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민재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싱글거리는 얼굴로 지환이 서 있었다.
민재는 문을 닫았다.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지환은 매일 아침 일찍 민재의 숙소 앞에서 대기했다. 알람시계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민재가 늦잠을 자면 문을 두드리기도 했으니, 알람시계나 마찬가지긴 했다.
민재는 문을 다시 열면 지환이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환의 웃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잊으신 건 챙기셨나요?”
두고 온 물건이 있어 문을 닫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꼴 보기 싫어서 닫은 건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민재는 참았다. 이미 그저께 해보았으나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말하기 전에는 출근시켜 주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서 돌아버릴 뻔한 뒤로 그만두기로 했다.
“하….”
“선배님, 피곤하세요? 어제 잠 또 못 잤어요?”
“너 진짜….”
네? 지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민재를 바라보았다. 지환의 이상행동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시위대에서 날계란을 얻어맞은 날. 지환은 민재에게 자신이 지키겠다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에 아무런 말도 대꾸하지 못한 자신도 문제였지만, 그 후로 본인 딴에는 민재를 지키겠다고 그러는 것인지 극성 매니저처럼 구는 것이 문제였다.
이전에는 알에서 갓 부화한 오리인 양 민재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일거수일투족 따라붙어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혹시 추우세요? 제가 손난로 드릴까요?”
“아니! 안 추워!”
아직 겨울도 아닌데 무슨 손난로야! 민재는 질색했다. 근데 선배님 창백하신데… 손발 저리세요? 주물러 드려요? 따위의 말을 우렁찬 성대로 울려대는 바람에 민재는 센터 복도에서 모자를 눌러쓰거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더군다나 제일 어이없는 것은 이 자식이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민재의 일정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온다는 것이었다.
민재는 한 번도 지환에게 자신의 일정을 미리 고지해 준 적이 없는데, 지환은 이미 안다는 듯 행동했다. 심지어는 민재가 까먹은 일정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오늘은 좀 이따 팀 회의 있으니까, 우리 같이 밥 먹고 가면 되겠네요!”
덕분에 센터 내 일정 참여에 성실해졌다면서 실실 웃던 우석의 표정이 그려졌다. 아, 혹시 그쪽에서도 정보가 빠져나가나? 민재는 이를 갈았다.
“선배님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민재는 심란한 마음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또 안 먹는다고 하면 자신도 따라 굶는다고 설쳐서 회의 시간에 꼬르륵거릴 게 뻔했다.
어찌 되었건 크게 실수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열성적으로 민재의 일정과 끼니까지 챙겨주고 있는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나쁠 것이 없었다.
“…그냥 급식실이나 가자.”
“네!”
지환은 밝게 웃어 보이고는 민재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그러고는 미리 알아둔 오늘 메뉴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민재는 아무거나 먹으라고 대충 대꾸해 주며 급식실로 향했다.
***
최근 팀 회의는 까마귀에서 구조해 온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이어졌다.
민재는 은정에게 아이들의 관리를 맡겼다. 에스퍼 육성용 보호기관에 바로 맡기기에는 위험이 클 것 같아 한 선택이었다. 숙소 방 중 현재 비어 있는 방을 살짝 개조해 아이들이 합숙할 수 있도록 했다.
“괜찮겠어?”
“응,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마 대처도 빠를 거 같고. 해볼게.”
민재의 조심스러운 권유에 은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은 서연과 함께 시간을 나누어 교대로 애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뭐 좀 있어?”
민재가 물었다. 은정은 피곤한지 관자놀이 근처를 누르고 있었다.
“일단 애들이 좀 불안정한 거랑… 애들이 말을 잘 안 하거든?”
“재촉할 필요는 없는 거 알지?”
“당연하지. 근데… 가끔 가다가 대화가 될 때가 있는데.”
은정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생각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몇 번 정도 후원자 앞에 내세워진 적이 있나 봐.”
“후원자?”
“응. 후…. 애들 앞에서 몇 퍼센트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하더라고?”
씹새끼들. 은정이 욕을 뱉었다. 호영과 지환의 표정도 가라앉았다.
후원자? 센터 측 쥐새끼인가? 아니면 다른 쪽? 어찌 되었건 외부 세력의 개입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디랑 어디까지 연결이 된 거지? 민재는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후원자라고 말한 걸 보면 아마 까마귀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는 쪽일 터였다. 꼭 이득이 아니더라도 변태적 성향을 지닌 부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애들이 더 있을 것 같아. 우리가 놓친 애들 말고도 더.”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애들이 만난 적이 있대?”
“만났다기보다… 무슨 명단을 봤다는데 수가 꽤 많았대. 애들 말론 손가락 발가락보다 많았다고.”
건물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민재는 생각했다.
어쩐지 덩치에 비해 본거지가 많이 허술하다 싶었다. 그렇다면 지부가 여러 개일 가능성이 컸다.
정말 중요한 핵심 구역을 제외하고는 혹시나 걸리더라도 지부 몇 개로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두었을 수도 있었다. 민재는 시위대에서 만났던 여자를 떠올렸다.
“일단 은정이가 조금만 더 고생해 줘. 너네도 은정이가 부탁하면 재깍재깍 달려가서 도와.”
네! 호영과 지환이 빠르게 대답했다. 민재는 회의를 마무리했다. 알아봐야 할 것들이 더 늘어났다.
***
우석은 가이딩실 입구에 기대어 서서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후배 중 한 명이 엄청 맛있는 곳에서 사온 원두라고 자랑하면서 나눠준 것인데, 자신이 커피를 내리는 능력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별로 맛이 없었다.
“하… 좀….”
고개를 살짝 내미니 대각선 복도를 지나는 민재가 보였다. 최근 민재는 복도에서 내내 저런 소리를 내면서 다녔다. 그도 그럴 게 그 S급이 철썩 붙어서는 계속 주접을 떨어댔기 때문이었다.
“제가 업어드려요? 어지러우시면 사탕이라도 드릴까요?”
참나. 우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예의 S급은 최근 주로 추리닝이나 센터 작업복만 입고 다녔는데, 어디든 주머니에 주접을 떨 작은 물품들을 쑤셔 넣고 다니기 용이해서인 것 같았다. 불룩한 주머니에서 뭐가 나올 때마다 질색하는 민재의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그때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는 민재를 데리고 복귀했을 때부터 뭔가 좀 있다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그 의도가 좀 의심스러웠는데 그래도 민재에게 해가 가는 게 아니니 우석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맙기도 했다. S급이 저렇게 극성스러운 덕에 민재는 요즘 조금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우석이 챙기지 않으면 하루 종일 물도 입에 안 댈 때도 있던 민재가 끼니도 잘 챙겨 먹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다음에 귀찮을 때 쟤 시켜서 민재 깨워야겠다. 우석은 즐거운 생각을 했다.
“뭐 보고 계세요?”
옆에서 후배가 말을 걸었다.
“재밌는 거.”
“재밌는 거요? 아… 민재 선배님 보시는구나.”
후배 가이드는 말끝을 살짝 흐리면서 우석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어? 우석은 뭔가 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사이좋으시네요.”
“뭐, 오래되었으니까.”
우석과 민재가 친한 사이이자 가이딩 파트너라는 것은 센터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근데 실장님 진짜 쿨하신 것 같아요. 역시 급도 높으시고 오래된 사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어 보여서… 두 분 진짜 되게 단단한 사이 같아요.”
응? 무슨 소리야? 우석은 후배의 말에서 무언가 잘못된 단어 선택을 들은 것 같아 되물었다.
“저는 애인이 저렇게 다른 사람이랑 붙어 다니는 거 못 참을 거 같거든요. 하긴 뭐, 저 S급 에스퍼는 가이드도 아니고 너무 어리니까… 역시 에스퍼는 가이드 못 이기겠죠?”
“아니, 아니, 잠깐만. 뭐라고?”
“네?”
“그 전에 뭐라고? 애인?”
우석의 질문에 후배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네, 두 분 애인 사이시잖아요. 그것도 되게 오래된!”
“뭐어어?”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우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아니… 에요?”
“아니야!”
헛, 죄송해요. 후배가 당황하며 사과했다. 우석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여 대충 사과를 받아줬다. 대체 이 개소리는 어디서부터 퍼진 거야? 환장할 노릇이었다.
“넌 근데 그 이야길 어디서 들었어?”
“네? 어… 그냥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데.”
후배는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이 들은 말을 터놓았다. 소문은 꽤나 그럴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어릴 때 센터에서 만나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과 사춘기를 겪으면서 마음을 깨달은 우석이 고백해 사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디 로맨스 소설에 대충 갖다 붙인 거 아니야? 우석은 흥미롭게 듣다가 본인이 고백했다는 부분에서 정색했다.
“야, 내가 고백을 했을 거 같아? 만약 사귀어도 내가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 왜요?”
“그냥 딱 봐도!”
우석은 손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리켰다. 후배는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 후배가 야근이 하고 싶었구나?”
“아뇨.”
웃던 후배는 우석의 농담에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민재와 워낙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런 소문이 부풀려지기도 하나 보다 싶었다.
참나. 헛웃음을 짓던 우석은 자신과 민재를 보고 굳어지던 지환을 떠올렸다. 어디서 소문을 주워들어서 그런 표정이었나? 그럼 이 헛소리가 어디까지 퍼진 거지?
“이 이야기 누가 또 알아?”
“…다 알걸요?”
다 안다고? 우석은 순간 비서실에 앉아 있을 오준을 떠올렸다. 그러나 비서실은 이런 종류의 가십이 좀처럼 도착하질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윤 비서는 센터장과의 만남을 대기하는 사람과 가벼운 가십을 떠들 정도로 사회성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더군다나 오준은 점심도 도시락을 싸와서 비서실에서 혼자 먹는다.
-혹시 소문 들었어요?
메시지를 보내보려고 쓰니 좀 이상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살쾡이처럼 굴어대는 사람이었다. 결정적으로 우석은 이런 일에 괜한 변명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도 했다.
만약 소문을 들었다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우석은 작성하던 메시지를 지우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