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살려줘.”
진흙 인간이 말했다. 진흙 덩어리는 입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끝없이 진흙을 울컥울컥 배출하고 있었다. 5번째 악몽이었다. 진흙 덩어리는 민재를 땅에 파묻은 주제에 본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내가 왜.”
민재가 물었다.
“그야 너는 나랑 같… 우웨에에엑!”
진흙 인간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자신의 몸 안의 진흙을 게워냈다. 더러워 죽겠네. 민재는 인상을 썼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민재는 진흙을 뒤집어써서 진흙 인간과 비슷한 형상이 되었다.
축축하고 뜨뜻미지근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진흙 인간은 한술 더 떠서 민재의 몸에 기댔다. 묵직한 무게감이 민재의 가슴을 눌렀다.
뭐 이런 개 같은 꿈이 다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진흙 인간의 손이 민재의 뺨을 움켜쥐었다.
“너는 영원히 이곳에…!”
헉. 민재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바로 앞에 검은 천이 보였다. 민재는 반사적으로 다시 숨을 멈췄다.
뭐지? 민재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보았다. 손은 포박되어 있지 않았으나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민재는 손을 올려 눈앞의 천을 만져보았다. 살짝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벽인가?
그러나 벽치고는 차갑지 않았다. 따뜻한 온도에 표면이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잠시 뒤 벽이 민재의 눈앞으로 살짝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이게 뭐지. 또 다른 악몽인가. 민재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몸의 감각이 돌아오면서 민재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이 사람의 팔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석은 웬만하면 미리 언질을 주고 민재의 숙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민재가 자고 있으면 깨우거나 그냥 돌아가는 편인 데다, 최근 우석은 바쁜 일이 많아 민재의 숙소로 오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민재는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줘 침입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팔을 뻗어 목 쪽을 눌렀다.
“켁!”
남자는 갑작스러운 가격에 놀란 건지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박지환? 민재는 손에 힘을 풀고 손을 뒤로 뺐다.
“너 뭐야.”
“컥! 아, 선배님… 괜찮으세요?”
지환은 숨을 마저 들이쉰 다음 민재의 안부를 물었다. 그거 내가 물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왜… 여기 있어?”
민재는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방이 맞았다.
“다음 훈련 일정 물어보려고… 방에 왔는데 선배님 아프신 줄 알고….”
지환은 팔을 뻗어 민재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민재의 이마보다 지환의 손바닥이 더 뜨끈했다.
“계속 끙끙 앓으시면서도 잠에서 깨질 않으시더라고요. 걱정했어요.”
“…….”
“선배님?”
지환이 의아한 듯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자신의 밑에 깔린 지환을 보고 빠르게 옆쪽으로 비켰다. 지환은 곧바로 상체를 일으키며 민재를 살폈다.
“어디가 안 좋아요?”
상황 정리가 필요했다. 숙소에서 잠들었으니 숙소에서 깬 건 이상하지 않다. 악몽을 꾸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민재는 지환이 왜 자신을 안고 잠들어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문을 열어줬던가?”
민재는 지환에게 문을 열어준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지환이 방에 들어온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문을 열어줬다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민재의 질문에 지환의 눈이 흔들렸다.
“그… 창문… 이 열려 있어서요.”
민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지환은 민재의 눈치를 보더니 침대에서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근데 선배님 좀 많이 힘들어 보였어요. 창문 안 열려 있었으면 제가 어떻게든 열고 들어왔을지도 몰라요.”
“내가 뭘 어쨌는데.”
“…말 안 할래요.”
뭐라고? 민재의 되물음에 지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또라인가. 뭐가 이렇게 당당해. 불법 침입자 주제에. 민재는 지환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졌다.
“너… 다른 집에도 이렇게 들어가는 건 아니지?”
그런 미친 에스퍼가 있다는 것과 그게 제1팀 팀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민재의 머릿속에 순간 아찔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에요! 저는 선배님 방이니까 들어온 거죠!”
내 방은 제멋대로 들어와도 되나? 더 납득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민재의 속도 모르고 지환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민재는 창문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셋 셀 동안 꺼져. 하나, 둘-”
“나중에 봬요!”
지환은 잽싸게 창문을 열고 몸을 날렸다. 나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민재는 창문을 걸어 잠갔다.
***
민재는 가이딩실에 들어서자마자 귤 파티를 벌이고 있는 우석과 가이드들을 발견했다. 우석은 반쯤 깐 귤을 민재 앞으로 들이밀었다.
“귤 먹을래?”
“웬 귤?”
“쟤 부모님께서 농장 하신대. 다섯 박스 받아서 처치 곤란이라고 풀었어.”
우석이 턱짓으로 옆에 있는 가이드를 가리켰다. 잘 먹을게. 민재가 인사하자 가이드가 웃어 보였다. 민재는 우석이 깐 귤을 받아 한 알씩 입에 털어 넣었다.
“뉴스 봤어?”
우석이 물었다. 민재는 끄덕였다. 뉴스는 사이비종교 까마귀의 교주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변사체는 인적이 드문 부둣가에 유기되어 있었다. 새벽에 배를 몰고 나가려던 어부가 경찰에 신고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많았다.
물에 빠져 있던 시체는 신원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불어 있었다. 그러나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언론은 그 변사체를 교주로 특정했다.
갑자기 실종되어 교주의 이동 경로 추적이 잘되지 않았을 텐데, 시체가 발견된 위치도 너무 뜬금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우석이 물었다. 우석은 귤을 들고 있는 민재의 손목을 잡고 가이딩을 주입하고 있었다. 민재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들 눈치가 빠른지 어느새 자기 몫의 귤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살아 있는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재는 조 박사의 실험실 건물 근방에서 보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행색이 뉴스에 묘사된 것과 유사했다.
조 박사나 센터장이 교주를 처리했다면 이렇게 일찍 사체가 발견되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의 시선을 돌리려고 죽음을 가장했다는 게 훨씬 설득력 있었다.
센터장 쪽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어설프게 죽이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민재의 판단이었다.
“좀 본 게 있어서.”
“어디서?”
“있어.”
우석에게 조 박사를 찾아간 이야길 하면 난리를 피울 게 뻔했다. 우석은 민재를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민재는 우석의 입에 귤을 욱여넣었다. 아 이 색히야. 우석이 웅얼거렸다.
***
“뭐라고?”
은정은 밥을 먹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서연이 먹고 싶다고 한 전복 미역국을 포장해 와서 차린 상이었다.
“발현 에스퍼 전담팀에 지원했다고.”
차분하게 다시 말을 해준 서연은 은정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갑자기 왜?”
“경험해 보고 싶어서.”
은정은 말문이 막혔다. 발현 에스퍼 전담팀은 티오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었다. 포기하거나 죽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페어를 맺은 에스퍼가 있는 가이드는 아무도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은정은 당황스러웠다.
“나한테… 미리 의논하지 그랬어.”
“걱정하지 마. 나는 너랑 페어니까 매일 일하는 건 아니고 그 팀 인원이 자리를 비워야 할 때 배치되는 임시직이야.”
서연은 은정을 가이딩하는 것에는 영향이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정이 걱정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거긴 너무 위험해. 매년 가이드 생존율을 따지는 유일한 곳이야. 난 반대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결국 발현 에스퍼 구조팀이 있었으니까 여기 있는 거잖아.”
은정은 서연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연이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에스퍼가 발현하는 순간은 신비롭지 않다. 처음 겪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질린 에스퍼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 없었다.
서연은 발현하는 에스퍼를 보고 공포를 느끼게 될 수도 있고, 연민을 느껴 포기해야 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은정은 서연을 말리고 싶었다.
“난 덩치 때문에 원래도 전조가 있어서 발현 전에 이미 센터 쪽에 발견되었어. 그래서 불시에 발현하는 현장에서의 에스퍼를 잘 몰라.”
“거봐 너도 잘 모르잖아. 네가 걱정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은정아.”
“모르는 현장이니까 더 보내고 싶지 않은 거야, 서연아. 내가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은정은 서연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 모습에 은정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은정의 입은 멈출 줄 모르고 움직였다.
“이번 일도 그래. 나한테 미리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페어인데. 너무하잖아. 네가 구해야 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전에 단 한 번은 내 생각을 먼저 해줄 수는 없었어?”
“…은정아.”
“내가 너한테 친구가 맞긴 하니?”
“여은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서연은 은정이 19살이 되던 해에 센터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은정 전담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은정이 ‘덩치가 너무 커서 여자치고 부담스럽다’는 말을 지껄인 남자 가이드를 한 대 갈긴 후로, 우석을 제외하고 다른 가이드들이 은정을 가이딩해 주지 않으려 들 때였다.
그런 와중에 들어온 서연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인 데다 같은 여자이니 재빠르게 은정에게 붙여준 것이었다.
“안녕.”
처음 만난 서연의 미소는 따듯했다. 여기저기에 퍼진 소문을 들어 은정이 어떤 아이인지 알았을 법한데도 서연은 은정을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대해줬다. 그래서 서연은 은정에게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이었다.
가이드는 어쩔 수 없이 페어 에스퍼에게 귀속되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가이드의 역할이 에스퍼를 보조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으나, 은정은 서연의 삶을 축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연이 무슨 일을 하든 지지했다.
서연에게도 자신이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었으면 했고, 그렇게 믿었다. 은정의 미래 속에는 언제나 서연이 있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서연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어쩔 수 없이 서운함을 느꼈다.
“나 오늘은 너랑 더 못 있겠다.”
은정이 몸을 일으켰다. 서연은 은정을 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