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경쾌하고 맑은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솜사탕을 만드는 기계에서는 달콤한 설탕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저 앞에는 커다란 관람차가 돌고 있었다. 공중으로 항해하듯 솟구치는 바이킹에 탑승한 사람들이 만세를 하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죄다 민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으므로, 그는 단숨에 꿈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은 무의식이 기억을 재조합해 만들어내는 풍경이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그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놀이동산의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민재는 조그마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민재야! 여기 봐!”
엄마가 그를 불렀다. 사용법도 잘 모르는 필름 카메라를 든 그녀는 몇 주 전부터 오늘을 준비했었다. 민재가 9살 생일을 맞이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특별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그의 부모는 맞벌이를 하느라 늘 바빴기 때문에 생일만큼은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려고 했었던 것 같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설렘과 즐거움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시는 이능력자-그 때는 에스퍼라는 명칭도 결정되지 않았다-가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사람들 사이에 불안감이 돌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놀이공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찰칵.
“민재야, 스마일~!”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엄마가 카메라를 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기는 했으나 이 순간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만큼은 기억이 났다.
“오늘 즐거웠어?”
아빠가 물어왔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과 달리 몸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이제 가야 하는데.”
아빠가 엄마에게 말을 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으려나. 아쉬웠나. 그런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아이스크림 사줘.”
민재의 말에 엄마와 아빠는 잠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울지 않고 집에 가는 거야.”
아빠는 주차장으로 향했고, 엄마와 민재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앞에는 몇몇 부모와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가장 끝에 민재와 엄마가 섰다.
가장 앞줄에 서 있던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세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는 조금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무릎과 팔꿈치가 까진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의 보호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민재의 몸이 줄을 이탈해 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당시에는 우는 이 아이가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는 돕는 것이라고 배우고 자란 민재는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를 잡고 바로 앉도록 도운 민재가 물었다.
“괜찮아?”
“아파….”
민재는 그 아이가 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뻗어 그 아이의 상처 근방을 살짝 쓰다듬었다. 호호- 입으로는 옅은 바람을 불었다.
그때 민재는 손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다친 아이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잠시 뒤 아이의 무릎과 팔꿈치의 상처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머나! 누군가 놀라는 소리를 내며 이름을 불렀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부른 사람이 달려와 민재의 앞에 있는 여자아이를 안았다.
“넘어졌니? 괜찮아? 너는 괜찮니?”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보고 민재에게 물었다. 그때 민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게 왜 이렇지…?”
여자아이를 살피던 여자가 의문을 표했다. 구멍이 뚫리고 피가 묻은 타이즈 안쪽에서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여자는 재차 아이의 타이즈 안쪽을 살펴보고는 소매를 걷어 팔꿈치도 다시 보았다. 그러나 아이의 팔과 다리는 매끈했다.
“이 오빠가 다 낫게 해줬어!”
아이가 말했다. 여자는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우민재!”
비명을 지르듯이 그의 엄마가 민재를 불렀다. 그를 자신 쪽으로 돌려세운 엄마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너, 너 왜 그랬어?! 어?!”
그가 자라면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아이스크림 같은 거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넘어진 아이를 보고 그냥 안쓰럽다고 생각만 했더라면. 다가가지도 않고 쓰다듬지도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민재의 눈앞에서 하얀 빛이 팍하고 튀어 올랐다. 너무 밝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
“헉!”
침대에서 눈을 뜬 민재는 숨을 몰아쉬었다. 땀을 많이 흘려 등허리가 축축했다. 이불을 걷어버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꿈을 길게 꾼 것인지 해가 지고 있었다. 민재는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5월 4일. 오후 7시.
아직 생일이었다. 민재는 매년 5월 4일이 다가오면 그날의 꿈을 꿨다.
그래도 민재는 생일 당일은 대부분 잠을 자는 것으로 때웠다. 오래 깨어 있으면서 생일을 하루 종일 실감하는 게 괴로워서 하는 선택이었으나 잠이 들면 악몽을 꾸니 도피도 별수 없긴 했다.
그래도 매년 부모의 얼굴을 보는 셈이니 민재에겐 일종의 연례행사이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연락해. 밥 먹자.
-착한 은정이 쿠폰 1개 증정!
차례로 우석과 은정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생일을 축하하는 걸 싫어하는 민재를 아는 둘은 축하 메시지 대신 다른 문자를 늘 남겨두곤 했다. 은정은 매년 착한 은정이 쿠폰을 줬는데 뭘 시키든 들어주는 쿠폰이었다.
은정은 굳이 쿠폰이 아니더라도 민재가 원하는 일이라면 대부분 들어주었기 때문에 쿠폰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어릴 때는 몇 번 정도 ‘하루 동안 민재가 고른 머리핀 하고 다니기’, ‘애교 부리기’ 같은 것들을 시켜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똥 씹은 표정으로 들어준 은정을 후에 달래는 것이 만만치 않아 그만두었다.
민재는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세수하고 나니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화장실을 나오는 민재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민재와 은정은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 지환일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하고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민재가 현관문을 열었다.
“무슨 일….”
“짜잔!”
핫핑크 바탕에 형광색 별들이 마구 그려져 있는 고깔모자를 쓴 지환이 말했다.
“선배님 생일 축하해요!”
초에 불을 붙인 케이크를 든 지환은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섰다. 민재는 살짝 비틀거리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방법이 있죠!”
지환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우석이나 은정이라면 절대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알려줬을 텐데. 민재는 싸늘한 눈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생일 초를 바라보았다.
“이거 제가 직접 만든 케이크예요…! 선배님, 촛농 많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초 불고 소원 빌어요!”
지환이 케이크를 민재에게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직접 만든 게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고르지 못하게 발린 생크림이 잘 보였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레터링도 적혀 있었다.
-히어로 우민재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걸 보는 순간 민재는 울컥 뭔가 솟구치는 감각을 느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해?”
“네?”
지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딴 거 누가 해달래? 아니면 해도 된대?”
“선배님 그게….”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민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윽박지르는 꼴이 스스로 우스웠다.
지환이 왜 이런 것을 준비해 왔는지 정말로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민재는 생판 남인 지환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 온 케이크를 보면서 자신의 지난 생일들과 엄마를 복기하게 될 줄 몰랐다.
“죄송해요. 선배님….”
지환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민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뭘 또 죄송해. 얜 진짜 멍청한 거야, 아님 호구인 거야.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민재는 지환이 여태 들고 있는 케이크를 뺏어 들었다. 촛농이 뚝뚝 떨어져 생크림 위에서 굳어가고 있었다.
“난 내 생일을 싫어해.”
사과를 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으나 민재는 그러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복잡한 인과관계를 설명하듯이 침착하고 여상한 말투로 민재는 자신이 화를 낸 이유에 대해 말했다.
“…왜요?”
“오늘이 발현한 날이니까.”
지환은 잠시 민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히어로의 삶을 살고 싶었다던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수도 있었다.
잠시 후 지환은 웃는 듯 마는 듯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뭘?”
“선배님이 처음으로 선배님의 이야길 해주신 거요.”
“왜. 몰랐으면 좋았겠다 싶어? 그럼 없던 일로 해도 돼.”
“아뇨, 그건 싫어요.”
지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환의 거절에 민재는 왜인지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민재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초를 불었다. 한 줄기의 연기가 두 사람 사이로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소원을 빌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민재는 초를 케이크에서 빼냈다. 그러고는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찍어 맛을 보았다. 지환이 조심스럽게 민재의 옆에 와서 섰다.
그저 평범하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맛있네. 고마워.”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안 드셔도 돼요.”
지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민재가 마지못해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정말로 케이크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이 생일이라는 것도, 아직 하루가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진짜야. 먹어봐.”
민재는 손으로 생크림을 푹 찍었다. 그리고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지환에게 가져가 그대로 코와 입 쪽에 묻혔다.
얼굴 중심부에 크림을 묻히고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퍽 바보 같았다.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지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뭐지? 생각하는 민재의 코앞까지 지환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더 가까이 올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지환의 코에 묻어 있던 생크림이 민재의 볼에 뭉그러졌다. 맞닿은 입술에서 달콤한 향이 밀려들었다.
잠시 후, 지환은 무언가에 놀란 듯 몸을 뒤로 빼더니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 덩그러니 남겨진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