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은정은 서연의 연락을 받고 센터 외부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죽을 포장했다.
-은정아, 내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못 만날 것 같아. 미안해.
오늘은 서연과 만나 가이딩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먼저 만남을 취소하는 일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잘 아프지 않는 서연이었기에 은정은 걱정이 되었다. 은정은 걸음에 계속 박차를 가했다.
숙소에 들러 가이딩 약을 먹은 은정은 서연의 숙소로 향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애한테서 기운을 뺏고 싶진 않았다.
은정은 서연의 숙소 문을 노크했다. 잠깐의 시간 차를 두고 안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은정이.”
서연이 문을 열어주었다. 은정은 안으로 들어서며 서연의 얼굴을 빠르게 살폈다. 며칠 사이에 벌써 수척해진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이랬어?”
“오늘부터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
은정이 걱정을 하자 서연이 곧바로 변명처럼 말했다. 은정은 한숨을 삼키며 사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침대 쪽으로 밀었다.
“일단 너는 좀 누워야겠다.”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서연은 힘이 없는지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은정은 서연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뜨거웠다. 몸 안쪽에서 계속 열이 올라오는 듯했다.
“열이 이렇게 나는데 괜찮다고?”
은정은 사온 죽을 꺼내 수저를 챙겨왔다. 그리고 서연이 침대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 괜찮아….”
“그냥 말하지 마. 죽 먹고 약도 먹자”
은정이 죽을 떠서 서연의 입가로 가져다 대자 서연이 고개를 뒤쪽으로 살짝 물렸다.
“내가 먹을 수 있어.”
“못 먹을걸. 너 지금 떨잖아.”
서연은 오한이 드는지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죽을 넙죽 받아먹기는 부끄러운지 잠시 고민을 하던 서연은 이내 조심스럽게 은정이 내민 죽을 받아먹었다.
“맛 괜찮아? 안 뜨거워?”
은정이 웃자 서연이 푸시시 웃었다.
“나 아기 아닌데.”
서연은 작게 투정을 하고도 은정이 주는 죽을 잘 받아먹었다. 죽을 먹인 후 은정은 해열제와 몸살약을 서연에게 주었다.
“센터 의무실 못 믿겠어서 그냥 외부 약국 갔다 왔어.”
센터에는 사다 두고 쓰지 않아 오래된 약이 많았다. 진통제나 소독약 같은 게 필요할 땐 들렀지만 많이 아플 때는 외부의 약국이나 병원으로 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서연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약을 삼켰다.
“조금 자. 나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말을 잘 듣는 아이 같았다. 은정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건 진짜 네가 아니잖아. 그런 말은 듣지 마. 거짓을 진짜로 만들게 두지 마.”
은정에 관해 떠도는 온갖 소문을 듣고 온 서연이 한 말이었다. 서연이 센터에 온 지 두 번째가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서연이 시비를 걸어오는 줄 알 정도로 꽤 사나운 말투였다.
서연은 두 주먹을 꼭 쥐고는 눈이 빨개진 채 은정을 째려보았다. 은정은 그게 우스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서연과 은정은 가까워졌다.
똑똑-
누군가 서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누구지? 신경이 날카로워진 은정은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상한 새끼면 대가리를 터뜨려야겠다고 은정은 생각했다.
그런데 문 앞에선 살짝 창백한 얼굴의 태현이 서 있었다.
“…너도 어디 아파?”
은정이 물었다. 태현의 눈이 흔들렸다. 태현은 대답하지 않고 은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지? 은정은 태현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태현이 은정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누나가 아플 때 먹는 약이에요. 다른 건 잘 안 들어요.”
은정은 자신이 사온 것과 다른 색의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종류는 다른 것이었지만 몸살약이었다.
은정은 태현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태현의 얼굴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숨이 찬 건지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은정에게 티를 내고 싶지 않은지 숨소리는 작았다.
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현이 내민 약을 받아 들었다. 심장 부근이 아파왔다. 은정은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약을 먹였으니 꺼지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은정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태현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은정은 태현을 불러 세워야 할지 고민하다 문을 닫았다.
***
-야, 어디야. 긴급.
지환은 태현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했다. 긴급? 당황한 지환은 빠르게 답장했다.
-나 훈련장인데. 어디야? 내가 갈게.
-놉. 내가 감.
긴급인데 온다고? 지환은 아래로 날아가 착지했다. 그러고는 레버를 올려 훈련을 끝마쳤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태현이 지환이 있는 훈련장 문을 열었다.
“바로 찾았어?”
“어. 열심히 뒤져봤어.”
태현은 뛰어다닌 건지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지환은 태현이 이러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무슨 일인데? 심각해? 나더러 오라고 하지.”
“술 마시자.”
다급하게 달려온 태현은 어이없는 말을 내뱉었다.
“엉???”
“나 진지해. 너 무조건 나랑 마셔줘야 된다, 지금.”
순 억지였으나 태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환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편의점에서 맥주와 소주를 잔뜩 사서 태현의 방으로 향했다.
태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맥주 캔 하나를 따서 들이켰다. 지환은 그런 태현을 보다가 비닐봉지에서 술을 꺼내서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
태현은 두 번째 캔을 뜯어서 지환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음 캔을 뜯어서 또 들이키기 시작했다.
“후… 시발.”
태현이 대뜸 욕을 뱉었다. 지환은 아직 가득 찬 맥주 캔을 들고 태현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과자 봉지를 뜯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 먹어가면서 마셔.”
“짠 해, 짠.”
태현은 한동안 별말 없이 술만 마셨다. 지환은 맥주 캔 하나를 홀짝거리며 태현을 살폈다.
저번에 한두 번 실수한 후로 지환은 웬만해선 취할 만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민재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상태인데 술 먹고 저번처럼 찾아가서 실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센터에 와서 뭐 맘에 드는 사람 생기거나 그런 거 없어?”
얼굴이 빨개진 태현이 물었다. 지환은 태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민재를 떠올렸다. 그러나 태현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털어놓는 건 조금 망설여졌다.
“갑자기?”
“하긴… 너는 그 실장이랑만 붙어 다니니까… 쉽지 않으려나.”
태현이 웅얼거렸다.
“형은 누굴 좋아하는데?”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
“…….”
태현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태현은 이번에는 소주병을 까서 흔들었다.
지환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면 자신도 민재 선배에 관해서 자세히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환은 태현과 비슷하게만 털어놓는 것을 선택했다.
“나도.”
“뭐가.”
“비슷한 거 같아. 형이랑.”
지환의 말에 태현이 잔에 소주를 따르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지환을 바라보았다. 붉은 얼굴 때문에 그런지 태현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동지네, 그럼 우리.”
태현이 말했다. 술기운이 계속 오르는지 딸꾹질도 했다.
“형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겠어?”
“내가 그럼 조언 하나 해준다. 내가… 나는 진짜 오래됐거든.”
태현이 지환의 눈앞에다 대고 검지를 흔들었다. 무슨 의미의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지환은 태현이 지금 당장이라도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까 봐 불안했다. 그래도 그게 제일 나은 시나리오이긴 했다.
“어, 형. 졸리지 않아?”
“들키지 마.”
“어?”
“네 마음 말이야. 들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태현의 발음이 너무 또렷했다. 이 형 술 안 취한 거 아니야? 지환은 태현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그럼 좆되는 거….”
태현의 머리가 테이블로 추락했다. 손바닥으로 적당히 태현의 머리를 받친 지환은 태현의 정수리와 닿아 있는 컵을 저쪽으로 밀었다.
들키면 안 된다는 태현의 말이 지환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형이 내 마음을 다 눈치챈 건가? 그렇다면 민재 선배도 알고 있나? 지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
태현은 나고 자란 집 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준비를 마치고 나온 참이었다.
지환과 술 마시며 했던 대화가 신경 쓰였으나 태현은 지금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약 고마워.
서연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태현은 서연의 방 안에 있던 은정을 떠올렸다.
어제 서연은 태현에게 약을 사다 달라고 했다.
태현은 서연에 대한 걱정에 휩싸임과 동시에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서연이 정말로 힘든 순간, 다른 누구가 아닌 자신을 찾았다. 그 사실에서 태현은 희열을 느꼈다.
서연에게 잘 듣는 약을 찾기 위해 멀리 있는 약국까지 모두 뒤져서 서연의 숙소를 찾았다.
약을 찾는 과정이 너무 오래 걸려서였을까? 아니면 서연이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걸까? 태현은 현관문을 연 주인이 서연이 아님을 확인했을 때, 자신의 삶이 서연으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실감해야 했다.
태현은 서연을 지킬 수 없다. 서연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을 수가 없다.
태현은 자신이 그 자리와 자격을 얻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연이 내내 피해왔던 것. 그래서 서연을 괴롭혀 왔던 것. 자신이 숨어 있던 곳을 나가 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태현은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태현은 넓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웬일인지 태현의 아버지인 경준은 마당으로 나와 있었다.
“웬일이냐.”
“나와 계셨네요.”
“산책을 좀 하느라.”
경준이 허허 웃어 보였다.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태현은 경준의 기분 좋음과 서연이 아픈 것이 얼마나 연관이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태현은 경준처럼 기분 좋은 듯 웃어 보였다. 빌어먹게도 피를 이어받은 덕인지 태현은 그런 것에 익숙했다.
“아버지,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무슨 말? 다과라도 들면서 할래?”
태현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경준은 왜 이러냐고 묻거나 당황하며 태현은 일으키려 들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태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착한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래. 그만하면 철들 때도 되었지.”
태현의 말을 들은 경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겉보기에는 마치 인자한 아버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