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늦은 밤, 민재는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다가 조 박사의 문자를 받았다. 민재는 최근 지환에게 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라도 하듯,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피로함은 계속 누적되었으나 좀처럼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이번 실험이 영 좋지 않게 끝났어 -_-^
대체 저딴 이모티콘은 왜 계속 붙이는 건데. 민재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실험이 좋지 않게 끝났다는 건 교주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문자의 뉘앙스를 보니 편하게 죽진 못했을 터였다.
민재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갔다. 어차피 정보를 더 얻을 것도 아니었으나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 내가 죽으면 넌 그걸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다.”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으나 교주는 민재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존재 혹은 센터장이나 조 박사와 연관된 무언가를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것마저 거짓말이었다면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으니 우석에게 찾아가 의논을 해볼 생각이었다. 우석에게 말하지 않고 계속 혼자 안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재는 우석의 숙소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벌써 자나? 민재는 그냥 돌아갈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 볼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다.
쿠당탕.
문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넘어졌나? 민재가 생각함과 동시에 다소 급한 느낌으로 문이 열렸다.
“…아.”
우석이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다 깬 것인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왜인지 머리를 깔끔하게 쓸어 올린 채였는데, 정돈이 덜 된 건지 오른쪽 옆머리가 삐죽 솟아 있었다.
“뭐야.”
덕분에 민재는 자신이 찾아와 놓고 우석에게 뭐냐는 질문을 했다. 우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긴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파?”
그러면서도 우석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민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 민재의 손목을 잡고 살폈다. 민재의 가이딩 수치는 아직 괜찮은 편이었다.
우석에게 손목을 내어준 민재는 안으로 들어서며 방을 살펴보았다. 원래도 멀끔하게 하고 사는 편이었으나 어쩐지 급하게 정리한 느낌이 있었다.
“…누구 기다렸어? 이 야심한 시각에?”
“아니?”
우석이 격하게 부정했다. 민재는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접힌 우석의 파자마 옷깃을 밖으로 빼내주었다.
“그럼 잠옷까지 갈아입고 날 기다렸어? 왜?”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민재가 놀리자 우석이 신경질을 냈다. 민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에 착석했다. 그리고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우석을 불렀다.
“최 실장, 비공식 회의 좀 하자.”
우석은 민재의 말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용히 민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교주가 죽었어.”
“그래. 뉴스에도 그렇게… 야.”
우석은 말을 하다 말고 정색을 하며 민재를 째려보았다.
“진짜로 죽었다는 거구나.”
“맞아.”
“넌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데? 어디서?”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 민재는 속사정은 빼고 정보만 전달했다.
“…조 박사가 데리고 있더라고. 어떻게 잡아 온 건지. 아니면 스스로 기어들어 온 걸 수도 있고.”
“조 박사? 그 새끼가 너한테 그냥 정보를 줬다고?”
“…….”
우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내가 이럴까 봐 이제 말한다. 그냥 피 조금 뽑아줬어.”
“…우민재.”
우석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우석이 말을 더 잇기 전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교주가 나에 대해 알고 있었어. 실패작이라던데. 내가.”
민재의 말에 우석이 굳었다. 정말로 돌처럼 굳어서, 툭 치면 쩌적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질 것만 같았다. 민재는 잠시 그런 우석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랑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를 하자고 했는데, 그 이야길 하면서 제삼자가 있다는 것 같은 뉘앙스를 내비쳤어. 내가 원하는 걸 본인이 갖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있는 곳을 알려줄 테니 살려달라고 하더라고.”
“…그럼 센터나, 난데없이 개입한 제삼자의 명줄을 틀어쥘 수 있는 무언가를 그 새끼가 가지고 있었다는 거네.”
“맞아. 아무래도 찜찜해서. 그걸 좀 찾고 싶은데. 네가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은 좀 살펴봐 줘.”
우석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깔끔하게 올라가 있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헝클어졌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민재야…. 우민재야….”
“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그 새끼가 어떻게 그 일을 알아. 아니, 진짜 아는 게 맞는 것 같았어?”
우석은 자신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민재의 두 팔을 붙잡았다.
“…아마도.”
“그럼 그날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
“그날, 생존자가 없었던 거… 맞지?”
우석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순간 민재의 귓가에 날카로운 기계음과 비명 소리가 울렸다. 민재의 몸이 떨리자 우석이 민재를 더 강하게 붙잡았다.
“…몰라. 나는….”
“민재야. 나는 그 새끼들이 살았으면 좋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거기서 도망친 놈이 있다면, 널 노리고 있을 수도 있어. 조 박사는 물론이고 그 새끼들 중에 제정신인 놈이 하나라도 있었어?”
실험은 실패로 끝이 났다. 실패한 실험체를 필요로 한다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민재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에서 계속해서 무언가 튀어 오르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하나만 약속해.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겠다고. 위험에 처하지 않겠다고.”
우석이 엄한 선생님처럼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는 민재에게 계속 약속을 하라고 다그쳤다. 약속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를 흔드는 우석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진짜야. 나한테 이제 비밀 만들지도 마라. 그리고 너 이제 매일 어디 가면 어디 간다, 이런 거 딱딱 이야기하고 다녀.”
“야, 네가 무슨….”
박지환이냐. 라는 말을 무심코 뱉으려던 민재는 멈칫했다. 말을 하다 마는 민재를 보고 우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아무튼. 알겠어. 조심한다고. 근데 너도 조심해.”
“나는 뭐….”
“나를 노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조짐이 이상한 건 맞으니까.”
민재의 말에 우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빠지는 모양인지 우석은 테이블에 상체를 엎드리다시피 했다. 민재가 그런 우석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래서 누굴 위해 머리를 정돈했는지는 말 안 해줘?”
드르렁. 민재가 재차 묻자 우석이 갑작스레 코 고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민재가 그런 우석의 관자놀이 쪽을 꼬집어보았으나 우석은 꿋꿋이 버텼다.
결국 민재는 우석을 들어서 침대 위로 던져놓고는 방을 나섰다.
***
태현은 아버지에게 초대장을 받았다.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니 오라는 것이었다. 멀끔하게 입고 오라는 말도 함께였다.
태현은 옷장에 있는 정장을 꺼내 입었다. 성인이 될 무렵 서연이 사준 것이었다. 캐주얼하게 어두운 밤색 정장으로, 그가 입으면 얌전한 분위기를 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옷의 분위기와 다르게 밝은색으로 탈색된 머리를 쓸어 넘겨보다가 모자를 눌러쓰고 근처 미용실로 향했다.
“짧게 잘라서 검게 덮어주세요.”
“검은색으로요? 지금 머리 색 예쁜데 아쉽지 않으세요.?”
“덮어주세요.”
미용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얌전하고 멀끔한 모습을 완성했다. 미용실을 나서며 태현은 곧바로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뭐 해?
-은정이랑 만나기로 했어. 태현이 너는?
누나는 안 오는 건가? 순간 태현은 서연이 본가에 가는 것을 숨기는 것인지 알아내고 싶어졌다. 그건 오늘 초대받은 모임에 서연이 오는지 보면 될 일이었다.
태현은 핸드폰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나 머리 했어.
-웬일이야. 우리 동생 잘생겼네.
잘생겼다는 서연의 말에 태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동생 소리 좀 빼주면 좋겠지만.
핸드폰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앞으로 검은 세단 하나가 와서 섰다.
“도련님. 모시러 왔습니다.”
태현은 운전자를 확인했다. 본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수행 비서들 중 하나였던가. 태현은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머리… 하셨네요.”
“네.”
“의원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그렇겠지. 태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도착했다는 말이 들려올 때까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정원에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해 차린 만찬회는 꽤나 화려했다. 태현은 가운데 앉아 있는 경준 쪽으로 향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잘 왔어. 여기 앉아라.”
경준이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권했다. 태현은 그 자리에 착석했다.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의원님 아드님이신가요?”
“예. 제가 오늘 함께하자고 불렀습니다.”
“어유. 아드님이 의원님을 닮아 훤칠하시네요.”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 하하.”
관심을 보인 한 중년의 여성이 웃어 보이며 은근하게 아부를 했다. 경준은 적당히 받아치며 겸손하고 유순한 태도를 유지했다. 권위 의식 없고 인권을 생각하는 이미지에 걸맞은 소탈한 태도 같았다. 태현은 경준을 따라 웃었다.
“그런데 아버지. 누나는 오늘….”
“너는 오늘 꽤 많은 관심을 받을 거다. 잘 보고, 잘 들어둬라.”
태현이 서연의 이야기를 물으려고 하자 경준이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경준의 이야기는 잘 보고 들은 다음 자신에게 일러달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나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왜지? 태현은 생각했다.
모두의 앞으로 코스요리가 하나둘 놓였다. 식전 샐러드와 스테이크, 소량의 리소토 등이었다. 태현은 적당히 먹는 시늉을 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중년의 남성과 여성이었고 자신처럼 그들의 자식으로 보이는 남녀가 몇 있었다.
“그럼 기술개발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지요?”
한 남자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조금씩만 보태주시면 속도가 빨라질 것 같습니다.”
경준이 대답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경준이 대답하는 식의 대화가 주로 이루어졌다. 그를 통해 태현은 히어로 센터에서 독차지하고 있는 기술을 경준이 개별적으로 개발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경준은 이런 자리에 그를 부러 초대해 상황 파악을 하게끔 한 것이다.
“금성이 독점을 하고 있던 것을 드디어 나눠 갖게 되는군요.”
금성은 국내에서 최고 크기의 규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기업이었다. 지금까지는 센터의 기술개발에 금성이 독점적으로 자원을 투자하고 있었고, 때문에 센터에서 개발하는 기술의 일부 혹은 전부를-그럴 것 같진 않았다- 금성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같았다.
태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서연을 생각했다. 누나도 여기까지 알고 있을까? 태현은 서연에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와인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