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오준이 비서실 안쪽 탕비실에 앉아 편의점 샌드위치를 꺼냈을 때였다. 갑자기 탕비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센터장인가 싶어 빠르게 몸을 일으키던 오준은 어정쩡한 자세로 멈추었다.
탕비실 안으로 들어선 건 우석이었다.
“무슨….”
“왜 연락 안 받아요?”
다짜고짜 따지는 듯한 말에 오준은 황당해했다. 그러고 보니 우석은 오늘 오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점심 메뉴를 물어보는 문자를 남겼다.
왜 답장 안 하는지 몰라서 묻는 건가. 오준은 조금 울컥했으나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따로 부탁하실 거라도 있었나요?”
오준의 반응에 우석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오준을 바라보던 우석은 들고 온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점심 메뉴를 말씀 안 해줘서 사왔는데. 같이 먹어요.”
우석은 초밥 도시락을 오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뭐 하자는 거지. 내가 소문을 모른다고 생각하나? 오준은 우석이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과 밥을 같이 먹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못 먹을 이유라도 있어요?”
우석이 오준의 말을 잘랐다. 도시락 포장지를 제거하던 우석은 말을 해보라는 듯 오준을 바라보았다.
진짜 사람 놀리나. 오준은 짜증이 났지만 본인 입으로 우석의 연인 이야기를 들먹이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을 따질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따지고 들면 자신이 그만큼 최우석이라는 인간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는 것이었다. 오준은 그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이유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그러기에 좀 어색한 사이니까요.”
“어떻게 어색한데요. 잤긴 잤는데 사귀지는 않아서?”
우석이 교묘하게 비꼬면서 오준의 속을 긁었다.
“제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닌 거 같네요.”
오준은 최대한 돌려서 그 말을 받아쳤다. 네가 개자식인 거 알고 있으니까 그만 닥쳐줬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우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들어야 한다는 소리예요?”
“글쎄요. 그렇게 들리세요?”
“…윤 비서님.”
우석이 오준을 불렀다. 네. 오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소문 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안 물어봤어요?”
그럴 사이가 아니니까. 오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직장 동료 스캔들인데?”
듣지 않고도 오준의 말을 들은 것처럼 우석이 덧붙였다.
“안 사귀어요. 우민재 실장이랑 절친한 건 맞는데 그런 사인 아니에요.”
“굳이 해명하실 필요는….”
“화내고 있잖아요, 지금.”
시발. 오준은 욕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화낸 게 아니라….”
“소문에 화낼 정도로는 나한테 관심이 있는 모양이네요.”
우석은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재밌냐. 오준은 약이 올랐다. 순식간에 우석에게 절절매는 머저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전혀요. 실장님은 착각에 재능이 뛰어나신 편인가 봐요.”
오준이 이죽거려 보았으나 우석은 타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떼어낸 다음 오준 앞에 내려놓았다.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편이죠?”
“…….”
“그럼 해명된 걸로 알고 갑니다. 원래는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조금 무서워서.”
“저 그냥 안 먹을 테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오준이 말하려는 찰나, 우석이 오준 앞에 놓여 있던 편의점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요.”
“아니 잠깐….”
우석은 샌드위치를 살짝 흔들어 보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탕비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오준은 정갈하게 놓여 있는 초밥들을 노려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음식에는 죄가 없으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하며 오준은 늦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
지환은 훈련장에 들어가 훈련 시뮬레이션을 켰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는데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최근에는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훈련장을 찾곤 했다.
적을 하나하나 쓰러뜨려서 클리어하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성공! 이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지환은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지환의 이번 미션은 경비를 서는 적에게 들키지 않고 잠복해 타깃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지환의 움직임과 소리가 포착되면 적이 지환을 따라붙어 공격하는 시스템이었다.
지환은 숨을 죽였다. 적의 인영은 천천히 걸어와 지환 근처에 섰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는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지환은 그 정적 속에서 문득 순식간에 사라졌던 민재의 표정을 떠올렸다. 일상적인 것에 낯섦을 느끼는 얼굴.
“없어.”
가족이 없다고 말하는 얼굴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케이블카도 타본 적 없다고 했고.
이따금 지환이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를 하면 민재는 라디오 사연을 듣는 듯한 표정을 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것처럼.
적의 인영이 걸어서 사라졌다. 지환은 벽 쪽에 몸을 붙인 뒤 목표 지점까지 단숨에 날아갔다. 성공! 이라는 글씨가 눈앞에서 번쩍이다 사라졌다.
지환은 훈련장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하지 못한 것. 하지 못하게 된 것. 지환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에스퍼가 되면서 내가 해볼 수 없게 된 것들이 뭐가 있지? 지환은 그걸 민재와 하고 싶었다.
***
“이제 끝났지? 들어가.”
“네? 남은 일정 있어요, 선배님.”
“없어, 일정.”
“아니에요. 선배님이 잊으신 거죠. 있어요!”
가이딩실에서 나오면서 민재는 오늘 지환과 함께하는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슬슬 조 박사 쪽을 구슬리든 족치든 해서 정보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지환은 꼭 오늘 해야 하는 일이라며 고집을 부렸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데. 말해봐.”
“…정찰 같은 거요.”
정찰? 얘가 정찰할 게 뭐가 있지. 민재는 지환에게 개별 임무를 맡긴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지환은 자신이 알아본 게 있으니 꼭 좀 같이 가달라는 말을 했다.
무슨 대단한 정보를 물어왔을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으나 민재는 지환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기차를 타게 될 줄은 몰랐다.
“…너 날 줄 모르냐.”
“날아가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
어딜 가는데 날아가지도 못하는 건데? 민재가 말을 해보라는 듯 쳐다보자 지환은 모자를 내밀었다.
“제가 이거 챙겨왔어요.”
지환은 검은 야구모자를 민재의 머리 위에 얹었다. 정찰을 나가면서 뭐 그렇게 신이 나는지 지환은 계속 헤벌쭉 웃고 있었다.
지환은 기차 예매를 처음 해봤는데 어디가 좋은 자리인지 모르겠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민재도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기차야 그냥 레일을 따라가는 건데 어디 앉으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었지만, 지환이 조잘대는 듣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기차에 오른 두 사람은 민재가 창가 쪽에, 지환이 복도 쪽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저 이것도 가져왔어요.”
지환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삶은 달걀을 꺼냈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잠시만요. 지환은 갑자기 기차 칸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콜라 캔 두 개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자판기에서 뽑았어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지환이 자랑하며 앉았다. 그러더니 의자에 부착된 판을 펼쳐두고 혼자 달걀을 까기 시작했다.
“…너 뭐 해?”
“잠시만요. 제가 까드릴게요.”
아니. 뭐 하냐고. 민재는 지환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정찰 가는 곳이 어딘지 조금씩 불안해졌다.
민재가 지환을 경계하듯이 쳐다보자 지환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정찰은 아니고, 제 졸업 여행이에요.”
“…뭐?”
이 새끼가 돌아버렸나? 민재는 지환의 당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저 다른 건 몰라도 졸업 여행은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결과적으로 히어로도 되고, 선배님이랑 활동하게 돼서 진짜 너무 좋은데….”
“…….”
“제가 사실 수능 날에 발현했거든요? 그래서 못 해본 게 생각이 날 때가 있더라고요. 갑자기 많은 게 바뀌어서… 졸업식도 당연히 못 갔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더 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요…. 선배님이랑 꼭 가고 싶었어요, 졸업 여행.”
지환은 혹시나 비상 상황이 생기면 돌아갈 수 있게 근교로 장소도 정했다며 변명을 이어나갔다.
졸업이라. 민재의 인생에선 보편적으로 밟아지는 수순 같은 것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국내 유일의 랭크였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온 과정에는 평범하다 할 법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환의 입장에선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살아오던 것을 한순간에 빼앗긴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민재는 지환의 손에 들려 있는 울퉁불퉁하게 까진 달걀을 뺏어서 입에 넣었다.
“어….”
“까준 거라며.”
지환은 민재가 달걀을 씹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민재는 창을 가리켰다.
“왜 날 봐. 기왕 가는 거 바깥 풍경이나 봐.”
바깥은 해가 이미 져서 온통 검었다. 속도가 빠른 기차는 풍경을 오래 잡아두지 못해 끝나지 않는 터널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민재는 편하게 좌석에 기대며 창을 쳐다보았다. 검은 창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그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환의 얼굴도 비쳤다. 민재는 어쩐지 좀 민망해졌다.
“…볼 것도 없네.”
“그래도 좋아요.”
민재는 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민재는 하나 남아 있는 달걀을 테이블에 두드려서 껍질을 깠다. 막상 까보니 지환이 깐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작은 껍질 조각을 털어낸 민재는 지환의 턱을 손으로 잡아당기고는 그대로 달걀을 지환의 입에 쑤셔 넣었다.
“됐냐.”
지환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더니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눈이 반달처럼 예쁜 호선을 그렸다. 갈색 눈동자가 살짝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나는 게 보였다.
빵빵해진 볼로 달걀을 씹던 지환은 콜라 캔을 따 민재에게 건넸다. 민재는 미적지근한 콜라를 홀짝였다.
한 시간 좀 넘게 달리던 기차가 멈추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짭짤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느껴졌다. 민재는 지환이 안내하는 대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둘은 불이 꺼진 건물 앞에 도착했다.
“어…. 이게, 왜… 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통유리창으로 된 건물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면 꽤 아름다웠을 것 같은 외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업을 하고 있었다면.
지환은 울상이 된 얼굴로 민재를 돌아보았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민재는 입을 열었다.
“너 돈 좀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