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오준은 반차를 내고 엄마의 병원으로 향했다.
낮의 도시는 한산했다. 오준은 센터 근처 교차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우석의 문자였다. 오준은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다 답장을 썼다.
-반차 썼어요. 엄마랑 먹으려고요.
-맛있게 먹어요.
오준은 창문 쪽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가 도로를 달리면서 생기는 진동이 관자놀이 쪽을 울렸다. 오준은 얼마 전 우석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아…! 잠시만…!”
정신을 빼놓고 달려간 오준에게 우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키스에 응했고, 그 뒤로는 잠시만을 외치는 오준의 말을 듣지 않고 몰아붙였다. 마치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이.
“오준아, 날 봐야지.”
우석은 고개를 돌리는 오준의 얼굴을 고집스레 자신 쪽으로 돌려놓았다. 오준은 우석의 두 눈이 묘하게 적색을 띤다는 생각을 했다. 오준은 우석의 목을 껴안았다. 울음을 터뜨리는 오준을 우석이 자꾸만 어르듯이 불렀다.
우석의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다시 출근 준비를 할 때까지 우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준이 이렇게 찾아왔으니 사귀는 게 맞냐는 질문을 할 것이라고도 생각했으나, 그 질문 역시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서 오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물었어도 대답해 주지 못했을 터였다.
우석은 오준의 손에 커피와 크루아상을 들려서 출근을 시켰다. 그 뒤로 며칠째 이렇게 시답지 않은 안부 문자나 보낼 뿐이었다.
양심이 찔리긴 했으나 오준은 그런 우석이 고마웠다. 별것 아닌 문자를 받는 것에 오준은 생각보다 큰 위안을 받았다.
-실장님도요.
오준은 답장을 보내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문장을 하나 더 추가했다.
-실장님도요. 잘 챙겨 먹어요.
답장을 보낸 오준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엄마의 바람대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기 좋은 날이었다.
오준은 병원에 도착해 간호실에 엄마의 외출을 알렸다. 그러고는 엄마의 병실로 향했다. 윤미경. 오준은 그 이름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아들. 왔어?”
미경이 웃으며 오준을 반겼다. 그녀는 연한 살구색 트위드 원피스에 검은 단화를 신고 있었다. 작년에 오준이 사준 옷이었다.
“오늘 예쁘네.”
오준이 미경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오준의 팔을 살짝 끌어안았다. 가벼운 무게감이 그의 몸에 실렸다.
오준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루프탑 브런치 카페로 향했다. 미경은 오준의 팔짱을 끼고, 햇빛을 즐기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네.”
“그러게. 나도 어제 알았어.”
미경은 카페에 도착하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둘은 오준이 예약해 둔 이 층 창가 자리에 자리 잡았다. 카페 바로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심어져 있어 창 앞에 초록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양송이수프와 부드러운 흰 빵, 스테이크 샐러드 등의 메뉴들이 테이블 위에 차례로 차려졌다. 미경은 샐러드의 가장 윗부분을 포크와 숟가락으로 떠서 오준의 앞접시에 담았다.
“아, 왜 그래. 엄마 먹어.”
오준은 자신의 접시에 놓인 샐러드를 다시 미경의 접시로 옮겼다. 미경이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바로 자신의 반응을 후회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스스로부터 챙겼으면 했다.
“맛은 괜찮아?”
“맛있네.”
미경은 천천히 수프를 떠먹었다.
“네가 어렸을 때 있잖아. 버섯을 안 먹어서 내가 버섯이 고기라고 속였다?”
오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띤 미경이 즐겁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준은 백 번도 더 들은 이야기였지만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나 초등학교 들어가서 알았잖아. 버섯이 고기 아닌 거.”
“그렇게 하니까 네가 편식을 안 하잖아.”
“그치.”
“…너 연애는 하니?”
쿨럭.
갑자기 화제가 다른 데로 튀자 오준은 사레들려 쿨럭거렸다. 그는 미경이 내민 냅킨을 건네받아 입을 막았다.
“왜 놀라고 그래. 뭐 있어?”
오준은 머릿속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빠르게 내보냈다.
“…연애는 무슨.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디 있어.”
“어머 얘는. 야, 지금 네가 청춘인데 그때 연애 안 하면 언제 하니?”
미경은 그 후로 한동안 열띤 목소리로 오준에게 연애의 장점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오준에게 매너 있고 친절하고 재미있는 그런 남자가 되어야 한다며 잔소리들을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런 남자가 엄마 이상형이지?”
그것은 미경이 평소에도 종종 하던 이야기였고, 오준은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계속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경은 그런 오준에게 새겨들으라며 잔소리했다. 그것마저도 오준은 달갑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미경은 따뜻한 드립커피를 마셨다. 카페인 섭취는 원래 좋지 않다고 해 늘 오준이 만류하던 것이었으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향이 너무 좋다.”
미경이 웃었다.
“조만간 또 오자.”
그가 말했다. 미경은 신이 난 것처럼 코를 찡긋해 보였다.
오준은 순간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몸 안에 이상한 혹이 있는 것도, 의사가 가능성이 없다고 놓아버린 몸이라는 것도.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햇빛을 받으면서 천천히 커피를 홀짝이는 엄마.
오준은 가만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
지환은 편의점 봉투를 들고 태현의 숙소 방으로 향했다. 저번에 태현과 술을 마시고 난 뒤 다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질 않았다.
“네 마음 말이야. 들키지 말라고.”
태현의 말이 지환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무슨 의미였을까. 지환은 생각해 보았으나 답이 나오질 않았다.
지환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잠깐의 침묵 뒤에 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
지환이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태현은 피곤한지 다크서클이 내려온 얼굴을 슥 내밀더니 지환을 흘긋 바라보았다.
“웬일로 창문으로 안 오고.”
태현이 말하자 지환은 손에 들린 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거 무거워서.”
지환은 봉투를 그대로 태현의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태현이 뒤로 몸을 물리며 길을 터주었다.
“요새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지환이 말했다. 태현은 지환의 얼굴을 힐긋 살피고는 대답했다.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
태현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지환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져가 열어보았다.
“이게 뭐야.”
태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건빵과 감자칩 같은 과자 봉지들을 꺼내놓았다. 탄산음료도 있었다. 과자 취향이 왜 이렇게 올드하냐며 태현이 툴툴거렸다. 그래 놓고는 또 과자 봉지를 뜯어서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태현이 말했다. 지환은 무슨 말이냐는 듯 태현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냥 과자나 사주러 왔을 리는 없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아냐?”
“…맞아.”
“그러니까. 해보라고.”
지환은 잠시 침묵했다. 막상 물어보려니 어쩐지 망설여졌다.
“마음 들키지 말라는 말… 무슨 의미야?”
그의 질문에 태현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캔 뚜껑을 열었다. 치익- 하고 기포가 새는 소리가 들렸다.
“너 우민재 실장 좋아하지.”
지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바로 허를 찔릴 줄은 몰랐다. 티가 그렇게 많이 났나? 당황한 지환의 얼굴을 보고 태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실장님은 아직 모르는 눈치던데.”
“…형은 어떻게 알았는데?”
태현이 손가락을 뻗어 지환을 가리켰다.
“꼬리.”
“꼬리?”
“어. 네 엉덩이에 꼬리 달린 게 내 눈에는 보여.”
뭐라는 거야. 지환은 태현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혹시 형이 헛것을 보는 거라면 싫다고 해도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 지환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넌 우민재 실장을 얼마나 믿어?”
인상을 찌푸린 채 지환의 손을 바라보던 태현이 순간 정색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태현은 경고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지환은 민재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모르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를 믿냐는 질문에는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믿어.”
태현은 묘한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체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꽤 컸다. 어떤 의미의 한숨이지? 지환은 생각했다.
“그래, 너는….”
말끝을 흐린 태현이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 말을 한 걸 난 후회하게 되겠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태현이 문득 지환에게 말했다
“나, 누나를 좋아해.”
“…누나라면 이서연 가이드?”
“어. 처음 본 순간부터 쭉. 난 누나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어, …그랬구나.”
꽤나 낯간지러운 고백이었다.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몰라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지환은 그제야 태현의 이상 행동의 중심에는 서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잠시 후 태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한 말 잘 기억해 두도록 해.”
그렇게 말하는 태현은 지환이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 사이에 마음을 터놓는 자리에서 지을 법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어쩌면 가장 큰- 비밀을 알게 된 순간 지환은 태현이 조금 낯설다고 느꼈다.
“…비밀이야. 내 이야기는.”
태현이 덧붙였다. 들켜선 안 되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이해가 갔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야기도 비밀이야.”
지환은 아직 민재와 어떻게 할지, 그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도 비밀이라고 당부했다. 지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태현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믿는다고 했으니까 이야기하는 건데, 그럼 더더욱 네 마음 들키지 마. 진짜 한순간에 다 끝날 수도 있어.”
“왜?”
“너도 걸리는 게 있으니까 날 찾아온 거 아니야? 그런 게 없으면 세레나데 부르는 거 도와달라고나 했겠지.”
지환은 태현이 생각하는 자신의 고백법이 어떤 건지 궁금해졌다. 고백할 때 이상한 노래 하면 무조건 망한다고 연애 좀 해본 친구들이 그랬는데.
그와 동시에 지환은 악몽을 꾸던 민재를 떠올렸다. 그가 지환에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해주는 날이 올까? 지환은 그것을 생각하면 괴로워졌다.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가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측근 자리에서 밀려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을 들키지 말라는 건 그런 의미일까. 지환은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형은 괜찮아?”
“…뭐?”
“오랫동안 마음을 숨긴 거잖아. 괜찮냐고.”
“넌 참….”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태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익숙해서 괜찮아. 오래되었으니까.”
다시 지환 쪽을 바라보는 태현의 얼굴은 다시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퍽 퍼석했다. 지환은 말없이 음료수를 들이켰다. 목 안쪽이 까끌까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