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
민재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서 있는 지환과 마주했다. 양손에는 테이크아웃 잔까지 든 상태였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정말로 와 있으니 조금 머쓱해졌다. 민재는 우선 자신이 지시해 놓은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문은 제대로 고쳤어?”
“네. 말끔해요.”
“…어떻게 한 건데.”
“태현이 형이 복구해 줬어요. 완전 새것처럼 멀쩡해요.”
출장 열쇠 전문 업체도 아니고. 비품실에 신청해서 해결하면 되는 걸 굳이 동료 에스퍼를 부르다니.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걸 또 와서 해줬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민재는 태현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호구 같아 보이진 않던데.
“짠.”
생각이 잠긴 민재의 앞으로 지환이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안에 얼음과 티백이 보였다.
“…이게 뭔데?”
“페퍼민트티요.”
“이걸 왜….”
“선배님 이 차 좋아하지 않으세요?”
내가? 민재는 멀뚱히 페퍼민트티를 바라보다가 받아 들었다.
내가 페퍼민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민재는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애초에 딱히 그렇게 차 종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훈련장에 바리바리 여러 개의 음료수를 들고 온 지환에게 민재가 출입증을 들려줬었다. 그리고 민재는 그것을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야.”
“네?”
“내놔.”
민재가 손을 뻗어서 지환에게 내밀었다. 지환은 몇 번 눈을 끔벅이다가 자신이 마시던 컵을 내밀었다.
“이거… 아이스 모카인데…. 괜찮으시다면 드세요.”
컵을 내미는 모양새가 순순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민재는 컵과 지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내 출입증 내놓으라고.”
“네?”
지환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민재는 여전히 내밀고 있는 손을 까딱였다.
“설마 잃어버린 건 아니지?”
“잃어버리진 않았어요.”
“그럼 줘. 안 사 먹을 거잖아. 남의 출입증을 왜 이렇게 오래 갖고 있는 거야.”
“아니… 아….”
지환이 말끝을 흐렸다.
“그냥 내가 사줄게. 그럼 되잖아.”
“제가 알아서 사 먹으라고 주신 거잖아요…. 다 사 먹고 드리면 안 돼요?”
애초에 음료 사 먹으라고 준 건데 정작 지환은 음료를 사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환은 민재가 무슨 억울한 소리를 한 것처럼 굴었다. 누가 보면 민재가 지환의 카드를 빼앗으려 하는 줄 알 것 같았다.
조 박사가 있는 건물까지 출입 가능한 것으로 따로 만들어둔 것이 있어서 지환에게 준 출입증을 꼭 받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말할 때마다 출입증을 돌려주지 않으려 드는 지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건데?”
“그냥요. 흔치 않은 기회니까 아쉬워서요.”
출입증을 준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애한테 당장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재는 과거에 괜한 짓을 벌인 자신을 찾아가 멱살을 쥐고 싶었다.
“제가 페퍼민트티 사 드렸으니까 그만큼 더 사 먹고 드릴게요.”
지환이 덧붙이며 쐐기를 박았다. 민재는 엉겁결에 더 긴 기간 출입증을 빼앗기게 되었다.
“…너 앞으로 이런 거 사 오면 죽는다.”
“어? 페퍼민트 별로예요? 다른 거 뭐 사 올까요?”
민재의 경고를 지환은 알아듣지 못했다. 민재는 말을 아끼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지환이 바로 따라붙었다.
***
태현은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껐다. 어젯밤 잠금장치 복구 같은 사소한 일에 불려 나가 지환의 징징거림을 받아주느라 피곤했다. 그러나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태현은 몸을 일으켜 침대 위 협탁에 놓여 있는 탁상 달력을 집어 들었다.
서연의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 태현이 주는 것을 잘 받지 않는 서연도 생일 선물만큼은 받아주었다. 그래서 태현은 서연의 생일 선물을 고르는 것에 꽤 시간과 품을 들이는 편이었다.
오늘은 크게 일이 없을 예정이라 태현은 갈 수 있는 쇼핑몰을 모두 돌아볼 생각이었다.
태현은 지환을 데려가 선물을 같이 고르게 할까 고민을 했으나, 지환의 눈치 없음을 떠올리고는 바로 그 생각을 고이 접어두었다.
그때, 태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한다.
은정의 문자였다. 전화 되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하겠다는 통보였다.
지금 경고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태현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무언가 답장을 하기도 전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은정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오, 바로 받네.]
“…하셨으니까요.”
[잘했어. 할 말 있어서.]
“하세요.”
은정은 딱히 인사를 건네거나 안부를 묻지는 않았다. 태현도 별로 그럴 마음이 없었다. 다만 저번처럼 대뜸 일을 시켜서 오늘 계획이 무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곧 서연이 생일이잖아.]
태현은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그냥 일을 시키는 게 나을 것이다. 태현은 서연의 생일과 관련된 정보를 은정과 나눌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요.”
[내가 생일 파티를 준비할 건데 네가 좀 도와라.]
“…제가 왜요?”
3가 서연이 동생이니까. 싸가지 없는 새끼가 누나 생일도 안 챙겨?]
하. 태현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안 챙기긴 누가 안 챙겨. 태현은 다른 사람-특히 여은정 같은-과 서연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지 않았다.
서연의 생일을 축하하는 건 태현에게 있어 나름 중요한 행사 같은 것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거니까.
[요즘 서연이가 기분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서. 너랑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좋은 시간 보내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태현은 며칠 전 사격연습장에서 조금 이상한 태도를 보였던 서연을 떠올렸다.
태현은 서연과 단둘이 생일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태현의 욕심이었다. 서연은 자신의 파트너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에게 축하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은정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시발, 짜증 나. 태현은 욕을 삼켰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걱정 마. 어려운 거 안 시켜! 그럼 너도 같이 준비하는 걸로 안다.]
전화가 끊겼다. 서연의 생일 파티를 자신이 아니라 은정이 나서서 준비하는 것도 싫은데, 태현은 잡일 담당 취급이나 당했다. 진짜 좆같네. 태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가라앉았다.
***
서연은 신경준 의원의 부름을 받았다.
-7시에 보자.
원래 매번 보던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연은 불안했다. 태현에게 문제가 생겼나 생각해 보았으나 서연의 동생은 누나에게 피해가 갈 만한 행동은 알아서 피하는 아이였다.
혹시나 경준이 감시를 시키거나 걱정을 늘어놓으면 적당히 들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서연은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셨죠?”
저택을 관리하는 관리인 중 요리를 담당하는 여자가 서연에게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서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신경준 의원의 집은 마당의 크기만 해도 일반 가정집을 훨씬 웃돌았다.
신경준 의원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 장소는 집값이 싸진 않으나 꽤 낡은 편인 40평대의 빌라였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이 저택이었다. 이 저택에서는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서연은 잘 관리되어 있는 정원을 지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서연의 것처럼 주어진 것들이었다. 서연은 이곳에서 자랐다. 그러나 유년을 보낸 이곳의 어떤 것도 서연은 소유하지 못했다.
“아버지, 저 왔어요.”
현관을 열고 서연이 살갑게 인사를 했다.
“서연이 왔구나. 들어와라.”
꽤나 달가운 인사가 돌아왔다. 서연은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불을 켜두지 않은 내부는 어둑했다.
서연은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접객실로 오면 된다.”
복도에 서니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은 늘어선 방들 중 한 곳의 문을 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경준과 한 남자가 보였다.
“손님이 계셨네요.”
서연이 살짝 고개를 숙여 묵례를 했다. 경준은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가이딩을 좀 해봐 주겠니.”
“정말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에요.”
경준이 말하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빠르게 말했다. 서연은 경준을 바라보았다. 경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남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잠시 봐드려도 될까요?”
남자는 달갑지 않은지 입술을 앙다물고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결심한 듯 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이딩이 잘 들어가는 것 같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다시 밀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경우는 일반인이었으나 지금 서연이 느끼는 감각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에스퍼로 발현한 게 맞나요?”
서연이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이 밀려 나와요.”
“얼마 전에 이렇게 되셨다더구나.”
경준의 목소리는 묘했다. 무거운 소식에 걸맞게 적당히 가라앉아 있었으나 묘한 희열이 뒤섞여 있었다. 서연은 경준이 저런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알았다.
“얼마나 되셨어요?”
“…세 달 정도.”
세 달이면 일반 에스퍼들은 가이딩 없이 버티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서연은 남자의 손을 들어 손목을 확인했다. 가이딩 수치 표시등이 없었다. 서연은 다른 쪽 손을 들어 보았다. 마찬가지로 가이딩 표시등이 없었다.
“난 센터 소속이 아니에요.”
남자가 말했다. 서연은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암시장이나 어둠의 경로로 싸구려 가이딩 약품을 구입해 도망 다니는 에스퍼들은 꽤 많았다. 그들을 센터에서는 ‘도망자’라고 칭했다. 이 남자는 그런 부류였을 것이다.
가이딩 부족 상태에 익숙해졌을 수는 있으나, 애초에 제대로 된 가이딩을 별로 받아보지 못했을 테니 세 달이면 가이딩이 바닥나서 폭주로 죽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서연아, 드디어 우리가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다.”
경준이 환희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연도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서연은 경준이 가고자 하는 길에 공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발로 센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다려 오던 가능성을 눈앞에 둔 지금, 서연은 묘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 기뻐요, 아버지.”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