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지환은 정체불명의 리듬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그 스스로도 몰랐다. 꽤나 삐걱거리기는 했으나 밝은 음정의 노래가 계속 이어졌다.
지환은 기분이 좋았다. 민재가 그에게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행정실 가서 에스퍼 전체 인적사항 좀 프린트해 달라고 해서 갖고 와. 간략하게 해달라고 해.
별일은 아니었으나 늘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민재가 지환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와 민재의 첫 만남과 그 이후에 있었던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작은 심부름도 큰 신뢰처럼 여겨졌다.
더군다나 얼마 전엔 민재가 지환의 방에서 잠을 자고 가는 일까지 있었다. 미간을 한 번도 찌푸리지 않고 민재는 푹 잠들었다. 옆에 누워 몰래 그 얼굴을 구경하다가 지환도 잠에 들었다. 고른 숨소리와 적당히 따듯한 온도. 모든 것이 안온한 밤이었다.
“…덕분에 잘 잤네. 고마워.”
지환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던 민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살짝 붓기가 있어 하얀 볼이 살짝 올라 있었다. 속눈썹 아래에서 검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덮어졌다 떠오르는 게 보였다. 지환에게는 그 시간이 무척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졌다.
지환이 스스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사이 민재는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곧바로 방을 나갔다. 지환은 저번처럼 민재가 자신을 피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재는 평소처럼 지환과 밥을 먹고, 같이 다녔다. 그의 일상에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환을 계속해서 들뜨게 했다.
심부름을 완벽하게 해내고 말겠어. 그렇게 다짐한 지환은 웃는 얼굴로 행정실 문을 열었다.
행정실은 꽤 삭막한 분위기였다. 에스퍼증을 발급받은 후로 딱히 와볼 일이 없었던 터라-그때 지환은 기뻐서 주위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지환은 어쩐지 조금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입구 쪽 자리에 앉아 타자를 치던 남자가 물었다.
“저… 에스퍼 전체 인적사항 프린트 좀 해주세요. 간략하게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건 왜요.”
이유가 필요할 줄은 몰랐던지라 지환은 잠시 당황했다.
“…어 …필요해서요?”
“어디에 필요하신데요? 그냥 에스퍼 정보를 달라고 하시면….”
“아! 저는 우민재 실장님이 시켜서 왔는데요….”
안경을 고쳐 쓴 남자는 지환을 힐끔 보더니 아, 하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페어인 박지환 에스퍼님이시네요.”
“네! 맞아요.”
“잠시만요. 여기 열람 신청서만 좀 작성해 주시겠어요?”
남자가 종이 한 장을 프린트해 건넸다. 지환은 종이와 펜을 받아 든 다음 근처 비어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작성을 시작했다. 간략하게 이름과 날짜, 시간을 적은 지환은 열람 사유 항목에서 머뭇거렸다.
-선배님 열람 사유 뭐라고 작성하면 될까요?
-팀 배치 확인.
지환의 질문에 민재가 빠르게 답했다. 물어볼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능숙한 느낌으로 선배의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지환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기억해 뒀다가 다음번엔 좀 더 잘해야지. 지환은 열람 사유를 마저 기재했다.
신청서를 제출하자 남자가 파일에 담긴 서류를 내밀었다. 지환은 파일을 받아 들고는 인사를 한 뒤 행정실을 나섰다.
간략하게 정리된 것인데도 두께가 꽤 있었다. 투명한 파일로 되어 있어 첫 페이지가 보였다. 지환은 서류 가장 앞쪽 상단에 있는 민재의 이름을 발견했다. 민재의 이름 옆에는 능력과 등급, 그리고 출생 일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어…?”
아무 생각 없이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지환이 눈을 크게 떴다.
출생 일자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면 민재의 생일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지환은 이전, 생일을 챙기고 싶지 않냐는 말에 민재가 되었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서연 가이드님 때처럼 모두 불러서 파티하고 이런 건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선배님 원래 조용한 걸 좋아하시니까.
지환은 단둘이서 조용히 축하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달력 어플에 민재의 생일을 추가했다. 그러고는 민재의 사무실 쪽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
오전 10시. 오준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센터를 나섰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아침 같지가 않았다.
척척한 습기가 오준의 몸을 파고들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그의 정장 바지를 적셨다. 물에 젖은 바지가 계속해서 무거워졌으나 오준은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의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 울렸다. 오준은 보도블록에 내려서서 마구 팔을 흔들었다. 택시 하나가 그의 앞에 와서 섰다.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정신을 차리니 병원 앞이었다. 오준은 두 배의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려서 엄마가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막상 도착하니 덜컥 겁이 났다. 오준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화장지로 젖은 머리칼을 정돈했다. 거울을 보니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들어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준은 손으로 옷의 구겨진 부분을 털어냈다.
잠시 후, 오준은 엄마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코에 산소 줄을 꼽고 있던 미경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더니 웃어 보였다. 오준이 입꼬리를 올리려고 애를 썼다.
“왔어?”
그녀가 물었다. 오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경의 곁에 앉았다. 미경이 손을 내밀자 오준이 두 손으로 붙잡았다.
“지금 어때. 많이 아파?”
“아니. 의사 선생님이 진통제 넣어주셨어.”
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며칠 사이 더 작아진 것 같은 미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때가 오면 할 말이, 해야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섣불리 말을 했다가 정말로 끝이 날까 봐 두려웠다.
미경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오준아.”
“응, 엄마.”
“엄마 아들 해줘서 고마워.”
“…….”
“네 덕분에 정말 행복하게 산 것 같아.”
미경이 말했다. 오준은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 엄마의 병원비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돈에 치인다는 핑계로 아파하는 그녀를 자주 찾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만 보는 그녀의 눈에 숨 막혀 한 적도 있었다.
“엄마. 왜 그래… 그러지 마.”
“괜찮아….”
미경의 목소리가 자꾸 가늘어졌다. 호흡도 느려지고 있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준은 미경의 손을 계속 고쳐 쥐었다.
“엄마.”
“응.”
엄마. 오준이 자꾸만 엄마를 불렀다. 미경이 손을 살짝 움직여 오준의 손을 작게 토닥였다. 그 순간 그는 마지막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사랑해요.”
오준이 말했다. 미경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경이 입을 달싹였다.
한동안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오준은 가만히 미경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심장박동이 멈춘 것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려온 뒤에도, 오준은 꽤 긴 시간 그녀의 곁을 가만히 지키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오준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엄마의 부고를 알려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어디에? 모든 것이 멍했다.
그는 우석을 떠올렸다. 오준은 휴대폰을 꺼내 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엄마가….”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갔다. 오준은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윤 비서님?]
“돌아가셨어요.”
[…어느 병원이에요?]
우석이 물었다. 오준은 병원 이름을 불러주었다.
오준은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엄마의 수첩을 확인해 몇 없는 그녀의 지인에게 부고를 알렸다. 다음은 뭐더라. 그는 계속해서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영정 사진 속 미경은 산 정상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고른 사진이었다. 가장 건강할 때의 모습이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등산이 취미라 온갖 산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땀을 흘리며 계속 걷다 보면 발아래 세상을 두는 것이 꽤 즐거웠다고. 그렇게 말하던 미경은 늘 미소 짓고 있었다.
오준은 구석에 앉아 하염없이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우석이었다.
오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절을 올린 우석이 오준을 마주 보았다. 둘은 마주 허리를 숙였다.
우석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드는 오준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끌어당겼다. 우석이 오준의 고개를 잡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울어도 돼요.”
우석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가 달래듯이 오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아. 그 순간 오준의 입에서 뭉개진 발음이 새어 나갔다. 말을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목이 쉬어 있었다. 오준은 그게 자신이 내는 소리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오준은 우석의 품에서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우석은 멈추지 않고 오준의 등을 토닥였다.
저녁을 지나 밤 시간이 되자 엄마의 지인 몇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와 남자는 미경이 10대였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준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미경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길 나누다가 돌아갔다.
그 뒤에는 젊은 여자 한 명이 찾아왔다.
“참 감사한 분이었어요.”
엄마의 병원 간호실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그녀는 힘든 순간에 몇 번이나 환자인 미경에게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미경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오준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오준은 그녀의 삶에 그가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에, 그 속의 그녀가 빛나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한동안 미경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오준에게 조의를 표하고 돌아갔다. 목이 완전히 쉬어버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오준 대신 우석이 담담하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우석은 따듯한 물을 떠 와 오준에게 내밀었다. 오준은 가만히 물을 홀짝였다.
“돌아가서 쉬어요.”
오준이 말했다. 납작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석이 오준의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여기 있을게요.”
우석은 부드럽고 단호하게 오준의 제안을 거절했다. 조금의 여지도 없는 그 대답에 오준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있어서 오준은 긴 밤을 조금 덜 아프게 견디고 있었다.
눈두덩이에 내려앉는 우석의 손가락은 적당히 미지근했다. 오준은 우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