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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61)화 (6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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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은정인데, 잠깐 좀 보자.

-어디로 갈까요.

-회의실 5.

태현은 은정으로부터 도전장 같은 문자를 받았다. 장소가 옥상이 아니라 회의실이라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언제까지라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지금 당장 오라는 소리 같았다.

재수 없다. 태현은 은정에 대한 반감을 높이며 회의실로 향했다.

“어, 왔어?”

은정은 회의실에 꽤 늘어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태현은 고개를 살짝 까딱여 보이고는 은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바로 왔네. 한가해?”

비꼬는 건가.

“장소만 보냈길래 급한 일인가 했죠.”

“아 급한 건 맞는데.”

은정은 말을 하다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뭐야. 태현은 가만히 은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연이한테 들었어. 네가 복구 능력이 좋다고.”

누나가?

“무슨 일인데요?”

“…나는 서연이를 믿어.”

은정은 뜬금없이 고백했다. 뭐라는 거야. 제정신 아닌가? 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너도 한번 믿어보기로 했어.”

“…네?”

“센터장 눈을 좀 피해서 출장을 다녀올 사람이 필요해.”

센터장을 피해서. 태현은 은정의 말에 왜 누나가 자신을 추천했는지 깨달았다. 오늘 가는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태현이 얻을 정보는 모두 서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은정은 태현을 잠시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 못 미덥다는 태도였다. 뭐야. 나도 당신 마음에 안 들거든. 태현은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태현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낯이 익은 주소였다. 그러나 태현은 모른 척했다.

“…여기가 어딘데요?”

“가보면 대충은 알게 될 거야.”

은정은 약간 풀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태현이 쪽지에 적힌 주소를 모른다는 것에 안심한 눈치였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건 뭐든 복구시켜서 가져다줘. 혹시 모르니까 가이딩 약 챙겨가고.”

그렇게 태현은 까마귀 본부로 향했다. 정확히는 ‘진짜 본관’이었다.

누나가 말해줬을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찾았지. 태현은 은정이 숨겨진 본관을 어떻게 찾았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아니면 누가 찾아다 줬나? 태현은 숨기는 게 많던 에스퍼 실장을 떠올렸다.

서연은 꽤 이전부터 까마귀를 쫓고 있었다. 아마도 태현의 부친이 지시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현은 까마귀의 본진에 몰래 잠입했던 적도 있었다.

확인만 하러 간 것이라 교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바로 돌아와 누나에게 보고했었다. 우리가 찾던 놈이 확실하다고.

원래대로라면 천천히 영역을 좁혀가면서 숨통을 막을 계획이었는데, 그보다 먼저 교주가 도망갈 줄은 몰랐다.

신도들에게 개방하는 표면적 본관에서 ‘진짜 본관’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태현은 셔터가 내려가 있는 고물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급하게 떠난 건지 자물쇠도 제대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태현은 자물쇠를 발로 차서 밀어버리고 셔터를 올렸다. 고물상 안쪽으로 향하면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비밀 계단이 있었다.

태현은 망설임 없이 지하로 향했다. 교주는 주로 지하의 방에서 생활했다. 태현의 아버지가 자신을 잡아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을 테니 창밖으로 모습이 드러날 수 있는 위험은 최대한 줄였을 것이다.

-같음과 다름을 믿지 말고 옳고 그름을 믿어라. 명백한 것이 길을 연다.

교주의 방에 들어서자 삐딱하게 걸린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옳고 그름이라. 태현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갔다. 그딴 게 어디 있어. 태현은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이죽거렸다.

내부에는 깨진 화분이나 유리 파편들이 꽤 많았다. 일부러 이래 놨네. 태현은 발로 파편들을 밀어가며 복구시켜 볼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았다.

나무 조각 중 하나는 복구했더니 빗자루가 나왔다. 태현은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색이 좀 이상해 보이는 유리 파편도 그냥 유리병이거나 접시 같은 것이었다.

태현은 교주의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가 단추와 작은 종이 쪼가리를 발견했다. 단추를 복구시키자 옷이 나왔다. 주머니가 안쪽에 덧대어져 있는 셔츠였다.

안주머니가 있는 셔츠라고? 태현은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태현은 종이를 복구했다.

알파벳과 숫자가 이상한 형태로 표기되어 있었다. 휘갈겨 쓴 글씨로 적혀 있었고 꽤 구김이 있었다. 보아하니 수학 공식 같았다.

숫자 중 하나에는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물음표도 표기되어 있었다. 태현은 핸드폰을 꺼내 종이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종이를 곱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하나 건지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찝찝했다. 이 공간에 이렇다 할 물건이 없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뭘 숨겨둘 만한 공간이 딱히 없다는 건 영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공식이 메모된 종이 같은 것들을 허겁지겁 챙겨 나가야 했다면 분명 뭐가 더 있었을 텐데 왜 그 공간이 안 보이지? 태현은 교주의 방을 둘러보았다.

태현은 현수막을 잡아 뜯었다. 역시나 미닫이문으로 된 붙박이장 같은 것이 드러났다. 별다른 잠금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뚫렸으면 다 죽었단 소리니 일부러 안 만든 걸 수도 있겠네.

태현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안쪽은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태현은 안쪽부터 손으로 쓸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태현의 발치에 뭔가 차였다. 검정색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태현은 플라스틱을 복구했다. 그러자 안경이 나왔다. 오른쪽 상단부에 위치한 나사가 빠져 있었다. 주변부에 마모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는 튕겨 나간 것이 아니라 누군가 빼간 것 같았다.

굳이 안경 나사를? 태현은 안주머니에서 미세 확대경을 꺼내 나사 구멍 안을 살폈다. 얇은 전선이 몇 가닥 보였다.

설마 폭탄인가? 태현은 빠르게 안경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고 센터에서 지급받은 휴대용 폭발물 감지기를 꺼내 들었다. 감지기는 열쇠 고리형으로 만들어져 뒷주머니에 대강 넣고 다니기 편했다.

감식을 해보았으나 불일치가 떴다. 폭발물이 아닌데 전선이 있다?

태현은 안경을 착용해 보았다. 렌즈에도 별다른 기능이 없었다. 우선 이건 따로 챙겨야겠다. 태현은 안경을 접어 메신저 백에 집어넣었다.

***

슉-! 퍽!

시원한 소리가 울렸다. 은정은 펀치 머신에 주먹을 내질렀다. 두더지처럼 펀치 머신이 튀어 올랐다. 옆구리, 목선, 정강이 뒤쪽. 은정은 망설임 없이 펀치 머신의 불빛으로 표시된 지점에 타격을 넣었다.

한꺼번에 열댓 명의 적이 생성되었다. 은정은 눈앞에 들어오는 발길질과 주먹을 피하면서 움직이다가 한 머신의 허리 쪽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한꺼번에 5개의 머신이 벽 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탕!

사격이 시작되었다. 은정은 빠르게 낙법을 해 옆으로 피한 뒤 벽에서 튀어나온 총구 쪽으로 달렸다. 두 발의 총알을 피한 은정은 총구를 위로 꺾은 다음 총신을 뽑아 던졌다.

반대편 벽 쪽에서 사격 중이던 총이 은정이 던진 총신에 맞아 폭발음을 내며 망가졌다. 총 두 대가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띠링!

미션 클리어 문구가 떴다. 훈련장 안이 밝아지며 조명이 바뀌었다.

은정은 물을 마시려고 구석으로 걸어가다가 유령처럼 서 있는 지환을 발견하고는 순간 급소를 내리칠 뻔했다. 손을 뻗다가 빠르게 거둔 은정은 잠시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 시발 깜짝이야! 너 뭐 하는 새끼야…?”

지환은 눈을 부릅뜨고 은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은정의 손을 살피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쫄았나? 은정은 지환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야, 괜찮아?”

“네. …그런데요, 선배님.”

“엉.”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라져요?”

“뭐가.”

은정은 물병을 집어 들고 물을 들이켰다. 몸을 풀어주니 여러 가지 잡생각이 좀 덜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명이랑 싸우는 거요.”

그녀를 보는 지환의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은정은 지환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얜 뒤끝도 없나.

은정은 저번에 격추 사건 때 다툰 후로 지환이 아직 조금 불편했다. 욱해서 화를 낸 것에 미안한 감정은 있었으나 지환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지환과 페어가 된 뒤로 민재의 안전이 계속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민재는 아닌 척해도 호구였다. 신입이라 그런가, 지환이 징징거리는 것에 민재가 은근히 약한 것도 짜증 났다.

“그냥. 하다 보면 되겠지.”

귀찮게 하지 마라. 은정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최근에는 심란한 일도 많은 데다 민재로부터 지시받은 것도 있어 바빴다.

그 뺀질이 새끼, 뭘 똑바로 구해오는 거야 뭐야. 은정은 태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살짝 불안한 상태였다.

서연이랑 같이 자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천지 차이지? 혼자 그렇게 잘못 클 수가 있나? 생각에 빠진 은정의 앞으로 지환이 한 걸음 다가섰다.

“선배님, 저 전투 기술 좀 알려주세요.”

“…뭐?”

“싸우는 법이요. 방금 하신 것처럼.”

은정은 지환을 바라보았다. 서로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환의 얼굴은 여태까지 은정이 봐오던 것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냥 열의에 가득 찬 건 아닌 것 같고. 좀 화난 얼굴 같은데. 은정은 물병을 내려놓으며 지환을 슬쩍 떠보았다.

“…너 뭐 열 받았어? 누구한테?”

“…조금요.”

지환은 화가 났다는 건 숨기지 않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은정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센터 내에선 싸움이나 결투 금지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지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 싸워본 적 있어?”

“…딱히요.”

은정은 빠르게 지환의 턱 밑에 손날을 갖다 대며 목에 살짝 타격을 가했다. 켁. 지환이 작게 기침 소리를 냈다.

“지금 내가 친 데를 세게 치면 성대에 손상을 입힐 수 있어. 잘못 맞으면 말하기도 어려워져.”

“그럼… 왜….”

지환은 그럼 왜 자신의 목을 때린 거냐고 묻는 듯했다. 제법 억울한 표정이었다.

“살아 있는 걸 때린다는 건 그런 거야. 머신을 치는 게 아니라고.”

“…….”

“그래도 배울래?”

지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그렇지. 매번 히어로 운운하던 놈이니 이렇게 말하면 하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다. 은정은 손을 뒤로 물렸다.

“네. 가르쳐 주세요.”

지환이 말했다. 꽤나 비장한 얼굴이었다.

이것 봐라? 은정은 바뀐 지환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리고 민재 선배님은 모르게 해주세요. 제가 선배님한테 전투 기술 배우는 거요.”

은정은 민재에게 이 신입의 이상행동을 상의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환에게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게 모두 이루어져 후련한지 밝아진 얼굴로 지환이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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