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민재는 현관을 열자마자 또 바로 코앞에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
“오늘 오전에 같이 하는 스케줄 없는데?”
“네, 알아요.”
지환은 민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야? 민재는 지환의 시선을 좇았다.
지환은 민재의 목덜미 쪽을 훑어보고 있었다. 탐색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시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민재의 몸이 굳어졌다.
“근데 왜 왔어.”
“가이딩 수치는 괜찮으세요?”
지환의 시선이 민재의 손목으로 내리꽂혔다. 민재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숨겼다. 그러자 지환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이 새끼 왜 이래? 민재는 인상을 썼다.
“괜찮아. 왜.”
“…왜 숨기세요? 안 좋아요?”
아니. 내가 지한테 가이딩 검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뭐야. 민재는 아침 댓바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지환 덕분에 어이를 잃어버렸다.
황당해하는 민재를 지환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이딩실이나 의무실을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하던 지환은 민재에게 미쳤냐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은정을 만나는 길을 졸졸 쫓아오는 바람에 회의실 근처에서 내쫓아야 했다.
갈수록 하는 행동이 이상해진단 말이지. 민재는 생각했다.
“피곤해?”
은정이 물었다. 민재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조금. 은정아, 근데 내가 그렇게… 병약해 보여?”
“…선배가? 글쎄…. 나한텐 멍청한 느낌이 더 큰데. 왜?”
“야.”
민재가 흘겨보자 은정은 아님 말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선배가 확인할 게 있어.”
은정이 민재의 앞으로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얼마 전 민재는 은정에게 까마귀 본진을 뒤져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은정은 고민하다가 서연의 동생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동생이 이 쪽지를 들고 왔다.
“안은 이미 다 털려 있었대.”
그렇겠지. 민재는 은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가 도망가면서 중요한 것은 다 가지고 떠났을 것이고, 만약 교주가 누군가에 의해 납치라도 당한 것이면 범인이 물건들을 다 가져갔을 것이다.
종이에는 숫자와 알파벳, 기호가 적혀 있었다. cc와 ml 같은 단위가 표기되어 있는 걸 보니 레시피나 공식으로 보였다.
민재는 레시피보다는 공식일 확률이 높다는 판단을 내렸다. 즉, 아이들을 데리고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어떤 종류의 실험이지? 민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근데 선배, 요새 박지환 무슨 일 있어?”
은정이 물었다. 안 그래도 좀 이상하게 굴던 차에 은정에게서 지환의 이름이 나오자 민재의 신경이 곤두섰다.
“박지환? 왜.”
“나한테 전투 기술을 알려달라고 하던데. 그것도 선배 모르게.”
몰래? 민재는 최근 들어 평소보다 더한 이상행동을 보이던 지환을 떠올렸다. 주로 민재에 관한 일에는 버튼을 눌린 것처럼 행동했다.
최근 눈앞에서 여러 광경을 보았으니 심적으로 부담이 갔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근데 전투 기술은….
“혹시 나랑 싸우고 싶나?”
“…걔가 선배한테 대들어? 내가 조져줄까?”
민재가 고민하자 은정이 심각하게 물었다. 뚜둑 소리를 내며 은정의 손가락이 꺾였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민재는 은정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야, 나도 조질 수 있거든? 그렇게 약골 취급 하지 말아줄래?”
“선배는 싸우지 마.”
민재의 농담에 은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보통 대부분 테러 현장에서 인간과 전투를 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인질이 잡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민재의 격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아는 은정은 민재가 육체적인 전투에 참여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민재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은정의 어깨를 다독였다.
“걔는 뭐… 나름 지 몸 지키고 싶어서 그러겠지. 대강 호신술 같은 거나 알려줘.”
“…알겠어.”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하는 일이 잦았으니 대비하고 싶어서 그러나. 어찌 되었건 호신술 정도는 배운다고 해서 나쁠 게 없었다.
은정은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민재는 지환이 조금 불쌍해졌다.
***
어두운 새벽녘. 인적이 드문 시간 골목의 건물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폭발음도 없이 조용히 타오른 불길은 금세 건물 전체를 휩싸며 커졌다.
화학 처리가 되어 있는지 불길은 노랑과 파랑, 보라 등 여러 색을 띠고 있었다. 주변 건물에 위치해 있던 사람들은 화재 사진을 찍어 자신의 sns에 업로드했다.
소방대원들이 10분 내로 출동했으나 불길이 크게 치솟아 진압에 애를 먹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진압으로 불길이 어느 정도 잡혔을 때였다. 근방에서 건물이 타고 있다는 신고 접수가 쏟아졌다.
그런 식으로 하룻밤 사이에 연이어 불에 탄 건물은 총 6개였다.
[속보입니다. 어젯밤 사이 건물 여섯 채가 갑자기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인명 피해는 아직까지 조사 된 바가 없습니다만 모두 빈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가스 누출 등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원인은 ‘방화’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 여섯 채는 얼마 전 대교에서 집단 자살 기도 소동으로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던 사이비종교 집단 ‘까마귀’의 예배당으로 알려져 보복성 방화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입니다.]
[조사 결과 방화에 사용된 물질은 휘발성 기름과 약품을 조합해 제조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형마트나 철물점, 그리고 주유소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라 수사에 어려움이 더해졌습니다.]
[또한 까마귀의 예배당 건물들 인근에는 감시 카메라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방화범의 목격자를 찾는 것이 시급해졌습니다.]
민재는 태블릿 화면을 확대해 불에 탄 건물 사진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부까지 아주 깔끔하게 탔다. 안에 있는 것들이 전부 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걸 위해 특별히 제조한 약품일 것이다.
얼마 전 태현을 보냈던 건물도 불에 타버렸다. 그건 불을 지른 자가 진짜 본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걸 파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민재는 약간 초조해졌다. 쫓는 쪽은 민재인데 묘하게 뒷덜미를 잡힌 꼴이 되었다.
민재는 태블릿 화면을 끄고 누웠다. 아마도 방화범은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까마귀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몸을 감추었다.
***
태현은 방에 앉아 안경을 살펴보았다. 렌즈를 분리해 살펴보았으나 일반적으로 흔히 쓰는 렌즈였다.
진짜 전선은 뭐지. 태현은 초소형 카메라를 구멍으로 넣어 확인해 보았다. 보아하니 전선이 렌즈가 아니라 없어진 나사 쪽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그렇다는 건 가져간 나사가 핵심이 맞는 건데.
-누나 내가 좀 이상한 걸 찾았어. 시간 언제 괜찮아?
-지금 갈게.
서연의 답장은 빨랐다. 다른 사람들 눈이 있으니 숙소로 온다는 것 같았다.
태현은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옷가지들과 버리지 않은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10부ㄴ만 있다가 와!
-ㅋㅋㅋ 얼른 치워. 지금 쳐들어간다!
아, 망했어. 태현의 몸이 의자에서 빠르게 튀어 나갔다.
그는 옷가지들은 죄다 뭉쳐서 좁은 옷장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를 찾아 눈에 띄는 쓰레기들을 다 집어넣어 묶었다. 재빠르게 창문을 열고는 물티슈로 바닥을 닦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소리를 지른 태현은 책상 구석에 뒹굴고 있던 탈취제를 뿌렸다. 그러고는 손으로 마구 부채질을 한 뒤 현관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조금 치우느라….”
서연은 장난스럽게 태현을 째려본 뒤 안으로 들어서며 검지로 벽을 슥 훑는 시늉을 했다.
“음… 청소 점수 사십 점.”
“아… 벽을 누가 닦아…!”
태현이 억울함을 표시하자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찾은 게 뭔데?”
“우선 누나한테 보낸 쪽지 사진이랑… 안경.”
“안경?”
“응. 나사가 한쪽이 빠져 있는데 안쪽에 전선이 있더라고.”
서연은 태현에게서 안경을 받아 들고는 살피기 시작했다. 태현은 미세 확대경을 서연에게 건넸다. 서연은 안경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가 안경다리 쪽에 있는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이거 마이크네. 녹음기야.”
“녹음기라고?”
“응. 렌즈가 들키기 더 쉬우니까. 꽤 아날로그적인 걸 골랐나 본데.”
태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연을 보며 물었다.
“굳이? 녹음은 폰으로도 쉽게 할 수 있잖아.”
“그러게. 근데 폰은 들키기도 쉽잖아.”
백업용이거나 잔머리를 썼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건가. 서연은 안경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되었든 중요한 건 사라진 나사 안에 있다는 거네.”
“응. 복구 한 번 더 하면 나사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녹음본이나 파일은 없겠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물의 복구를 여러 번 진행하는 건 가능했으나 어떤 것이든 그 안에 있던 정보까지 복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복구부터는 조금만 잘못해도 원형의 상태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안경이 아니라 아직 플라스틱 덩어리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도움이 안 되네. 태현은 조금 씁쓸한 마음으로 안경을 접어두었다.
“이거 은정이도 알아?”
“아니. 그쪽엔 쪽지만 전달했어. 이건 확실한 게 없어서….”
“잘했어.”
서연은 태현의 등을 다독였다. 태현은 서연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
“먼저 움직인 쪽이 있네….”
“센터장 쪽인가?”
“흠… 표면적으로 보면 센터가 이번 일로 손해를 입었으니까…. 애매하네. 김진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손해 보는 걸 기꺼워하지 않으니까.”
서연의 말에 태현은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서연이 자신에게 뭘 얼마만큼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태현아, 가능하면 개입한 다른 쪽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줄래?”
“당연하지.”
“고마워. 너밖에 없다.”
서연이 약한 소리를 했다. 누나. 태현이 나지막하게 서연을 불렀다. 왜? 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버지가 시킨 일. 알려주면 더 잘 도울 수 있어.”
“…….”
서연은 침묵했다. 불안해진 태현은 얼굴을 들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태현아, 나 괜찮아.”
서연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서연은 누구에게나 믿음직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서연은 강했다. 그러나 태현은 서연이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누나에게 함구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비밀리에 내린 지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야겠다. 태현은 평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