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태현은 은정과 어색한 침묵 속에서 풍선을 부는 중이었다. 은정은 남들보다 키가 큰 만큼 폐활량도 큰 것인지 엄청난 속도로 풍선을 생산하고 있었다.
은정은 사람들이 밥을 잘 먹으러 오지 않는 밤 열두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급식실을 통으로 빌렸다. 한 시간 동안 주위에 얼씬도 말라는 엄포를 놓으며 돌아다녔으니 권력 남용이나 다름없었다. 태현과 함께 급식실을 꾸미는 시간까지 합하면 2시간은 족히 될 것이다.
“근데 너랑 서연이 어렸을 때는 생일 파티 같은 거 했어?”
은정이 옆에 쌓인 풍선을 들고 일어나 파티 장소 주변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태현은 발치에 여러 개 쌓여 있는 풍선을 무감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생일 파티라. 비슷한 걸 하기는 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맛있는 디저트를 구워주셨고, 선물을 받기도 했다.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케이크 먹고 선물 받고 그런 거죠.”
그러나 친구들과 하는 이런 식의 파티는 아니었다. 태현과 서연은 존재를 들키면 안 되었기 때문에 홈스쿨링을 했다. 그래서 어릴 때 서연과 태현은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했다.
“서연이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은정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꾸민 급식실을 둘러보았다. 서툰 솜씨였지만 꾸며놓고 보니 급식실이 꽤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냈다.
누나는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태현은 좀 전부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연이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너무 기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태현에게는 아직 서연이 유일한 세계였다. 서연에게도 그가 그랬으면 했다.
“…좋아할 거예요.”
태현이 말하자 은정은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렇게 감정을 다 보여줘도 누나는 저 여자를 내치지 않는다. 태현은 서연 앞에서 언제나 다 내비치지 못하는 감정을 끌어안고 절절매야 하는데. 태현은 속이 뒤틀렸다.
“열심히 준비했네.”
급식실로 민재가 들어섰다. 그 옆에 딱 붙어 있는 지환도 함께였다.
“당연하지. 누구 생일인데!”
같이 준비해 놓고 생색은 혼자 내는 은정이 둘을 반겼다. 곧이어 제1팀 소속인 호영과 가이드실장인 우석도 들어섰다.
구성원을 보니 여은정이 들들 볶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죄다 모은 모양이었다. 호영은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은정이 시키는 대로 잡일을 했다.
“고생했겠네.”
민재가 태현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은요. 누나 생일인데요.”
태현이 미소 지어 보였다. 지환은 태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무언가를 물었다.
“형, 서연 가이드님 돈 싫어하시진 않지?”
뭔 헛소리지. 태현은 지환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돈을 딱히 싫어할 이유가 있어…?”
태현의 말에 지환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으로 민재의 곁으로 돌아갔다. 지환이 무언가 속닥거리자 민재가 바보냐고 핀잔을 주는 게 보였다. 저 둘은 선물로 돈이라도 주는 모양이었다.
태현은 지환의 표정을 살폈다. 에스퍼실장 옆에 있기만 해도 헤벌쭉하는 게 꼬리가 달렸다면 프로펠러처럼 돌아서 허공에 둥둥 뜰 기세였다.
이렇게 보니 확실하게 보였다. 박지환이 좋아하는 건 우민재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단순히 동경이나 인간적 호감과는 결이 달랐다. 지환이 가지고 있는 눈빛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불쌍한 새끼. 태현은 자조했다.
잠시 후, 은정과 약속한 서연이 급식실로 들어섰다. 서연은 살구색 블라우스에 베이지빛이 도는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서연의 앞에서 폭죽이 터졌다. 색종이들이 허공에 날렸다.
태현은 서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살짝 가라앉는 것을, 서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 짓는 것을 눈에 담았다.
은정은 서연에게 토끼가 그려진 귀여운 고깔모자를 씌웠다.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서연은 생일 초를 불어서 껐다. 바로 이어서 선물 증정식이 시작되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호영이 서연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유명 브랜드의 향초였다.
“사고 싶은 거 사.”
민재는 지환의 것까지 합쳐서 상품권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실용적인 선물이네요.”
서연이 웃어 보였다.
우석은 어색한 몸짓으로 영양제 세트가 담긴 쇼핑백을 선물했다. 건강이 최고라며 늙은이 같은 덕담도 잊지 않았다. 그다음은 태현 차례였다.
태현은 예쁘게 세공된 보석함을 열어 보였다. 디자이너에게 따로 주문 제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팔찌였다.
“우와. 태현아 너무 예쁘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
서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서연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꼭 하고 다녀줘야 해.”
“당연하지.”
서연이 팔찌를 착용한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은정은 서연에게 운동화를 선물했다. 검정색 운동화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라 어느 옷에나 어울릴 것 같았다.
“서연아 네가 어디에서나 편안하게 걸었으면 좋겠어.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생일 축하해.”
은정의 말에 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어? 왜 울어! 왜에.”
은정은 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같이 코를 훌쩍였다.
“다들 너무 고마워서….”
서연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태현은 서연을 처음 만난 날 이후로 그녀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누나가 울었다. 태현은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연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눈을 맞추고 웃는 것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태현은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무난한 날.
평범한 하루들 속에도 별다를 것 없이 평온한 날은 드물었다. 특히 오준에게는 그랬다.
오준은 오늘 알람이 울리기 2분 전에 일어났다. 잠을 얼마 자지 못했는데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그래서 오준은 평소와 다르게 간단하게 요거트로 아침 식사도 먹었다.
출근하자 테이블 위에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커피가 올려져 있다는 것은 우석이 있는 가이딩실에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이 없다는 뜻이었고, 그건 간밤에 센터도 나름 평화로웠다는 뜻이었다.
오준은 평소처럼 우석과의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업무를 처리했다.
센터장도 오늘은 출근하면서 인사를 건넨 것 외에는 조용했다. 그렇게 오전이 흘러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조금 여유로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오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순간 오준은 손안에서 울리는 그 진동이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이 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윤오준 보호자님, 안녕하세요. 00병원 김현성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는 엄마의 수술을 3번째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였다. 원래는 오준이 직접 병원에 가서 이야길 들어야 했지만 오준의 사정을 봐서 이따금 전화를 걸어 엄마의 경과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잠깐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아… 음…. 사실 얼굴을 뵙고 이야길 드리면 좋을 텐데, 시간이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드렸어요.]
의사가 말끝을 흐렸다. 좋지 않다. 오준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악성종양과 싸워왔다. 희귀 케이스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악성종양은 맞지만 일반적인 암이 아니라 종류가 다르다고 했다.
주치의가 세 번 바뀌고 5번의 수술을 하고도 엄마는 살아남았다. 엄마는 오준보다 작고 연약한 몸이었으니 어쩌면 여태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의사는 엄마의 몸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요지는 엄마의 몸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언제 죽을지 예측하기도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오준은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니 센터장이 대강 인사를 건네고 퇴근을 하고 있었다.
오준은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능하면 자주 오셔서 어머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주세요.]
의사의 말대로라면 오준은 지금 바로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오준은 그럴 수 없었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몇 년 동안 예상해 왔던 일이었다. 하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오한 것과 실제는 달랐다. 지금 오준은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오준은 핸드폰을 들고 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생각이 나는 사람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도 우석밖에 없었다. 그걸 자각하고 나니 정말 친구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인생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와아, 윤 비서님? 전화를 다 하셨네요.]
우석이 꽤나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퇴근했어요?”
[네. 오늘은 조금 전에 했어요. 왜요?]
“오늘 좀 자고 가도 돼요?”
[…무슨 일 있어요?]
“없어요. 싫으면 말고요.”
[싫을 리가. 건물에 도착하면 연락해요. 문 열어주러 내려갈게요.]
우석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준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숙소 건물이 어디였더라. 오준은 기억이 나는 대로 걸었다. 땅에 발을 내딛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우석의 숙소 건물 앞에 서서 오준은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웬만해선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에스퍼들에 비해 오준은 단정한 세미 정장을 입고 있었으므로 힐긋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시선을 피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전화를 거는 순간 에스퍼 한 명이 안에서 나오면서 자동문이 열렸다. 오준은 그냥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비상계단을 올랐다.
[아, 지금 내려갈게요.]
“아뇨. 내려오지 말고요. 몇 호예요?”
[네?]
“몇 호냐고요. 7층인 건 기억나는데.”
[…706호요. 윤 비서님 지금 뛰어요? 어딘데?]
우석이 호수를 말했을 때, 오준은 7층에 도착했다.
오준은 숨을 몰아쉬었다. 저 앞에 현관문 하나가 열렸다.
“혹시 뭐에 쫓기고 있어요? 괜찮….”
문을 열고 나서려던 우석과 눈이 마주쳤다. 오준은 그대로 다시 뛰었다. 우석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잠깐….”
오준은 그대로 우석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잠시 뒤, 오준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