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어디 가세요?”
식사를 마치고 식판을 정리한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당연한 듯 물어오는 지환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넌 어디 가는데?”
“훈련장이요.”
최근 지환은 훈련장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민재의 집 앞에서 아침마다 기다리고 같이 밥을 먹는 건 똑같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물어보면 매번 훈련장이었다. 매일 밥 먹고 훈련만 하나?
“…너 몰래 뭐 일 벌이고 다니는 거 아니지?”
“일요? 무슨 일이요?”
지환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 요새는 나 따라오겠다고 고집도 안 부리고….”
“그럼 가도 돼요?”
지환이 덥석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에 민재는 괜히 낚인 기분이 되었다.
“안 돼.”
“그럴 거면서.”
지환이 툴툴거렸다. 어찌 되었건 이상한 일이나 벌이고 있는 게 아니면 되었다. 민재는 어쩐지 조금 후련해진 기분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는 것이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데다 실장의 개인 사무실에는 청소 담당 직원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먼지가 꽤 쌓여 있었다.
민재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는 언제 사다 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물티슈를 꺼내 책상과 테이블을 대강 닦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었다. 잠시 기다리니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서연이었다. 민재는 어제 서연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연락처는 우석을 통해 얻어냈다.
최근 있었던 일에 서연이 꽤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으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연은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민재는 서연에게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사무실이 휑하지?”
“우석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사무실 잘 안 쓰신다고.”
휑하지 않다고는 안 하네. 우석에게 들었던 대로 서연은 꽤 솔직한 화법을 쓰는 사람이었다.
“상품권으로 뭐라도 샀어?”
“아직이요.”
“쇼핑 별로 안 좋아해?”
“아뇨. 좋아하는데 요즘 시간이 없어서요.”
서연이 예의 바르게 웃었다. 뭐 아무 때나 원할 때 쓰면 되겠지.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능하니까 아무래도 바쁘지?”
“네? 칭찬해 주시는 거죠?”
민재의 질문에 서연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반문했다.
“내가 요새 이서연 가이드 탐내잖아. 우석이한테서 뺏어오려고.”
“우석 실장님이 저 보내주신대요?”
“내가 데려오면 그만이지. 어때, 에스퍼실장 대리 할래?”
민재의 말에 서연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후,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요.”
“없어. 나 봐. 한가하잖아.”
“실장님은 그냥 서류 작업을 안 하시는 거잖아요.”
바로 직격을 날리네. 조금 아픈데. 민재는 씩 웃어 보였다. 우석이 가끔 말하던 ‘무서운 입’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민재는 서연이 신기했다. 은정이 묘사하는 말만 들으면 ‘순진무구하고 착하고 여려서 바보 같을 정도’였지만 민재가 본 서연은 대개 똑똑하고 꽤 냉정했다. 계산적인 구석이 있고 눈치가 빨라서 조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 똑똑함과 유능함은 좋았다. 서연이 어떤 사람인지, 무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걸 민재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쓰이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간의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사실 오늘 내가 만나자고 말한 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인데.”
“네.”
“저번에 가이딩 약품 사라진 거 조사할 때 암시장 쪽에 인맥이 조금 있다고 하던데, 맞아?”
서연은 곤란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음… 정확히는 암시장 쪽은 아니고, 암시장을 조사하는 사람을 알아요.”
“암시장에 가본 적 있어?”
“네. 몇 번 가봤어요.”
“어땠어?”
민재의 질문에 서연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역으로 질문했다.
“뭘 찾고 싶으신 거예요?”
“…정신계 에스퍼를 만나본 적, 있어?”
“…암시장에서요?”
“어디서든. 너는 지방에도 여러 번 출장을 갔으니까 폭넓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거 같아서.”
서연은 다시 침묵했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민재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대뜸 에스퍼실장이 암시장에서 정신계 에스퍼를 찾다니 이상하게 들릴 만했다.
“중요한 일인가요?”
“꽤.”
민재의 대답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하고 시원한 태도였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찾아볼게요.”
궁금할 법도 한데 서연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다면 거짓말을 해야 했을 테니 민재에게는 편한 일이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서연은 인사를 하고는 민재의 사무실을 나섰다.
서연 쪽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더 깊게 파야 할 수도 있었다. 제3의 존재에 관해서는 짚이는 바가 없으니 우선 있는 정보부터 해결해 나가야 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렇지?”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피로가 밀려들었다. 민재는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
-선배님, 저녁 안 드세요?
지환은 답이 오지 않은 문자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별로 늦지 않게 끝난다고 했는데?
지환은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지환은 혹시나 싶어 훈련장 내에 있는 공간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나 민재는 보이지 않았다.
지환은 그다음으로는 민재의 숙소로 향했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다시 로비로 온 지환이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어? 지환 씨, 안녕하세요.”
서연이 인사를 건네왔다. 지환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마주 인사를 했다.
“저번에 생일이라고 선물도 주시고. 감사해요. 은정이가 막 사오라고 했죠?”
서연이 민망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정확한 지적이었지만 지환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선물을 고르는 센스가 없어서 상품권으로 샀어요….”
“상품권이면 센스 있는 선물이죠. 잘 쓰겠습니다.”
센스가 있는 선물이 맞았나? 지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서연이 물었다. 민재 선배가 연락을 받지 않아서 센터를 뒤지고 다니는 중이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지환은 어색하게 웃었다.
“민재 선배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비슷한 말이긴 했다.
“아. 아까 실장님이랑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아직 계시려나? 그리로 가보세요.”
그럼 서연 가이드랑 만났던 건가? 지환은 서연이 민재와 만날 일이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원래 선배님이랑 자주 만나세요?”
지환이 묻자 서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미팅이요? 아뇨. 오늘은 일이 있다고 잠깐 보자고 연락을 주셔서요.”
자주 만나는 건 아니구나. 지환은 약간 안도했다. 서연은 A급 가이드인 데다 예뻐서 은정의 가이드만 아니었더라면, 하고 염불을 외는 남자 에스퍼들을 많이 봤던지라 왠지 불안했다.
“아… 혹시 선배님 사무실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가본 적 없으세요? 실장님 진짜 사무실 잘 안 가시는구나.”
서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의미지? 지환이 의아해하자 서연이 덧붙였다.
“지환 씨가 민재 실장님이랑 가장 가까이 지내시지 않으세요? 매번 같이 다니시는 것 같던데 사무실을 모른다고 하시니까.”
아. 지환은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가까이. 서연이 한 말 중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였구나. 지환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층에 있어요. 저리로 올라가시면 돼요.”
서연이 로비 구석 쪽 계단을 가리켰다. 지환은 서연에게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여러 개의 문 중 어느 것이 민재의 사무실인지 알 수 없어 지환은 복도를 서성였다. 그러다가 하나의 문 옆에 조그맣게 이름표가 붙여진 것을 발견했다.
-실장실.
똑똑.
지환은 작게 노크했다.
“선배님? 저 지환이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새 다른 곳으로 갔나? 지환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환은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았다. 잠겨 있진 않은지 쉽게 돌아갔다.
지환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파에 눕다시피 기대서 잠을 자고 있는 민재를 발견했다. 많이 피곤하셨나. 지환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지환은 민재의 맞은편 의자에 살짝 앉아 잠을 자는 민재의 얼굴을 관찰했다.
민재는 또 좋지 않은 꿈을 꾸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민재는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인 것 같았다. 조용히 평온한 표정으로 자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지환은 몸을 일으켜 민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살살 민재의 이마를 눌러 폈다.
“…니야.”
민재가 잠꼬대를 했다. 고개를 돌리며 뒤척이려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불편한지 민재가 몸을 뒤틀었다. 그로 인해 민재의 몸이 소파에서 떨어지려고 했다.
지환은 빠르게 팔을 뻗어 민재의 몸을 받쳤다.
그때였다. 눈을 뜬 민재가 빠르게 손을 날려 지환의 목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지환의 몸이 뒤집혔다. 지환은 뒤로 넘어져 바닥에 등을 부딪쳤다.
컥.
목과 허리에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민재가 일그러진 얼굴로 지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선… 배….”
지환이 민재의 팔을 잡았다. 목을 조르고 있는 건 민재인데도,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박지환?”
민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민재는 빠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뒤로 물러나는 민재의 머리 바로 뒤에 소파의 팔걸이가 있었다. 지환은 민재의 팔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뒤로 향하던 민재의 몸이 다시 지환의 몸 위로 엎어졌다.
“야, 괜찮아?”
민재가 물었다.
“잠시만요.”
지환은 잠시 숨을 골랐다. 부딪힌 등에서 고통이 조금씩 가셨다. 지환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민재도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지환도 일으켜 세워서 소파에 앉혔다.
“야… 괜찮아?”
“네. 괜찮아요. 별로 안 아파요.”
지환의 말에 민재가 한숨을 내쉬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지환은 민재를 살폈다. 잠시 뒤 고개를 든 민재가 물었다.
“아니.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선배님 연락이 안 돼서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서연 가이드님이 알려주시던데요.”
민재가 마른세수를 했다.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악몽을 꿨기에 저렇게 불안해하는 거지? 지환은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민재를 떠올렸다.
“…무슨 꿈을 꾸신 거예요?”
“그냥… 좀 싸우는 꿈. 미안. 목 많이 아파? 힐 넣어줘?”
민재가 손을 뻗어 지환의 목 언저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지환은 민재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민재는 충격이 큰지 지환이 손을 계속 잡고 있어도 모르는 듯했다.
“악몽을… 자주 꾸시네요.”
“그냥. 요즘 좀 피곤해서 그래. 가끔 불면증 때문에 못 자서.”
민재가 조금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네.”
지환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엄지로 민재의 손등을 살짝 쓸었다. 민재의 손의 떨림이 잦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