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남는 표가 있는데 뮤지컬 보러 갈래요?
오준은 우석으로부터 온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애 경험이 적은 오준이 보기에도 뻔한 핑계와 멘트였다. 뮤지컬에 남는 표가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그럼에도 오준은 우석의 제안을 곧바로 거절할 수 없었다.
오준이 병원에서 우석과 마주친 날, 우석은 오준의 엄마와 오준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그는 병원 근처의 순두부집으로 모자를 데려갔다. 엄마는 오랜만에 밖에서 밥을 먹는다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고, 우석은 적절하게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엄마의 얼굴이 너무 밝아 보여서 오준은 우석의 거짓말 섞인 허세-대부분 오준에 대한 칭찬이었다-도 막지 못했다.
그러니까 오준은 우석에게 식사 하나를 빚진 셈이었다. 그리고 뮤지컬 표는 당일에 취소가 불가능했다. 만약 내가 거절하면 좀 낭비 아닌가.
뮤지컬을 본 지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자 까마득했다. 오준은 자신이야말로 뻔히 보이는 멍청한 변명만 스스로 내놓고 있음을 외면하면서 문자를 입력했다.
-몇 시 공연인데요?
-퇴근하고 가면 얼추 맞아요. 데리러 갈게요.
-오지는 마시고요.
-그럼 비서님이 데리러 오든가.
픽. 오준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갔다. 괜히 감시 카메라 쪽을 힐끔거린 오준은 서류를 정리하는 척 목을 가다듬었다.
뮤지컬은 미스터리 심리 추리극이었다.
학교에 숨겨진 보물이 있다는 것을 들은 졸업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서로를 의심하며 보물을 찾는다. 그러다 결국 그 보물이 자신들이 예전에 묻어두었던 타임캡슐임을 알게 되고 허탈해하다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진부했다.
그래도 넘버들이 듣기 좋았다. 남는 표치고는 자리도 좋아 배우들의 연기도 잘 보였다. 오준은 공연을 보는 우석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무대 조명에 우석의 콧날이 은은하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이따금 웃긴 대사가 나오면 찡그려지기도 했다.
겁나게 잘생기긴 했네. 오준은 생각했다.
우석은 유쾌한 장면에서 웃다가 심각한 장면이 나오면 진지한 얼굴이 되기도 했다. 그런 우석은 공연이 말하고 있는 ‘삶의 의미’, 즉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준은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약간 들뜬 기분이 되었다.
“재미없어요?”
우석이 오준 쪽을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무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적어도 켄 너는 그녀를 삶에 들였으니 보물보다 더 값진 걸 얻은 셈이군!”
“맞아, 적어도 까칠한 나의 장미와 여생을 함께하게 되었지.”
배우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하하.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대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는 헤어질 일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며 막이 내렸다.
커튼콜이 모두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둘은 관객이 거의 모두 빠져나가고 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저녁은 먹었어요?”
“야식 먹을래요?”
공연장을 벗어나는 순간 오준은 야식을 먹겠냐고 물었고, 우석은 저녁을 먹었냐고 물었다. 동시에 말을 꺼낸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야식 뭐 좋아해요?”
우석이 먼저 물었다.
“매운 거 잘 드세요?”
“그럼요.”
오준이 묻자 우석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오준은 우석을 늦은 시각까지 하는 떡볶이집으로 데려갔다. 주점도 겸하고 있어서 매운 떡볶이에 소주나 맥주를 곁들이는 메뉴를 간판 메뉴로 판매하는 곳이었다.
“…매운 거 못 먹죠.”
오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우석에게 유산균 음료를 건넸다.
“원래 잘 먹는데….”
우석은 사양하지 않고 음료를 들이켰다.
“이게 맛있어요?”
우석이 표정도 변하지 않고 떡볶이를 씹어 삼키는 오준을 보고 물었다. 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좀 달달한 편이지 않아요?”
“네?”
우석은 상당한 의문을 가진 얼굴로 오준을 바라보았다. 오준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갔다. 오준은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치즈를 잔뜩 얹은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감자튀김이나 먹어요. 아니면 양념 물에 씻어줘요?”
“지금 재밌죠.”
“네.”
우석은 실실 웃는 오준을 빤히 쳐다봤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먹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오준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퇴근 후에 이렇게 여가를 가져본 게 얼마 만인지 까마득했다. 그것을 우석과 함께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낙관적인 기분이 된 오준은 어쩌면 우석과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종종 퇴근 후에 공연을 보거나 산책을 하고, 좀 덜 매운 걸 먹으러 다니는 일상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오준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했다.
“실장님은 미래 계획이 어떻게 돼요?”
“나?”
우석은 의외라는 듯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오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글쎄요. 딱히 계획이랄 건 없는 것 같고, 목표라고 할 법한 건 있죠.”
“뭔데요?”
“비서님이 들으면 긴장할 만한 거?”
“뭐, 뭘….”
오준이 더듬거리자 우석이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제법 쓴 웃음이었다.
오준은 괜히 떡볶이를 휘적거렸다. 그는 우석의 말에 충격받은 상태였다.
우석은 센터에 평생 귀속된 존재다. 게다가 센터장에게 반기를 드는 인물이며 그것은 간접적으로 어떻게든 오준의 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준은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준 씨는 미래 계획이 따로 있어요?”
우석이 되물었다.
“…딱히, 없어요.”
오준에게는 엄마가 미래였다. 그래서 오준은 멀리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들만 생각했다. 당장 들이닥친 것들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먼 미래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미래 같은 건 괜히 물어봐 가지고. 오준은 자신의 멍청한 질문이 부끄러워졌다.
“이제부터 생각해 보면 되겠네요.”
우석이 맥주잔을 내밀며 말했다. 오준은 힘없이 웃으며 같이 잔을 부딪쳤다.
***
“민재 선배님 보신 적 있으세요?”
지환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재는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가이딩 수치가 갑자기 위험 수치까지 떨어져 가이딩실을 찾으려던 것이었으나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민재는 며칠 전 지환과 비행 연습을 한 후로 그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지환이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도 매번 꼭꼭 닫아걸었다.
지환과 마주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환을 생각하면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의 아랫도리가 같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그렇게 되는 남자들도 있다던데 그런 건가? 민재는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재는 숙소를 뒤져 우석이 늘 여분으로 가져다 놓는 가이딩 알약을 찾아냈다. 그리고 3알 정도를 한꺼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가이딩 부족이 해소되면서 몸에 들어갔던 긴장이 천천히 풀렸다. 민재는 코끝에서 무언가 흐르는 걸 느끼고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휴지를 찾았다.
민재는 휴지에 묻어나는 피를 대강 닦고는 휴지 한 장을 작게 뭉쳐 콧구멍에 넣었다. 휴지가 금방 빨갛게 젖어 들었다.
지환을 피해 다니려니 생각보다 체력이 소모되었다. 민재는 짧은 시간 안에 지환과 붙어 다니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건 문제가 있었다.
민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빌어먹을 증세들도, 센터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지환과 공유할 마음이 없었다. 지환은 진심으로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진실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민재는 코에서 휴지를 빼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어느새 코피가 완전히 멎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