼려는데, 지환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가라는 것도 아니고 계세요…?
허리까지 꾸벅 숙여 보인 지환은 그대로 뒤를 돌아 뛰더니 창문을 열어젖히고 몸을 날렸다.
“야!”
민재가 고함쳐 불러보았으나 지환은 이미 저 멀리 허공으로 사라진 뒤였다. 아니 지 숙소잖아…?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남겨진 민재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황당한 것과 별개로 좀 열이 받기도 했다. 먼저 냅다 얼굴을 들이민 건 지환인데 어쩐지 자신이 소박맞은 기분이 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재는 지환의 숙소를 나와 다시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들이켜는데 한쪽에 놓인 케이크가 눈에 띄었다. 민재는 냉장고 문을 잽싸게 닫아버렸다.
지환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혈기가 왕성하고 호기심이 많을 나이니 착각을 하거나 분위기를 타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래 놓고 도망가 버리는 건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런 표정이라니.
민재의 머릿속에 질겁하며 뛰쳐나가 버리던 지환의 얼굴이 계속 떠다녔다. 그렇게까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을 게 있나? 내가 입술 갖다 박았냐고! 싸가지 없는 새끼. 재수 없는 새끼. 잡히면 뒤진다.
지환에 대한 욕을 구시렁거리던 민재는 다시 숙소를 나섰다. 지환을 잡아다가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듣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민재를 지배했다.
숙소 건물을 벗어난 민재는 숙소 건물 창문 쪽에 붙어서 날고 있던 지환을 발견했다. 자신의 숙소에서 민재가 나간 건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박지환!”
민재가 지환을 불렀다. 깜짝 놀란 것인지 벽을 발로 차서 건물에서 확 멀어진 지환은 두리번거리다가 민재를 발견했다. 민재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
지환은 침묵했다. 이 새끼가? 민재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그러나 지환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방향을 틀어 날아가 버렸다.
“저 새끼가?”
민재의 미소가 삐딱해졌다.
그는 그 후로 지환을 잡기 위해 센터를 돌아다녔다.
훈련장, 급식실, 웬만한 복도들을 계속 돌아다녔으나 지환은 보이지 않았다. 지환이 민재를 찾아 센터를 뒤지고 다니는 일은 흔했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센터 복도에서 민재를 목격한 에스퍼들은 신입이 이번에 아주 대형 사고를 쳤나 보다며 수군거렸다.
-내가 잡아내는 것보다 네 발로 오는 게 낫지 않겠어?
협박 문자도 보내보았으나 지환으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한동안 계속 센터를 돌아다니던 민재는 복도 구석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지환을 부르려는 순간 그가 민재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지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악!”
악? 짧고 굵은 비명을 남긴 지환은 다시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는 건지 벽에서 조금 튀어나온 기둥 부분에 머리를 박기까지 했다.
“뭐야?”
주변을 지나가던 에스퍼들이 수군거리며 민재와 지환을 힐끔거렸다. 머리를 감싸고 잠시 괴로워하던 지환은 다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민재는 열이 받았으나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그에게서 달아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실수로 입을 맞춘 것이 그렇게까지 후회되는 일이라면 가서 붙잡고 따져 물을 것도 없었다. 애초에 물어서 무슨 답을 들으려고. 답이 있다 쳐도 그 자리에서 곤란해지는 건 민재였다.
민재는 멀어지는 지환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
민재는 지환을 놓치고는 가이딩실로 향했다. 어제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기분이 저조할 우석을 달래러 가야 했다.
역시나 가이딩실에 들어서자 퀭한 얼굴로 프런트에 기대서 있는 우석이 보였다. 기대서는 것과 늘어짐의 중간쯤인 자세로 있는 우석은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민재가 가까이 다가가자 우석이 살짝 째려보는 게 느껴졌다.
“우리 우석이 잘 잤니.”
“…뭐?”
민재의 다정한 인사에 우석이 꽤나 까칠하게 반응했다. 민재는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은 내가 사줄게.”
“당연하지. 나쁜 놈아.”
“이 형을 기다리느라 밤새웠어?”
민재의 말에 우석이 인상을 썼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센터에 무슨 일 있어?”
“그것도… 아니다. 뭐가 좀 있긴 있지.”
우석은 피곤한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민재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은 민재를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서류 하나를 건넸다.
“에스퍼 발현 신고 건이 너무 적어.”
서류에는 분기별 에스퍼 발현 신고 접수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가 살아서 센터로 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신고 접수는 대체적으로 분기별 10~15명 사이가 평균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총 4건이 접수되어 있었다.
“까마귀에서 구조한 애들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아?”
민재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걔네는 나름 긴 기간 거기 있었으니까 지금 발현이 발생하지 않는 건 별개지 않을까 싶어서.”
“…어느 정도 평균치가 있었긴 하지만 에스퍼 발현에 어떤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랜덤이잖아. 어떤 점이 걸리는 거야?”
“그러니까. 에스퍼는 원래 자연적으로 생겨났잖아. 그럼 역으로 자연적으로 개체가 줄어들 수도 있는 걸까?”
우석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자연적인 개체 감소라. 그 가설을 따라가다 보면 에스퍼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발현하는 사람이 없고 남아 있는 에스퍼가 모두 사망하면 더 이상 ‘에스퍼’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곳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어떻게 될까. 새로운 인종도, 진화도 아닌 정말로 돌연변이에 불과하게 되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이것 좀 빌릴게.”
민재는 우석이 준 서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석은 어차피 다시 프린트하면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좀 만나 뵙고 싶은데요.
민재는 김 박사에게 문자를 넣었다. 자연재해 관련 현장을 두루 다니면서 에스퍼들과도 많이 접해본 데다 기현상을 연구하는 사람이니 뭐라도 물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응, 그래.
간단한 대답과 함께 김 박사는 주소를 입력해 보내주었다. 민재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민재가 도착한 곳은 김 박사의 집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2층 주택에 살고 있는 김 박사는 반갑다며 민재를 반겨주었다.
거실 소파에 민재를 앉힌 그는 얼마 전 새로 구매한 홍차를 내주겠다며 물을 끓이고 찻잔에 찻잎을 덜어 넣었다.
“좀 놀랐어. 날 보고 싶다고 해서.”
필요에 의해서 만나고 싶다고 했지, 보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다. 민재는 그걸 굳이 지적하진 않으려고 적당히 미소 지어 보였다.
“근데 무슨 일로 왔어?”
“이거 한번 봐주실래요?”
민재가 우석에게서 받아온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받아 들고 확인한 김 박사는 오, 하고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발현이 확 줄었네?”
“네. 최 실장이 자연적으로 줄어드는 건지 의문을 갖던데. 박사님 의견을 좀 구하고 싶어서요.”
“음.”
“최근에 뭔가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 적 있나요?”
민재의 질문에 김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내가 봤을 땐 없었어.”
“…그렇군요.”
김 박사가 다 우려낸 홍차를 민재의 앞으로 건넸다. 민재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잔을 받아 들었다.
“…먹어봐. 향긋해.”
민재는 차를 조금 홀짝였다. 꽃 향이 입안에 돌았다.
“발현이 자연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을까요?”
민재가 물었다. 김 박사는 민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민재 군은 어땠으면 좋겠는데?”
어땠으면 좋겠는지 같은 건 모르겠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그가 에스퍼가 아니게 되는 것? 혹은 차라리 정말로 인류가 변이를 이뤄서 모두가 에스퍼가 되는 것?
민재는 에스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고 싶냐 하면 그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원하는 건 상관이 없지 않나요.”
“그치. 우리가 뭘 원한다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지.”
허허. 김 박사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거네요.”
“상상 속 세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초능력자가 실제로 생겨날 거라고 누가 생각한 적이 있었겠어?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고, 그러니까 발현하는 사람들 통계도 생기게 된 거잖아. 어떤 것도 가능성이 제로일 수는 없지.”
“…에스퍼는 왜 생겨난 걸까요.”
민재가 물었다.
“그건 신만이 알겠지.”
“참나. 뭘 연구하신 거예요, 그동안.”
김 박사는 꽤 긴 시간 에스퍼가 생겨난 이유를 찾으려고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에스퍼와 가이드에게는 특유의 ‘에너지’에 해당하는 파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인물이었다.
당연하게도 히어로 센터에서 연구진 제의를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김 박사는 그 후 에스퍼에 관해서 깊게 연구하기보다 전반적인 세상의 기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민재의 말에 김 박사가 웃었다.
“사실 기현상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조금 드물다는 것뿐이지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나. 그리고 많은 기현상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더 이상 기현상이 아니게 되지.”
희소가치가 떨어진다는 건가. 민재는 생각했다.
“내 말은 에스퍼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거야. 자네 말대로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나 지금 내가 보기엔 당장의 수치 감소를 가지고 에스퍼의 발현 현상 그 자체에 대해 말하기엔 이른 것 같아.”
김 박사의 말에 따르면 에스퍼니 가이드니 하는 것이 별거 아닌 일처럼 여겨졌다. 그냥 평범한 사람의 일종과 같이. 민재는 그의 말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반년 정도는 더 지켜봐. 시간이 답을 주기도 하니까.”
김 박사가 덧붙였다. 민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