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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은 센터장 앞으로 온 우편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최근 자신이 작성한 예상 질문으로 인터뷰를 하고 온 센터장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듯했다. 후원 문의 우편이 최근 들어 두툼하게 쌓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국민들에게 나름의 큰 충격을 안겨준 까마귀 소동을 이용해서 에스퍼 아동의 권리와 보호를 주장하는 바른 정치인의 이미지와, 센터 내 에스퍼들이 구조 업무에 헌신하게끔 ‘잘 교육하는’ 이미지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챙긴 셈이었다.
정치인이란 작자들은 원래 저렇게 얍삽한지 오준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윤 비서.]
“네, 네!”
오준의 책상에 있는 스피커에서 센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오준은 혀를 깨물고 말았으나 최대한 정상적인 발음으로 답하려고 노력했다.
[이번에 구조된 애들 명단이랑 상태 체크된 자료 좀 가져다줘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네.”
당장 관련 부서에 가서 가져오라는 이야기였다. 메일로 받아두면 오준이 함부로 열어볼 거라 생각하는지, 진성은 꽤 자주 오준에게 자료를 직접 받아오게 시켰다.
오준은 정리하던 우편을 책상 구석에 모아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바로 능력검사실로 가서 아이들의 명단과 능력, 능력치가 정리된 파일을 출력해 건네받았다.
그다음 오준은 아이들의 가이딩 관련 자료를 받기 위해 가이딩실로 향했다.
최우석 실장이 있을까.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마주친 지는 꽤 되었다. 더군다나 센터 건물 안에서 우석과 마주쳤을 때는 매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센터 밖에서 둘의 관계는 이도 저도 아닌 관계였다. 몸부터 섞고, 고백을 받았는데 거절했으나 끝나지 않은 이상한 관계. 그렇게 생각하니 상당히 막장 드라마 같았다.
오준은 괜히 어색한 기분으로 가이딩실에 들어섰다.
“비서실에서 왔습니다. 이번에 구조된 아이들 가이딩 수치 상태가 체크된 자료를 좀 받아오라고 하셔서요.”
“아, 센터장님이요?”
“네.”
가이딩실 직원은 실장이 부재중이니 우선 말씀드리고 자료를 정리해 오겠다고 했다.
괜히 걱정했네. 오준은 조금 민망해졌다. 가이딩실 입구 쪽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 오준은 옆쪽으로 가서 서 있기로 했다.
“어제도 왔다던데?”
“그래? 역시 맞네.”
두 명의 직원이 방금 전까지 우석이 서 있던 프런트 앞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손목에 노란빛 경고등이 깜박이는 걸 보니 에스퍼들인가 보다 싶었다.
“뭐, 원래 유명하잖아. 두 실장 오래된 커플인 거 센터에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진짜 사이좋나 봐. 오래 만나면 안 질리나.”
“같이 자란 데다가 에스퍼랑 가이드니까. 좀 다르려나.”
실장. 에스퍼. 가이드. 세 개의 단어가 오준의 귀에 꽂혔다.
센터에는 실장이 몇 없는데, 개중에 실장인 가이드는 딱 한 명뿐이었다.
최우석 실장이랑 우민재 실장이 사귄다고? 오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어제도 서로 보고 싶었다면서… 아주 애틋하셨단다.”
“오….”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얼마든지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었다.
근데 정말 다 지어낸 말일까? 프런트 앞의 에스퍼들은 최근 실장 둘이 보여주는 닭살 행보에 대해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오준은 최근 책상에 놓여 있지 않던 커피와 뜸해진 연락 주기를 떠올렸다. 최근에 사귀게 된 건가.
그럴 수 있었다. 최근 연애를 시작하면서 고백을 거절한 자신에게 자연스레 소원해진 것일 수 있었다. 애초에 사귄 것도 아니니 자신한테 연애를 시작했다는 말을 꼭 전할 이유도 없으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바로 갈아타?’
만약 소문대로 두 실장이 오래된 연인 사이라면? 오준의 머릿속으로 작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자신이 우습고 같잖아서 한번 갖고 놀아본 것일 수도 있었다.
오준은 손톱으로 손바닥을 할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오준은 기분 더러울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최우석 실장과 자신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면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우석은 답이 오지 않는 메시지창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요 며칠 정신이 너무 없어 연락하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 하려니까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쥐어짜 낸 질문이었다.
뭐 하면서 지냈냐고 물어보기엔 기간이 좀 애매했다. 그렇다고 대뜸 자신의 안부를 줄줄이 말하면서 연락이 늦은 걸 변명하는 것도 웃겼다.
애초에 그렇게 많은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보통 저렇게 대답하기 간편한 시답잖은 질문에는 곧잘 답장해 주는 편이었는데. 오늘 점심을 못 먹은 건가. 아니면 핸드폰을 두고 출근했나?
“아, 실장님. 아까 오전에 비서실에서 오셔서 이번에 구조된 애들 가이딩 상태 기록해 둔 거 자료 요청하셔서 드렸어요.”
“애들 기록을?”
그걸 왜 지금 말해. 우석은 튀어 나가려는 말을 꾹 참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 구조된 애들 중에는 센터장의 눈에 들 만큼 희귀한 능력을 가진 아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 인권을 운운하는 인터뷰를 했으니 또 무슨 개 같은 행보를 보여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네… 드리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냐. 센터장이 달라는데 어쩔 거야.”
후배는 우석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우석은 다시 문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최근 가이딩실의 분위기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들었을 게 뻔했다.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인 건지는 몰라도 그게 좋은 쪽이 아님은 분명했다.
-가이딩실 왔었다면서 왜 나 안 찾았어요?
우석은 문자를 다시 전송했다. 역시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
센터는 면회 기간을 맞아 조금은 활기찬 분위기로 바빠졌다. 평소에도 면회가 가능했지만 면회 기간에는 면회 허가가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 이 기간을 노렸다.
센터 내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특히 에스퍼의 경우 바깥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만남을 자주 가지면 테러의 타깃이 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센터는 면회를 통해 센터 건물 안에서 만날 것을 권고하는 편이었다.
민재는 면회를 진행하는 접견 공간으로 향했다. 센터장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브리핑 겸 조회를 진행하려고 여는 공간이라, 면회 기간에는 그곳을 개방해 손님을 맞이했다.
원래대로라면 민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나 이번 면회 기간에는 팀원 두 명의 부모님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호영의 부모님께는 복분자주를 받았고, 지환은 페어로 활동하고 있으니 얼굴은 비춰야 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어? 선배님.”
민재는 비교적 입구 쪽에 앉아 있는 호영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인자한 인상의 부부가 민재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유, 우리 호영이 팀장님이시죠.”
“앉아 계세요. 전에 주신 복분자주 잘 먹었습니다.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선물을 사오는 것도 고민했으나 자신이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목이 집중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다행히도 호영의 부모는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호영의 어머니가 민재의 눈앞으로 작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에스퍼 출동 현장 사진이었다. 구석에 조그맣게 나와 있는 호영의 모습을 오려 붙인 것 같았다. 그런 식의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누가 봐도 자식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듬뿍 담겨 있는 물건이었다. 호영이 비행 시연에 참가시켜 달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민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사진 잘 나왔죠.”
“아, 엄마. 왜 그래.”
호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스크랩북을 가리려 들었다. 민재는 스크랩북을 살짝 잡아당겼다.
“잘 나왔네요. 호영이가 실력이 좋은 친구라 제가 팀에서도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민재의 말에 부부는 안심이라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호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절하게 느껴지는 칭찬들을 좀 더 늘어놓은 민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처럼 가족끼리 모였는데 타인이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도 민폐였다.
민재는 지환의 테이블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다행히 지환의 테이블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친근감 있게 말을 붙이자 지환의 부모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얘가 민폐를 부리지는 않나요?”
“아닙니다. 지환 에스퍼는 적응이 무척 빠른 것 같아요. 습득력도 빠르고요.”
민재가 입에 발린 칭찬을 하자 지환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았다. 정말요? 괜히 되묻기까지 했다. 민재는 시선을 고정한 채 지환을 무시했다.
“얘가… 아직 어린데. 위험한 현장을 돌아다닌다니까… 어휴.”
“아이, 엄마. 나 잘한다니까.”
센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러 사건을 겪었고, 그게 기사로도 나갔으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클 만도 했다.
“제가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러나 민재는 이도 저도 아닌 입바른 소리를 하며 들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잠시 시간을 죽이다 민재는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강당 안 테이블에는 각각의 가족들이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을 여전히 아기처럼 품에 안아 쓰다듬는 부모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가족도 있었다.
그 풍경의 한가운데에서 민재는 다른 차원에 뚝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민재 선배님.”
누군가 민재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손짓하는 지환이 보였다. 그는 본인이 손짓해 놓고는 빠르게 민재 쪽으로 뛰어왔다.
“부모님은?”
“가셨어요.”
“잘 모셔다드렸어?”
“네. 선배님, 오늘 감사해요. 찾아와서 인사도 해주시고… 칭찬도 해주시고….”
“뭘.”
지환은 가족을 오랜만에 만난 게 꽤 기뻤는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선배님 면회 때 저도 인사드리고 싶어요. 부모님 언제 오세요?”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발현 이후 면회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 년 정도는 기다렸으나 그 뒤로는 포기하고 잊었다. 찾아보면 어디서 사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겠지만 찾아보지도 않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니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없어.”
“…네?”
민재의 짧은 대답에 당황한 지환이 되물었다.
“안 계셔.”
“아….”
지환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지환은 아마도 적절한 말을 고르기 위해서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민재는 오늘은 더 이상 입바른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피로했다.
“오늘 급식실 메뉴 뭐야.”
민재가 물었다. 지환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오늘의 메뉴를 읊기 시작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급식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