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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59)화 (6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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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은 연차를 사용해 병원을 찾았다.

오늘은 엄마의 검사일이었다. 종양 제거 수술을 위해 몸의 상태를 재점검하는 날이라 여러 가지 검사를 위해 보호자가 내원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온 것이었다.

연차가 있지만 쉽게 사용하기가 어려운지라 오준은 센터장의 눈치를 살피며 사정을 해야 했다. 센터장은 커다란 선심을 쓰듯 오준의 연차를 결재해 주었다.

“바쁜데 뭐 하러 와. 엄마 혼자 검사받아도 된다니까.”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 왔어. 혼자 받아도 되기는 무슨.”

엄마는 오준이 병원을 찾을 때마다 괜히 역정을 냈다. 처음에는 화도 내보았으나 이제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냈다.

오준은 천천히 걷는 엄마를 부축해 검사실을 돌아다녔다. 초음파와 CT 촬영, MRI 촬영과 혈액검사 등이 이루어졌다. 앉아 있다가 이름이 불리면 부축을 하고, 장소를 옮겨 다시 대기하는 것을 반복했다.

“윤 비서님?”

하나의 검사만 남겨놓고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오준을 불렀다.

오준은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환자복을 입고 있는 우석을 발견했다.

“여기서 뵙네요.”

우석은 살짝 당황한 듯도 했다. 오준과 오준의 엄마를 번갈아 보더니 어색하게 입가를 끌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오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환자복을 입었지? 입원인가? 아니면 암이나 희귀병인가. 통원 치료를 받는 건가. 보호자는 아무도 없나? 온갖 병명들이 오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구셔?”

오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자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석은 오준의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엄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저 윤 비서님 직장 동료입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안녕하세요. 근데 젊은 사람이 병원에는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

엄마. 바로 튀어나온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한 오준이 엄마를 불렀다. 우석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오늘 건강검진 때문에 왔습니다.”

“아이고. 내가 오해할 뻔했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별 말씀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검진이라고? 오준은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보인 이상 반응이 부끄러워졌다. 당사자는 별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왜 혼자서 오만 가지 상상을 한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침 엄마의 이름이 불렸다. 오준이 몸을 일으키자 엄마가 어깨를 눌렀다.

“나는 이 검사가 마지막인데.”

“아. 어머님, 저는 끝났습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다녀오세요.”

“아유, 그래요.”

기다리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우석은 넙죽 기다리겠다는 말을 했다. 엄마는 그것에 또 긍정하고는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 기다리셔도 돼요.”

“첫마디가 그거예요? 인사도 아직 안 받아줬으면서?”

우석이 환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오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검사 결과는요?”

오준이 묻자 우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며칠 뒤에 나온대요. 나는 가이딩하는 거 빼곤 일반인이랑 신체가 똑같으니까. 가끔 와서 검사받아요.”

아. 어색하게 감탄사를 내뱉은 오준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우석은 마주하기가 어색했다.

오준이 기억하는 우석은 언제나 흰 가운이나 정돈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오는 차이 때문에 충격을 받았던 건가. 오준은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어머님은 어디가 안 좋으신 거예요?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요.”

“이번엔 종양이 꽤 커요. 가능성이 반반이라는데. 우선은 수술하자고 했어요.”

오준은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엄마의 수술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괜히 조금 더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머님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그건 왜 물어요?”

“기다리라고 하셨잖아요. 오늘 금식이세요?”

“엄마가 언제 실장님더러 기다리라고….”

우석은 오준의 말을 듣지도 않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어머님, 검사 끝나셨어요?”

“아유, 고마워요.”

우석은 오준의 엄마를 자연스럽게 부축했다. 덕분에 오준은 어딘가 어정쩡한 자세로 둘 옆을 걸어야 했다.

“우리 오준이가 회사에서는 괜찮나요?”

“네. 윤 비서님이야 워낙 유능하시다고 저희 부서까지 다 소문났죠.”

우석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내가 못 밀어줬는데도 늘 공부를 잘하던 아이였어요.”

“와, 역시 윤 비서님.”

우석은 엄마의 자식 자랑에 미소를 지으며 오준을 바라보았다. 착실하게 반응하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살짝 놀림이 섞여 있는 웃음이었다.

오준은 우석의 콧날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목구멍 아래쪽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울고 싶어졌다.

아, 망했다. 오준은 재빠르게 엄마의 다른 팔을 잡고 부축했다. 그는 일부러 사고를 전환하려는 사람처럼 당장 급한 엄마의 수술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들이 있었다. 지환은 풍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다 보면 모래를 쌓아 올리고 있는 민재가 나왔다.

민재는 모래 위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다. 일렁이는 불꽃 뒤에서 민재의 뺨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 때문에 민재는 조금은 불투명한 영혼 같기도 하다. 신비스러운 요정 같다고 지환은 생각했다.

“졸업 축하해.”

민재가 웃는다. 말간 웃음이다.

지환은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민재의 검은 머리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뻗어 곱게 뻗은 눈썹과 눈매를 엄지로 살짝 훑어보기도 했다.

선배님이 화내시면 어떡하지. 꿈인 걸 알면서도 지환은 초조해졌다. 그러면서도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입안이 자꾸만 바싹 말랐다.

“선배님, 졸업 선물 주세요.”

지환이 말하자 민재가 고민하듯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자꾸만 갈증이 났다. 지환은 손을 움직여 민재의 귓불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지환은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꿈인데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놀란 것처럼 민재의 눈이 다시 위로 뜨였다. 지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민재의 입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굿! 모! 닝! 빠빠빠빠~!

지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환은 눈을 뜨고 알람을 해제했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니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불 아래가 축축했다.

‘아아아아.’

이불을 젖힌 지환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며칠째 반복되고 있는 악몽이었다.

지환은 이불과 침대 시트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세탁실로 향했다. 그리고 세탁기 앞에 앉아 돌아가는 세탁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러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아무리 그래도 몽정을 할 나이는 지났잖아! 지환은 세탁기 위쪽에 머리를 콩 박았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머리를 울렸다.

몽정을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꿈 내용에 있었다.

왜 민재 선배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이며 거기다 한술 더 해 자신의 무의식은 민재 선배에게 이상한 상상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지환은 민재를 동경했다. 그리고 존경했다. 어릴 때 민재가 나온 신문 기사를 보며 히어로의 꿈을 키웠기 때문에 이렇게 센터에 들어와서 페어가 되는 행운을 누려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약간의 고난과 마찰이 있긴 했으나, 민재 선배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멋있는 영웅이었다.

그런데 동경의 대상이 이런 식으로 꿈에 등장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지환은 곱씹어보았으나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치겠다.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지환의 주머니가 웅웅 울렸다. 지환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어디?

민재로부터 온 짧은 문자였다. 어디냐고 왜 물어보시지? 오늘 마중이 좀 늦어져서 허전하셨나.

세탁실이라고 답장을 하려던 지환은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려 넘어졌다.

오늘은 아침에 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지환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지환은 문을 열자마자 허리를 접으며 사과했다.

“…앉아.”

민재의 목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든 지환은 조용히 구석으로 가 앉았다. 은정은 그런 지환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으나 호영은 굳어진 표정으로 지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센터장 특별 지시가 내려왔어. 이번에 구조된 아이들이 다니는 학관에 특강을 하러 가는 건데…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 그냥 좋은 기억을 만들어준다 정도만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진짜 전문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자리는 아니니까.”

“어…?”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의문을 표했다. 민재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왜.”

“아닙니다.”

민재의 물음에 지환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근데 특강은 선배님이랑 나랑 둘이 가는 게 아니었나? 지환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분명 센터장은 페어니까 둘이 가라는 식으로 말을 했었다.

“그날은 기자들도 올 거니까 최대한 언행 조심해야 돼. 곤란한 질문 들어온다 싶으면 일단 나한테 무조건 토스해.”

“아… 귀찮다.”

은정이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민재는 그런 은정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아! 왜!”

“네가 제일 문제야. 괜히 기자들이랑 시비 붙어서 싸우지 말고.”

“재수 없는 족속들이랑 말도 섞기 싫어.”

민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은정에게 계속 당부했다.

기자들 때문에 일부러 그러신 건가? 민재 선배가 그렇게 판단을 내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환은 괜히 서운했다.

근데 서운할 건 뭐지? 일은 나눠서 하면 양이 줄어드니까 좋은 건데. 지환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워졌다.

“그래도 같이 애들 볼 생각하니까 기대되네요.”

호영이 웃으며 민재에게 말했다. 지환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내심 민재와 둘이서 하는 무언가를 계속 기대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호영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지환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감정을 느꼈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세탁기에서 꺼내지 못한 지환의 빨래처럼 묵직하고 눅눅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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