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오준은 출근하자마자 책상을 확인했다. 오늘도 커피가 없었다. 얼마 전 까마귀 소동이 있은 후부터 우석은 오준의 책상 위에 커피를 두지 않았다.
아이들이 대거 구조되었다고 하던데 많이 바쁜가. 오준은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책상이 좀 휑해 보였다.
어쩌면 일이 바쁜 것과 관계없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 질려서 그만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단히 진심인 것처럼 굴더니, 그럼 그렇지. 애초에 내가 왜 좋은 건데? 오준은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은 빠른 편이었다.
오준은 나름 ‘정의’라는 것을 위해 애를 쓰고 무언가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부류도 아니었다.
오준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우석의 눈을 떠올렸다. 자신의 손을 슬쩍 쓸어보던 손가락도….
“윤 비서.”
출근한 센터장이 오준을 불렀다. 오준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센터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준의 책상 위에 무언가 내려놓았다.
-히어로 센터 까마귀 쪽에서 아이들 구조해.
-에스퍼 아이들 구조 후 행방은?
신문 기사였다. 어제 오준이 스캔해 센터장에게 보고했던 것들 중에 하나였다.
“내가 내일 인터뷰를 하게 되어서 말이야.”
“일정에 기록해 두겠습니다. 시간과 장소가 정해졌나요? 다과도 준비할까요?”
“아니. 내일 낮 2시까지 그쪽으로 가기로 했네. 아동 복지 센터로.”
복지 센터에 가서 인터뷰를 한다고?
“그쪽 센터장이랑 합동 인터뷰를 할 건데, 자네가 예상 질문을 좀 작성해 주면 좋겠어.”
“아….”
예상 질문? 오준은 눈을 깜박였다. 센터장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여론을 주무르길 좋아하는 인사라 인터뷰 관련해서는 일정 관리 외에 오준에게 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오준은 머뭇거렸다.
“일정이 급해서 좀 힘든가?”
센터장이 물었다. 오준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오늘 저녁까지 정리해서 드리면 될까요?”
“음, 그래요. 아이들 일이니까 신경 좀 쓰고.”
언제부터 본인이 아이들을 신경 쓰셨다고. 센터장은 아이들을 통해 에스퍼 인권 침해 문제를 건드려 자신의 이미지 변모와 히어로 센터의 입지 강화를 한 번에 이루려는 심산일 터였다.
오준은 우석을 떠올렸다.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게 아이들과 그 사람에게는 좋은 쪽일까? 아니면 오히려 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나.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센터장은 말을 끝마치고도 오준의 앞에 서 있었다.
뭐지? 적당히 시선을 깔고 기다리던 오준이 살짝 위를 보자 센터장과 눈이 마주쳤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윤 비서는 똑똑하니까 잘할 수 있겠지?”
“…….”
“잘 부탁해요.”
센터장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만큼은 너무나 인자했다. 정말로 아이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진실된 정치인 같았다.
잘하라는 건 어느 쪽일까. 닥치고 가만히 있는 쪽? 아니면 제대로 해내는 쪽? 오준은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허허. 센터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오준은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뒤로 앉았다. 이마가 책상에 닿았다. 쿵쿵. 가볍게 이마를 책상에 박았다.
생각하지 말자. 오준은 센터장이 준 기자의 정보를 훑기 시작했다.
***
우석은 줄지어 들어오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가이딩 부족 사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던 아이들이라 좀 더 케어가 필요했다.
결국 우석은 조를 짜서 시간대별로 찾아와 매일 가이딩을 받도록 계획했다. 아이들이 가이딩실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기 때문에 어쩐지 학교 같은 분위기가 났다.
게다가 아이들과는 별개로 가이딩을 필요로 하는 에스퍼들이 많았다. 며칠 전 에스퍼들이 까마귀 소동에 대거 투입되었던 터라 가이딩실은 말 그대로 박이 터지는 중이었다.
어제도 우석은 퇴근하자마자 씻고 옷만 갈아입은 뒤 그대로 다시 출근했다. 아이들 중 가이딩 수치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애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석은 챙겨야 할 놈이 하나 더 있었다.
가이딩실 입구 쪽에서 좀비 꼴인 민재가 걸어오고 있었다. 원 플러스 원처럼 달고 다니는 지환도 함께였다. 가이딩실을 대충 둘러보던 민재는 우석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왔다.
“왜 자꾸 오래.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헛소리 말고 여기 누워.”
민재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석이 달갑지 않아 할 농담을 내뱉었다.
평소였으면 맞장구라도 쳐줬겠지만 민재의 입이 열리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우석은 민재에게 침대에 누우라고 손짓했다.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던 듯 민재는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지환이 당연한 듯 침대 옆에 딱 붙어 섰다.
“…뭐 해?”
우석이 물었다.
“…네? 그냥 있는데요.”
지환은 이상한 소리를 묻는다는 듯 되물었다.
“옆으로 좀 가. 나는 가이딩 뭐 원격으로 하냐?”
우석이 말하자 지환은 뭔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슬쩍 비켜섰다. 우석은 민재 쪽으로 다가가 민재의 손목과 이마를 짚었다. 민재의 손목에는 노란 표시등이 켜져 있었다.
“잠은 좀 잤어?”
“어. 어제 좀 잤어.”
우석은 민재의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을 바라보았다. 정말 조금 잤나 보네. 우석은 심란한 마음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몇 시간째 출근이야.”
민재가 물었다. 우석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해주고 들어가서 자. 그 뭐냐, 가이드실에도 유능한 애 있잖아. 서연이 걔 불러다 대리 시켜.”
대리는 무슨. 우석은 민재의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네. 진짠가 봐. 근처에서 누군가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이딩실에 있는 가이드들과 에스퍼 몇이 빠르게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민재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우석도 들었는데 에스퍼인 민재가 못 들었을 리 없었다. 민재가 우석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이야기야, 라고 묻는 듯했다.
민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침대 쪽 커튼으로 시야를 가렸다. 어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석은 웃어 보이며 다시 커튼을 열어젖혔다.
“너랑 나랑 오래된 커플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단다.”
“…뭐?”
“지금 커튼 치면 더 엄한 상상 할 테니까 그냥 내버려 둬.”
허. 민재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심각한 사안은 아니다 싶었는지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민재의 표정과 반대로 옆에 있던 지환의 표정은 싸하게 굳어졌다.
“…진짜예요?”
지환이 물었다. 얜 문맥 파악을 잘 못하나? 우석은 가라앉은 지환의 얼굴에 기가 찼다. 민재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진짜겠니.”
“아.”
우석의 대답에 지환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민망한지 목덜미를 긁적였다. 살짝 상기된 얼굴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진짜 재밌네. 우석은 이렇게 다 티가 나는 지환을 민재가 언제 눈치채게 될지 조금 궁금해졌다.
우민재는 다른 데는 눈치가 빠르면서 본인의 연애 쪽으로는 눈치가 더딘 편이었다. 굳이 전해주고 싶지 않아 전하지 않았지만, 민재가 지나가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는 에스퍼나 가이드들도 꽤 있었다.
“…은정이 왔었어?”
살짝 가라앉은 민재의 목소리에 우석이 빠르게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서연에게서 은정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길 들은 모양이었다.
은정은 가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성인이 되고는 좀처럼 나오지 않던 버릇이었는데. 우석은 한숨을 삼켰다.
“…아니.”
우석의 대답에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민재의 가이딩 수치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민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우석은 가이딩 약을 챙겨 민재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보게?”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은 민재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
지환은 울고 있는 아이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지환의 두 손 사이에는 팔이 똑 떼어진 토끼 인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는 서러움을 못 이겨 빨개진 얼굴로 목 놓아 울었다.
“형이 정말 정말 미안해!”
지환이 열심히 사과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지환은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조금 전, 지환은 민재를 따라 가이딩실을 나가려다가 저지당했다.
“실장님 도와서 쟤네랑 좀 놀아주고 있어라.”
지환은 그렇게 상태 체크와 가이딩 대기 중인 아이들과 남게 되었다.
지환은 의지를 다잡았다. 이왕 노는 거 신나게 놀아줘야겠다! 그렇게 한 아이의 인형으로 신나게 역할극을 해주던 지환은 인형의 팔을 뜯어버렸다.
힘을 크게 준 것도 아니었는데. 본인이 에스퍼가 되었음을 간과하고 있던 지환은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잠깐의 정적 후,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준 건데!”
아이는 울다가 못해 딸꾹질도 하기 시작했다. 지환은 아이의 등을 쓸어주며 우선 달래는 것에 집중했다.
“형이 다시 고쳐줄게!”
“…어떻게?”
아이는 지환의 말에 울음을 잠시 멈추었다. 지환은 빠르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태현이 가이딩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무슨 일인데? 가이딩실에 무슨 비상….”
“형! 여기야!”
지환은 몸을 일으켜 손짓했다. 태현은 아이들과 모여 있는 지환의 모습을 보고는 달리던 속도를 늦췄다.
“…비상이라고?”
태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심각해.”
“죽….”
태현은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다 아이들을 보고는 멈추었다. 죽고 싶냐는 말을 뱉으려고 한 것 같았다.
지환은 태현에게 토끼 인형을 내밀었다. 태현은 토끼 인형과 지환을 번갈아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현은 능력을 사용해 아이의 토끼 인형을 고쳐주었다. 계속 입을 삐죽 내밀고 있던 아이는 신이 나서 방방 뛰더니 태현과 지환을 한 번씩 안아주었다.
“나도!”
다른 아이가 흠집이 난 작은 피규어를 가지고 왔다. 태현이 지환을 매섭게 노려봤다. 지환은 웃으며 아이들의 뒤로 숨었다.
“…이리 와봐.”
태현은 아이들한테 손짓하더니 다른 곳에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아이들이 태현의 앞으로 줄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