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선배님 501호에 잠시만 좀 와주세요.
민재는 지환으로부터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좀 전에 같이 저녁을 먹고 나서 멀쩡하게 헤어져서 숙소에 들어온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민재는 테이블에 앉아 고민했다. 저번의 졸업 여행처럼 뭔가 수상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왜 방으로 부르는 거지?
민재는 최근 지환의 목을 졸랐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을 살피던 눈도. 어쩌면 그는 민재에게 무언가 떠보거나 캐보려는 걸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인데?
민재는 답장을 보내고는 휴대폰만 노려보았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빨리요! 좀 와주세요ㅠㅠㅠ
지환의 문자는 꽤나 다급해 보였다. 진짜 무슨 일이 있나? 민재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민재는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고는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5층 표시를 확인한 민재는 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섰다.
501호 문 앞에 선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민재의 손이 문에서 떠나가기도 전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민재는 좀 민망해졌다.
“선배 오셨네요.”
지환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민재의 팔을 지환이 가볍게 끌어당겼다. 지환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서 민재는 할 말을 잃었다.
지환의 방은 꼭 점성술사의 방 같았다. 2개의 조명이 방을 밝히고 있었는데, 하나는 은은하게 불빛을 내뿜는 달 모양의 무드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장으로 쏘아 올리는 형태로 천장에 여러 별자리가 낮은 조도로 떠 있었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민재에게 향긋한 향이 밀려들었다. 라벤다 향이었다. 지환은 왜인지 엄청나게 흐뭇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취향이….”
어떻다고 평을 해줄 수 없는 민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선배님 불면증이라고 하셔서 준비해 봤어요. 이 무드등이 잠자기 딱 좋은 밝기를 만들어준대요. 그리고 라벤다는 원래 숙면에 좋다고 하고….”
“아.”
민재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내가 불면증이라고 해서 사들인 것들이라고? 민재는 지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최근에 힘이 없어 보이시기도 했고… 아무래도 잠을 잘 못 자면 몸에 안 좋잖아요.”
“…급한 일이라는 게 이거였어?”
민재의 질문에 지환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곱게 정돈해 놓은 자신의 침대 쪽으로 가 이불을 들췄다.
“…몇 시간이라도 좀 푹 주무세요. 악몽 꾸는 것 같으면 깨워드릴게요.”
최근 잠을 잘 못 잔 것은 맞지만 불면이라 할 것까진 아니었다. 악몽을 꾸는 것도 빈도가 잦아지긴 했으나 민재에겐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민재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정말로 불면이 있었다면 지환의 앞에서 그렇게 자다가 악몽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불 오늘 빨아서 말린 거예요.”
지환이 덧붙였다.
지환이 꾸며놓은 방은 괴상했다. 오로지 그의 수면을 위해서 잡다한 물건을 구겨 넣은 좁은 방은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보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멍청하다고?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재는 명치끝이 아리다는 생각을 했다.
“…너 진짜 바보냐.”
지환은 그를 자꾸 서럽게 했다. 자신과는 일평생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감각을 자꾸 느끼게 했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벽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어쩌면 민재가 알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감정이었다.
민재는 지환이 내미는 안대를 받아 들었다. 온열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안대는 따듯했다.
그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를 좀 넘어간 시간이었다.
“그럼 두 시간 뒤에 깨워줘.”
“네!”
자신의 침대를 빼앗아 잠을 잔다는데 지환은 기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찌 되었건 지환이 민재가 불면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두는 것이 나았다. 얌전히 침대에 누우며 민재는 지환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것뿐이라며 자기변명을 했다.
안대를 쓰자 따듯한 어둠이 눈두덩이 위로 번졌다. 민재의 위로 따듯한 이불이 덮어졌다.
민재가 눈을 뜨고 안대를 벗겨냈을 땐, 지환의 품 안이었다. 지환은 침대 끝 쪽에서 민재의 몸 위에 팔을 올린 채로 모로 누워 있었다.
햇빛이 눈부셨다. 아침이구나. 민재는 순간 자신을 안고 있는 지환보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아침의 밝기에 더 충격을 받았다.
그 어떤 꿈도 꾸지 않고 정말로 잘 잤다. 민재는 눈을 깜박였다.
그때 지환이 몸을 뒤척였다.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지환이 작게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민재의 몸 위에 있던 팔의 무게가 사라졌다. 그러나 무얼 하는지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지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민재를 깨웠다.
“선배님.”
민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헝클어진 지환이 미소 짓고 있었다.
***
태현은 산처럼 쌓인 그릇을 헹구어내다가 대각선 멀리에서 그릇을 정리하고 있는 서연을 힐끔거렸다. 오늘은 태현과 서연이 주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푸른시민연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태현과 서연의 아버지인 신경준 의원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주로 에스퍼 발현과 관련해서 가족이나 본인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단기, 장기적으로 머물렀다.
가족을 잃은 사람, 다친 사람, 억울하고 슬픈 사람들이 길거리를 전전하다 이곳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히어로 센터를, 세상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신경준 의원은 늘 김진성의 반대편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그의 행보에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 히어로 센터에 속한 태현과 서연이 매달 찾아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시키는 일을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서연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할 것도 없어.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도울 뿐이야.”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설거지가 끝이 났다. 살균기에 들어갔던 그릇들을 선반에 정리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빨래였다.
이곳에는 대형 세탁기가 있었지만 공용이라 이불 빨래를 자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에 봉사자들이 찾아오면 침구를 모두 꺼내 큰 대야에 넣고 발로 밟아 빨래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태현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빨래를 밟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빨래를 할 때면 서연이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였다. 그 노래는 나물을 씻는 누나 옆에서 돕지는 못할망정 돌이나 던지고 있는 남동생의 노래였다. 대체 왜 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태현은 부드러운 미성이 섞인 서연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누난 그 노래 좋아하더라.”
태현을 돌아본 서연이 웃었다. 서연의 몸이 기울자 태현이 손을 뻗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서연이 발로 흰 이불을 밟았다. 거품이 서연의 발목을 타고 몽실몽실 올랐다.
“응. 어릴 때 엄마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던 서연이 말을 멈추었다. 엄마. 그것은 태현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고, 서연은 너무 어린 나이에 빼앗긴 것이었다.
“…어릴 때 배운 동요가 몇 개 없어서. 기억나는 게 거의 없어.”
서연이 말을 돌렸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근데 너 왜 빨래 안 밟고 내 손만 잡고 있어. 농땡이 피울래?”
“나는 누나 넘어질까 봐 잡고 있는… 누나!”
서연이 발길질해서 날린 거품이 태현의 허리춤으로 마구 튀었다. 거품 때문에 태현의 옆구리가 얼룩덜룩해졌다. 서연은 킥킥 웃으며 태현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대야 밖으로 나왔다.
“이제 헹구고 널자.”
두 사람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불의 양 끝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무거운 천의 물기를 짜고, 털어서 빨랫줄에 널었다.
“역시 태현이가 도와주니까 빨리 끝나네.”
서연이 인사치레를 했다. 태현은 쪼글쪼글해진 서연의 손을 살짝 잡았다. 서연이 태현을 돌아보았다.
“누나.”
“응?”
“빨래 말고 다른 것도 돕게 해줘.”
“…….”
“나. 아버지 찾아갔었어.”
태현의 말에 서연이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서연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태현은 조금 무서워져 서연의 손을 빈틈없이 그러쥐었다.
“태현아, 너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잖아.”
서연의 말은 다정하고, 아팠다. 태현은 아버지에게 초대받았던 만찬 자리를 떠올렸다. 그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인, 무릎을 한 번 꿇는 것으로 그는 그 자리에 도달했다. 그곳에 누나는 없었다.
서연이 지금 아버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희생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면 너무 쉬웠다. 원래부터 그가 있어야 했던 자리라는 듯 당연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태현은 순간 만족감을 느꼈다. 그에게도 서연에 줄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저열한 놈. 태현은 자조했다.
“누나가 나를 필요로 했으면 좋겠어.”
태현이 무거운 진심을 내뱉었다.
“쓸모 있어지게끔 노력이라도 할 수 있게.”
덧붙인 그의 말에 서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냥. 은혜를 갚는 거지. 누나가 나한테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태현아.”
“누나도 생각해 본 적 있지. 김진성이 그렇게 뒷공작을 쳐대고, 꿍꿍이가 많은데. 그게 다 어떻게 가능할까.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자본이 술술 흘러들어 올까.”
태현의 말에 서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집중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녀의 관심을 빼앗을 만한 소식이었다는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태현은 그가 준비해 온 것을 서연에게 내놓았다.
“금성을 파봐.”
“…금성?”
“김진성을 꺾으려면 돈줄부터 차근차근 틀어쥐는 게 좋지 않을까.”
서연은 생각에 빠진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냥 호의로 투자를 하진 않을 텐데….”
“기술개발 용도인 것 같던데.”
“그렇구나. 그럼 아마도….”
“신무기.”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태현을 바라보았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우연히 들었어. 좀 도움이 되었어?”
태현이 서연의 손을 자신의 머리 쪽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서연은 멍하니 태현이 정보를 얻어낸 경위를 생각해 보는 듯했고, 이내 이를 앙다무는 게 보였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니 경준이 그녀에게 패를 내놓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터였다.
태현이 서연의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틀어쥘 방법도 알아 올게.”
착한 강아지처럼 순한 눈으로, 태현이 말했다. 서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